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은 사실 제일 먼저 해전을 치루고 적선을 5척이나 격침했는데
그리 의미없는 것이 그 이상으로 18척을 잃었다. 그 때문에 일본군
에겐 대포쏘는 배라고 해도 해볼만하다고 여기게 되었고 덕분에 이
순신장군이 공적을 세울 기회가 주워졌다. 원균은 이 해전때문에
지레 겁먹어 70여척을 불태웠는데 사실 이 70여척도 원래는 100척
이어야 했다. 왕명으로 100척 이상을 유지하라고 한것을 30%나 해
먹은 것이다.-이 긴빠이 기록은 나중에 러시아가 깸.
포를 쏠때 대다수가 화약넣고 포탄넣고 그냥 쏘는줄로 아는데 이미
그 방법은 적어도 조선수군에선 옛 방식이 되었다. 수군에선 화력을
높히기 위해 화약넣고 종이를 넣어 압축시킨다음. 둥글넓적한 나무
판을 넣은 다음 비로소 포탄을 넣었는데 이렇게 하면 정교하면서도
강한 화력으로 발사되어 대포성능이상의 화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이 직접 개선하고 고안한게 있었는데 화약을 아예 기름
종이에 싸서-보이차 포장지처럼 생겼을듯- 넣은후 포를 쐈는데 이렇
게하면 화약을 절약하고 양을 조절할수 있어서 화력과 사거리도 조정
가능하다. 무엇보다 연발능력도 좋아져서 아무리 일본군의 배가 빨라
도 닿기 전에 격침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만큼은 명량시리즈에서도
나온적이 없다.
수군은 만성적으로 보급이 힘들었고 그중에서 화약은 특히 구하기 힘
들었는데 사실 대다수의 화약은 일본상인과 거래하여 얻었다. 예나 지
금이나 돈이면 다 되는데다가 국가관념이 부족할 때였고 무엇보다 조
선정벌때문에 어려움을 느낀 상인들이 이순신과 직접 거래를 했는데
다 뺏고 죽일수 있음에도 신용을 지키자 이게 일본내에 소문이 나서
정보거래까지 해주었다. 아마 오사카나 사이가등 먼 지역에서도 첩자
를 두었다는 소문은 이 때문에 시작된것 같다.
이순신은 차(茶)의 달인이기도 했고 난중일기에도 차를 마시는 기록이
자주 나왔는데 게다가 전라도쪽은 양질의 차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해
서 좋은 차를 우려냈을 것이다. 진린과 연을 맺을 때도 술자리를 갖기도
했지만 차를 마실때 우애가 더 두터웠고 차로 유명한 명나라에서도 보
기드물어 감탄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은 차를 우려내는 솜씨에 따라 성
품을 알수 있어서 이순신에 대한 신뢰가 깊었을 것이다. 본인도 이에
대한 사실은 최근에 알았는데 지금도 전라도에는 장군다도라고 하는
차예식이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 안한 도쿠가와는 자신이 맡은 에도지역이 어렵다는
이유로 못 갔는데 핑계가 아니라 진짜로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뜬금없이 타지역의 영주가 부임해서 에도지역의 호조들이 반발하는
일이 많았고 산적의 침입에다 늪지대라서 해충과 전염병등등 해결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다 에도성까지 짓는등 도저히 지원할 틈이
없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첩자가 직접 살핀 것이라서 그냥 놔두는게
히데요시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하여 두었다. 그런데 도쿠가와는 일본
에 몇 안되는 대포의 달인이어서 그가 참전했다면 해전의 양상이 어
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일본에선 다완 등 도자기에 대한 욕망으로 수탈이 많았고 도공도 잡아
가서 일본내에서도 만들게 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 일본내의 도자기들은
수탈품이라고 여겼는데 실은 전쟁전에 부산을 통해 직접 다완을 만들게
해서 주문품도 제법 되었다. 국내의 다완은 제사용이라서 받침이 높고
주둥이부분도 넒었지만 실제로 쓰이는 다완은 봉투같은 크기와 주둥이를
같고 있었고 받침에는 손가락이 들어갈 공간이 있어서 엄밀히는 다른 물
건이었다. 센노리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조선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제대로 된 다완을 구할수 있기에 히데요시를 말리려 했지만 죽임
당했고 차를 마시는 등의 다도는 히데요시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장검을 만든 태구련은 원래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사람인
데 그 고마움때문인지 일본에서 배운 카타나만드는 기술을 응용하여 이순
신의 장검을 만들었다.
조선에 투항해 함께 싸운 항왜들은 대다수가 돈보다는 이순신의 인품과
조선의 좋은 풍습에 감화되어 들어온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다른 부
하들과 대등하게 조선군으로 대우해주고 자기 나라에선 보기 힘든 리더쉽
등에 감화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이 많았다.
거북선의 하단에 달린 귀면은 원래 돌출되어 있었는데 이걸로 물살을 가르
면서 무게추역할도 해주며 충파에도 사용되는 기능을 지녔다. 다른 나라의
갤리선들도 앞부분에 무게를 주어 높은 파도를 헤쳐가게 하는 방식인데 이
러한 점을 이용해 판옥선보다 좀더 빠르게 나아갈수 있었다. 다만 전후에
만들어진 거북선은 장식용에 가까워지면서 실전성을 잃어갔고 이 부분은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이 남사스럽게 생겼다며 납작하게 묘사해 버리는 바
람에 이후 거북선들에선 흔적으로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인 고니시는 가톨릭 신자이고 상인출신이라서 되도록
전쟁을 빨리 끝내고 적들에게 항복만 요구하는 전략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양민들까지 합세해 끝까지 덤비자 가토못지 않게 학살을 하게 되어 버렸
다. 그래서 이에 대한 죄책감때문인지 고아가 된 아이들은 직접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무조건 나쁘게 나와야 하다보니 작품에는
이러한 것을 묘사하는 경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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