우리는 거란과 전쟁을 1차, 2차, 3차로 나눠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군필이라면 알다시피 전면전 외에도 국지전도 있음을 알고 있다.
고려도 거란과 전쟁 중 전면전만 있던것은 아니였다.
2차와 3차 전면전 사이에 여러차례 국지전이 있다.
오늘은 그 국지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논문을 보면 대부분 국지전을 포함하여 거란전쟁을 6차까지 나누었다 그래서 먼저 구분하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1차 침공(전면전)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손녕의 침공.
서희 외교 단판으로 종료.

2차 침공(전면전) :
강조의 난을 빌미로 거란 성종이 직접 침공.
양규장군의 활약이 있었고, 고려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고 퇴각.

이제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국지전이 전개된다.
하지만 그전에 국지전의 발단이 된 외교전부터 살펴보면,

주요 외교전:
1011년 1월,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 현종은 하공진을 보내 "예전처럼 계속 신하를 칭하겠다"는 화의의 사신을 보내자, 요 성종은 "고려 현종이 직접 친조하라"고 고려 사신단에게 답한 바 있다.

1011년 11월, 고려 현종이 장인인 김은부를 거란에 보내 요 성종의 생신을 하례하였다.

1012년 3월, 고려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가 거란에 갔다 귀국하며 압록강도 건너 내원성까지 돌아왔는데, 거란이 마음이 바뀌어 다시 붙잡아 돌아갔다.

1012년 4월, 요 성종이 사신을 보내 "고려 왕은 친조의 약속을 지켜라" 요구했다.

1012년 6~8월, 고려 현종이 문후사 전공지(田拱之)[3]를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왕은 병에 걸려 친히 조회하러 올 수가 없다" 답했다. 이에 분노한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고 공식 조서를 내렸다.

1012년 9월, 고려 현종이 요 성종의 분노를 거두려 사신들을 여러차례 보내기 시작한다. 서두공봉관 문유령(文儒領)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1012년 10월, 고려 현종이 공부상서 장영(張瑩), 예부시랑 유징필(劉徵弼)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요 성종이 돌아가는 고려 사신단에 태위 한빈(韓邠)을 사신으로 함께 보내며, 고려 현종의 장인 김은부도 되돌려주었다.

1012년 12월, 요 성종이 인진사 이연홍(李延弘)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1013년 1월, 고려 현종이 예빈소경 장계(張洎)를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1013년 2월, 고려 현종이 중추원사 채충순(蔡忠順)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다.

1013년 3월, 요 성종이 중승 야율행평(야율자충)을 보내 강동 6주를 반환을 요구했다.

1013년 7~8월, 요 성종이 중승 야율행평(야율자충)을 보내 강동 6주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1014년 2월, 요 성종이 상경부유수 야율행평(야율자충)을 보내 강동 6주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1014년 8월, 고려 현종이 내사사인 윤징고(尹徵古)을 송나라(북송)에 비단 2량, 말 22필과 함께 보내어 예전처럼 귀부할 것을 요청하였다. 송 진종은 등주에 관사를 설치하여 이들을 접대하였다.

1014년 9월, 요 성종이 장군 이송무(李松茂)를 보내 강동 6주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그러나 외교에서 요나라는 일이 잘 안풀리자 국지도발을 감행한다.

3차 침공(국지전)
- 1차 국지전
1014년 10월, 국구(요 성종의 장인)이자 상온(절도사)인 소적열(蕭敵烈)이 이끄는 거란군이 흥화진을 침략하며 3년 반 가량의 짧은 평화가 끝났다. 흥화진장군 정신용(鄭神勇)과 별장 주연이 이를 격퇴하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고, 강물에 빠져 죽은 자가 더 많았다.

이때 고려에서도 1014년 11월 ~ 1015년 3월, 고려 내에 김훈·최질의 난이 발생했다. 
문신들이 국난으로 녹봉이 밀리자 무신들의 밭(영업전)을 빼앗아,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이를 주장한 문신들의 귀양을 요구했다. 이 정변은 고려 현종이 서경 유수 이자림과 짜고, 고위 무신 19명을 위로하는 잔치를 벌이겠다는 명목으로 불러들여 전부 살해하여 싱겁게 끝났다.

- 2차 국지전
1015년 1월
1) 거란군이 흥화진에 쳐들어왔고, 고려 장군 고적여, 조익 등이 물리쳤다.
2) 거란군이 통주에 쳐들어왔다.
3) 거란군이 압록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고려 측 출구 동서에 성을 쌓았다. 고려 측이 장수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1015년 3월
1) 거란군이 용주(龍州)를 침략했다.
2) 3~4월, 고려 현종이 서경성에 전진해 머물며 전방을 주시했다.

1015년 4월, 요 성종이 야율행평(야율자충)을 사신으로 보내 또다시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니, 고려 현종이 사신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추후 억류된 사신은 여요전쟁이 끝난 뒤인 1020년에 요나라로 돌려보내었다.

4차 침공 (국지전)
- 3차 국지전
1015년 5월, 요 성종이 야율세량, 소굴렬에게 고려 정벌을 명하였다.

1015년 9월
1) 9월 12일, 거란군이 국경을 넘어 통주를 침략하자, 흥화진의 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산원 임억, 교위 양춘, 태의승 손간, 태사승 강승영 등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해 700 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그러나 정신용 등 지휘관 6명은 전투 도중 전사했다.
2) 9월 20일, 거란군은 우회하여 청천강 너머 영주(안주, 안북부, 평안남도 안주시)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압록강 너머로 다시 물러났는데, 그들을 노리고 추격한 고적여 등 5명은 전사하고, 2명은 포로로 잡히게 된다.
3) 요 성종이 감문장군 이송무(李松茂)를 사신으로 보내 또다시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했다.

- 4차 국지전
1015년 미상(1월 5일 침공과 연계되는 12월 말로 추정), 거란군이 선화진(宣化鎭,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과 정원진(定遠鎭, 지금의 평안북도 정주시)두 곳을 점령하고 성을 쌓았다. 강동 6주 한복판에 거란이 성을 쌓은 것이다.

1016년 1월 5일, 거란의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烈)이 곽주(郭州, 지금의 쳥안북도 곽산군)의 서쪽을 침공했는데 고려군 전사자가 수만명이 되었다. 대승에도 불구하고 전면 침공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일대를 약탈하고 물자만 챙기고 돌아갔다.

1016년 1월 9일, 거란의 사신 10인이 압록강에 왔으나 고려 측이 문전박대했다.

1016년 1월 말, 고려 현종이 12월 말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던 민관시랑 곽원(郭元)이 돌아왔다.
1) 곽원은 "거란이 해마다 침공하니 송이 견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송 진종은 (1014년 8월 환대와 달리 냉담하게) "고려가 오래토록 조공하지 않았다" 했다. 때마침 여진 측 사신도 송나라를 찾아 "거란의 소동으로 여러 해 조회하지 못했다" 호소했다.
그러자 이번에 송 진종은 "(고려와 여진이 딱하지만) 송나라는 거란과 화친의 맹약을 맺었기에 답변이 곤란하다", "진실로 마음에 깊은 슬픔이 따르며, 주변국이 화목하게 지내길 요청한다" 정도의 표현만 하며 도움요청을 거절하였다.


1016년~1018년 동안 거란/서여진/동여진/흑수말갈/정안국 등에서 고려로 내투(來投, 귀화)가 많이 일어났다. 거란 측의 참혹한 전쟁준비로 도망쳐 온 것일수도, 초원에 흉년이 들었을수도, 끌려간 고려인들이 도망쳐나온 것일수도, 거란이 심는 첩자일수도 있다.

1016년 5월, 고려 측의 전쟁준비도 참혹했는지, 구주(龜州)에서 귤선(橘僊)과 영몽(永夢)이 모반했으나 쉽게 진압되었다.

5차 침공 (국지전)
- 5차 국지전
1017년 5월, 거란의 소합탁(蕭合卓), 왕계충(王繼忠), 소굴렬(蕭屈烈)의 부대가 흥화진을 포위해 9일간 공격을 했으나 견일, 홍광, 고의가 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 요사에는 2월에 명령, 9월에 철군으로 기록했다. 요나라 수도를 기준으로 최초명령일과 귀환완료일일 수 있다.

1018년 5월, 고려 현종은 강감찬을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로 임명했다. 곧이어 10월,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삼아 군사의 전권을 주었다. 같은 달 예빈소경 원영(元永)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청했다. 즉 1018년은 양측의 피할 수 없는 전란의 분위기가 고조된 것이다.

6차 침공 (전면전):
우리가 흔히 알고있던 3차 여요전쟁.
강참찬이 귀주대첩으로 마무리하면서 거란군은 수 천명의 생존자만이 본국으로 귀환했다.

3-6차전의 전쟁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고려가 치밀한 전략전술을 내세워 전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3차전에서 보면, 2차전 때 흥화진을 함락하지 못해 결국 많은 손실을 입었던 것을 교훈삼은 거란은 흥화진을 우회하여 바로 통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의 전술을 예상한 흥화진의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그들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700명을 죽이고, 다수의 병사를 익사시켰다. 4차전 때에도 통주로 침입한 거란군을 홍화진의 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등이 배후를 공격하여 700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란도 고려의 작전을 예상하고 대응하여 결국 정신용 등 지휘군 6인을 죽였다. 이후 거란은 영주를 공격했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나 추격하던 대장군 고적여, 장군 소충현 및 고연적, 산원 김극, 별장 광언 등을 죽였다. 아마 3차전 이후 추격하는 고려군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던 것 같다. 영주 공격 후 거란은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상경과 중경으로부터 55,000명의 정병을 선발하여 증원군을 편성하는 등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고 곽주를 침략하여 수만 명의 고려군을 전사시켰다. 4차전에서 많은 수의 군사를 잃은 후 고려는 거란의 무력 침공에 강력 대응했다.

고려군의 전략전술이 빛나는 것은 제6차 전쟁이다.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소배압이 흥화진을 우회할 것을 예상한 강감찬이 기병 12,000명을 선발하여 산골짜기 한가운데에 매복시키고 굵은 줄로 쇠가죽을 꿰어서 흥화진성 동쪽의 큰 강을 막고서 적군을 기다렸다가 적군이 이르자 막았던 강을 터뜨리고 복병들을 내보내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수공의 목적은 수공으로 인한 거란군의 분열에 있었을 것이고, 거란군이 분열된 틈을 타서 12,000명의 고려 기병이 거란군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거란군의 전력에 손실을 주었다. 지형에 대한 정확한 이해, 지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전술의 선택, 여기에 고려군의 발빠른 기동과 기습이 라는전술이 더해져 이룬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배압은 전력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지만 재빠르게 남진하여 개경에서 1백리 정도 떨어진 신은현에 도착했다. 강감찬이 병사 10,000명을, 동북면병마사 또한 3,300명을 보내어 개경을 지원하였지만 소배압의 군대보다 늦어져 개경은 현종의 손에 달렸다. 현종은 2차전을 치를 때와는 다르게 도성 밖의 주민들을 모두 성 안으로 이주시키고 청야전술을 실시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뿐만 아니라 현종은 소배압이 거란군의 회군을 거짓으로 알리는 한편 은밀히 출동시킨 300여 의 척후병도 병사 100명을 출동시켜모두 격파했다. 이렇게 현종이 성을 굳게 지키고 거란군에 대응하며 시간을 번 사이에 변방의 군사력이 도착하여 개경의 방비가 강화되면서 거란군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나름대로 거란군에 대한 전략과 전술이 쌓이기도 했겠지만 도병마사, 중방 등의 회의기구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략전술의 모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3-6차 전쟁에서 또 주목되는 것은 군사지휘체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전의 전쟁 기록과는 다르게 전투의 규모에 따라 장군(정4품)-별장(정7품), 대장군(종3품)-장군-별장-산원(정8품), 대장군-별장-산원-교위(정9품) 등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무관직이 체계적으로 잘 정비되어 운영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또한 6차전에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에 맞서는 고려군의 군사력을 208,300명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가 군사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국의 병력수를 정확하게 파악했기때문에 나은 정확한 숫자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려는 2차 전쟁 이후 병력수에 대한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노력들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왔던 것이다.



출처

사료 문헌사이트 중 '요사',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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