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제가 정리요약해서 글을 올리려했으나, 너무 내용이 방대하고 상세한대다가 거를 타선이 없어 그대로 논문을 인용하는게 좋을것 같아 논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1. 머리말
거란은 한대(漢代) 선비(鮮卑)로 불렸으며 진대(晉代)부터 요산(遼山)일대 에서 살면서 불리게 된 부족명이다. 거란은 요하(遼河) 상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양, 말, 돼지뿐만 아니라 농작물을 재배하는 반유목민이었다. 또한 이들은 소금 등을 생산하여 무역에도 종사하였으며, 주변 국가나 민족을 약탈하는 경제와 잡아온 포로를 이용하여 경작하는 혼합 경제생활을 하였다. 거란은 7세기 무렵 고팔부(古八部) 연맹으로 부족을 조직하였다. 이후 고팔부 연맹은 수십부(隋十部)로 변화한다. 거란의 고팔부와 수십부는 기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 부락의 특징을 지녔지만, 아직 부족 내지는 민족공동체는 형성되지 않았다. 수십부는 흘신수(紇臣水)부근에 살았으며, 10부로 나뉘어 있었다. 수십부는 군사가 많은 곳이 3천여명, 적은 곳은 1천여명 이었다. 전쟁을 일으킬 때는 10부가 상의해서 결정하였으며 수렵 시에는 각부가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이후 대하씨(大賀氏)연맹과 요련씨(遙輦氏)연맹 시기를 거치면서 부족제도가 생겨 점차 발전하였다. 이러한 부족제도는 요대 부족군을 형성하였으며, 유목민족 특유의 기마 전술을 발전시켰다. 거란을 국가적 단계에서 제국적 단계로 만든 것은 부족연맹 체제였다. 이 부족연맹을 국가적 단계로 통솔한 것이 야율씨족(耶律氏族)이었다. 야율씨족의 아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황소의 난’으로 당이 혼란과 멸망으로 가는 시기에 907년 부족을 통합하였다. 아율아보기는 세습군주제라는 중국식 제도와 유교적 형태를 채택하여 중국 지배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효과적인 제도가 2대 태종 대에 확립된 이중지배체제이다. 거란의 이중적지배체제는 북방민족과 한인(漢人)에 대한 통치구조이다. 거란의 이중적지배체제는 태조 대에 만들어진 북재상(北宰相), 남재상제(南宰相制)에서 시작되었다. 907년 태조(아율아보기)가 천황제(天皇帝)로 등극을 하고, 황후가 지황제(地皇帝)로 등극을 하면서 태조(아율아보기)가 우월(于越)겸 질랄부이리근(迭剌部夷離菫)9)으로서 연맹가한(聯盟可汗)이 되었다. 연맹가한이된 태조는 북·남양부(北南兩府)에 재상(宰相)을 두면서 각 부의 이리근을 나누어 그 예하에 두었다. 이리근은 각 부의 수령이란 뜻과 함께 돌궐어로 통군마대관(統軍馬大官)으로, 각 부의 군사수령(軍事首領)을 가리킨다. 916년 태조는 황제의 존호인 대성대명천황제(大聖大明天皇帝)로 등극하고, 황후의 존호를 응천대명지황후(應天大明地皇后)로 올렸다. 태조의 아들인 야율배(耶律倍)를 황태자로 책립하였다. 연호를 신책(神冊)이라 하였다. 태조는 922년에 거란의 핵심 부족인 질랄부를 5원부(五院部)와 6원부(六院府)로 나누고 이를 북원과 남원이라 하였다. 각각의 북·남양원에는 이리근을 두었다.
북원은 북원대왕이 책임을 맡고, 북부재상부를 두어 황후의 일족인 심밀씨(審密氏)를 재상으로 삼았다. 또한 남원은 남원대왕이 맡고, 남원재상부는 을실부(乙室部)가 핵심이 되어 저특부(楮特部)와 돌거부(突擧部)를 포함하고 있었다. 태조는 동생인 야율소(耶律蘇)에게 남원재상직을 맡기었다. 이들 양원은 상설관직이 되었으며, 황족이 맡던 재상직을 성종 이후에는 한족도 맡을 수 있었다. 북·남양원에는 본원군마(本院軍馬)를 통솔하게 하였으며, 이들을 북부재상 아래 배속시켰다. 938년 북·남양원과 을실부이리근을 대왕(大王)이라 고쳐 부르고, 각 부의 이리근을 당의 제도를 따라서 절도사로 고쳐 불렀다. 절도사는 행정과 군정을 총괄하였다. 태조 대의 북·남원이 태종 대에 북추밀원으로 흡수가 되고,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남추밀원을 설치하였다. 태종은 936년에 연운십육주를 탈취하고, 국호를 대요(大遼)로 고쳤다. 요가 건국된 이후 부족조직은 군정합일(軍政合一)의 특징을 강화한다. 요의 부족조직은 군정합일로서 행정, 생산, 군사로 이루어진 삼위일체의 직능을 맡았다. 부족민은 매년 양(羊)으로 조세를 납부했으며, 세액은 소유하고 있는 목축의 수로 결정하였다. 부족 장관인 절도사는 세액 외에 매년 안장, 말, 귀중품 등을 조정에 진상하였다. 또한 봉록 이외에 관원에게 내리는 하사품도 모두 부족민에게서 거두었다. 이와 함께 요가 건국된 이후에도 부족적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사귀전(射鬼箭)이 있다. 사귀전은 요군의 출정의식으로 황제가 친정을 위해 갑옷을 입고, 선대 황제들에게 제사를 올릴 때 시행되었다. 사형수 1명을 출정을 나갈 방향의 기둥에 묶어 놓고 귀신 우는 소리를 내는 화살인 명전(鳴箭)을 쏘아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꽂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전장에서 군사를 물릴 때도 포로를 잡아 같은 방법으로 시행하였다. 요는 거란족이 아니더라도 공을 세울 경우 중요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는 거란족이 아닌 종족도 거란족과 같이 될 수 있었다는 것으로 거란군의 효율적 운영에 적합하였다. 거란족화 된 다른 종족가운데 한족(漢族)인 한덕양(漢德讓)이 있다. 한덕양은 한인이면서 요에 공을 세워 대승상 진국공(鎭國功)이 되었다. 이후 1004년 국성(國姓)인 야율씨를 하사 받으면서 야율융운(耶律隆運)이 된다. 야율융운이 아들을 두지 못하자 천조황제가 황자 야율오로알(耶律敖盧斡)로 후사를 잇게 하였다. 야율융운은 문충왕부(文忠王府)를 세우고 중앙군인 궁위기군(宮衛騎軍)을 양성하였다. 본 글 2장에서 요의 군사제도를 살펴보겠다. 요는 부족적 전통과 중국의 제도를 결합하여 자신들만의 군사제도를 운영 하였다. 3장에서는 요의 기병 전술과 보병을 활용한 공성 전술을 살펴보겠다. 요는 건국 초기 초원에서 부족간의 전투에 유리한 기병중심의 전술을 운영하였지만, 농경지역을 정복하면서 공성을 위한 보병 전술을 발전시켰다.
2. 요의 군사제도
가. 중앙군
발해와 중국 화북지방을 점령한 요는 이미 농경사회에 접어들어 있었다. 태조 이후 황제들은 농상을 장려하고 방적을 교육하였다. 또한 병력이 이동할 때는 벼가 심어진 논을 피하게 하였다. 이는 요군이 봄의 경우 1월에 출병하여 4월에 철수하고, 가을에는 9월에 출병하여 12월에 철병하는 것을 상례로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요는 중농정책과 병농일치 정책의 하나로 둔전(屯田)을 운영하였다. 둔전은 군둔과 민둔의 두가지로 운영되었으며, 군둔은 군사 조직의 형식으로 병호(兵戶)가 종사하도록 하였다. 민둔의 경우 민호를 주체로 종사 시켰다. 농경사회로 접어든 요는 군사가 가장 많았을 때가 1백64만2천8백 명 정도였으며, 이중 1백10만7천3백명 정도가 향병 이었다. 이 병력수에는 궁정(宮丁), 대수령(大首領), 제부족(諸部族)과 중경, 두하(頭下) 등의 주(州), 속국군은 포함되지 않은 수이다. 요의 관직 가운데 군사와 관련된 병부는 주로 북면관의 북추밀원(北樞密院)에서 맡아보았다. 북추밀원은 병기(兵機)와 무전(武銓), 군목(群牧), 군마(軍馬)의 일을 맡으면서 군정을 총괄하였다. 북면관의 북면군관(北面軍官)이 궁장(宮帳), 부족(部族), 경주(京州), 속국(屬國)에 소속된 군대를 통솔하였으며, 요나라의 군관(軍官)은 다음 〈표 1〉과 같다.
요의 황제는 전쟁이 있을 때는 문무 관료를 대동하고, 푸른 소와 흰 말로 하늘과 땅과 일신(日神)에게 고하였다. 하지만 달(月)에게는 절하지 않았다. 황제는 선조의 능(陵)과 목엽산신에게 고하고, 각 도에 조서를 내려 군사를 징집하였다. 단, 남·북·해왕과 동경의 발해 지역 군대와 연경의 통군병마(統軍兵馬)는 조서를 받더라도 출병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요군의 핵심 병력이었으며, 황제의 칙사가 금어부(金魚符)를 통해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중앙군으로 전장에 출정하는 훈척대신(勳戚大臣) 가운데 행영병마도통(行營兵馬都統), 부도통, 도담(都監)을 각각 1명씩 선발하였다. 또한 각 군의 병마 가운데 정예병을 선발하여 3만으로 황제를 보호하기 위한 호가군(護駕軍)을 편성하였다. 황제가 친정시에는 친왕 1명을 권지군국대사로 유주에 남겨 둔다. 송나라 경내로 진입시에는 군을 3로로 나누어 광신군, 웅주, 패주로 각각 들어간다. 어가는 반드시 중도(中道)로 경유하고, 병마도통과 호가등의 군사들이 모두 따른다. 황제가 친정하지 않을 경우, 중신(重臣)이 15만여명을 통솔하여 3로로 나누어 출정한다. 북경에서 군사를 모아 9월에 진격하고, 12월에 물러난다. 요는 중앙군과 함께 부족군도 운영하였다. 요 조정의 명령에 의해 부족장들은 부족의 크기에 따라 부족군을 편성하였다. 부족장들은 자신들의 군마와 병력을 조사하고, 황제에게 보고한 후에 출정지로 이동하였다. 요의 군사제도는 유목민의 유습을 이어받은 병민 일치 였다. 각 부족 장관은 평시의 행정 장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군대의 지휘관으로 전환되었다. 요의 북면관에 소속된 거란족과 기타 부족들은 대부분 기병이 중심인 부족군(部族軍)에 속하였으며, 한족(漢族)은 보병 중심의 향병에 포함되었다. 각 부족으로 구성된 군대는 부족군으로 칭하였으며, 요의 군대 서열 가운데 기병 중심인 어장친군(御帳親軍)과 궁위기군(宮衛騎軍)의 다음이며, 보병 중심인 오경향병(五京鄕丁)의 위였다. 어장친군은 황제의 친위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장친군으로 태조가 만든 대장피실군(皮室軍)과 응천황후가 만든 속산군(屬珊軍)이 있었다. 태조는 피실군을 관리하기 위한 피실상온사를 설치하고, 여러 부족의 정병 1천여 명을 뽑아 시위친군(侍衛親軍)을 만들었다. 피실상온사는 후에 복심부(腹心部)라 하였으며, 좌우피실상온관을 두었다. 『요사』에는 좌피실상온으로 조복 토벌에 공을 세운 소배압에 대한 기록이 있다. 피실군은 친위군으로 전쟁터에서의 활약한 것이다. 요의 친위군은 응군(鷹軍)에서 파생된 것이다. 응군은 태조의 친위군이었으며, 매처럼 빠르고 용맹한 정예군으로 편성되었다. 태조는 응군을 동원하여 909년 흑거자실위를 토벌하였다. 요의 친위군은 기병 중심이며, 응군(鷹軍), 용군(龍軍), 봉군(鳳軍), 호군(虎軍) 등이 있다. 친위군은 태조대에 3만여기였으나 태종 대에는 30만여기로 늘어났다. 태종은 피실군을 좌·우·남·북·황피실상온사로 확대 설치하였으며, 황제 직속으로 하였다. 피실군은 윤번으로 궁장(宮帳)을 지켰고, 오경과 변방 요지에 주둔하였다. 이들 시위군은 시위사(侍衛司)에서 총괄하였다. 속산군은 20여 만명의 기병으로 응천황태후(應天皇太后)가 설치하였다. 태조를 따라 전장에 나가 항복한 포로들 가운데 선발하여 정예병으로 키웠다. 이밖에 어장친군으로 묵리군(墨離軍)과 사이군(舍利軍)이 있었다. 묵리군은 태조가 설치하였으며, 태종이 즉위하면서 얼마 안가 폐지하였다. 귀족 자제로 구성된 사이군은 요군 가운데 정병 4,000여 명을 선발하여 도성 안을 지키게 하였다. 이들은 매일 1천여명씩 돌아가며 번을 섰으며, 황제를 따라 행궁의 경비를 책임지었다. 다음 〈표 2〉와 같이 요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민호(民戶)들을 이주시켜 궁위(알로타)를 설치하고, 친위군으로 궁위기군(宮衛騎軍)을 운영하였다. 태조는 궁위기군을 통해 자시의 친위군을 보강하였으며, 역대 황제들도 이와 같이 궁위기군을 설치 운영하였다. 궁위기군은 궁위에 소속되어 평시에는 농경에 주로 종사하였다. 북면관의 제할사(堤轄司)는 평소 궁위기군을 관리하는 관서였다. 이들은 각 궁 소속의 궁위기군을 관리하였으며, 전시에는 5경과 2주에서 군사를 소집하는 일을 맡았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요는 신속하게 병력을 10만 기 정도를 모을 수 있었다. 이들 제할사는 12궁 1부에 각각 배치가 되었으며, 각 궁장 제할사 대부분이 5경과 평주(平州), 봉성주(奉聖州)에 있었다.
요는 5경인 상경, 동경, 중경, 남경, 서경에 유수(留守)를 두어 부윤(府尹) 겸 본로병마도총관(本路兵馬都總管)을 겸하게 하였다. 각각 5경의 유수는 민정과 군정을 담당하였다. 수도의 궁성 방어는 당제를 모방한 좌우감문위를 두어 여러 궁문을 지키고, 출입과 관련된 문서를 관리토록 하였다. 군관으로는 좌감문위상장군과 우감문위상장군이 있으며, 그 아래 아문(衙門)과 감수(監守) 등을 두었다. 요의 5경에는 요의 주력군이면서 수도 방위 및 전시의 중앙군으로 참전한 오경향병(五京鄕兵)이 있었다. 오경향병은 아래 〈표 3〉과 같이 구성되었다. 5경의 오경향병은 1백10만7천3백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밖에 요에는 예랄군(栧剌軍)이 있었다. 예랄군은 조정에 직속된 부대였으며, 황제 의장을 호위하는 일을 맡았다. 군에도 예랄사를 두어 변방의 척후 군사정보 등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요의 금군은 남경과 중경, 서경에 주둔하였다. 군사업무는 각각 서경은 을실왕부, 중경은 남·북대왕부, 남경은 원수부가 맡았다. 동경의 경우 도부서사와 동경 통군사가 있었다. 상경은 상경총관부와 상경성황사사가 상경의 군사업무를 주관하였다. 거란의 15세 이상 성인 남자는 50세까지 모두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는 거란인은 모두 군인이라는 전민개병제를 뜻한다. 거란은 주생활이 유목과 수렵이었으므로 평시에도 말타기, 활쏘기 등의 전투기술을 연마하였다. 거란족은 전쟁이 임박하면 각 부족의 형편에 알맞게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를 ‘부족군’이라 한다. 앞에서 설명 하였지만 부족군은 병력수가 가장 많았던 오경향병의 위였다. 이처럼 요는 기병중심인 부족군을 중앙군으로서 중시하였다. 부족군은 거란족을 포함한 주변 유목 민족을 포함하기도 하며, 부족군과 같은 의미로 규군(糺軍)이 있다. 규군은 거란 초기 거란족 안의 다양한 부족군을 뜻하였지만, 거란이 주변 민족을 지배하면서 거란 이외의 다양한 부족의 군대를 규군으로 범칭(汎稱)하였다. 규군은 황궁을 수비하고, 전쟁시에는 황제와 함께 전선(戰線)에 나가 중앙군으로 활약하였으며, 규군가운데 요련규군은 926년 선봉군으로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을 정복하였다. 또한 규군은 요를 지키기 위한 수비군으로도 운영 되었다. 요의 황제는 평소에 알로타라 불리는 궁위에 있었고, 출행 때는 날발(捺鉢)이라 부르는 행영에 있었다. 이 행영에서 진(鎭)을 구성하고 부족군을 통솔하였다. 아래의 〈표 4〉는 요의 중앙군을 도표화 한 것이다.
요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북면행군관(北面行軍官)을 설치하였다. 행군관은 군사 기밀을 다루는 추밀(樞密)과 각 부대를 통솔하는 도통(都統), 부서(部署) 등을 예하에 두고, 선봉군(先鋒軍)과 양익군(兩翼軍)을 운영하였다. 전장에 임할 때는 중군(中軍)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전선을 유지하며 진군하였다. 북면행군관에 관한 것은 아래 〈표 5〉와 같다.
나. 지방군(변방군)
국가들과 접하며, 북쪽으로는 조복과 출불고(朮不姑) 등과 서쪽으로는 토혼, 회골, 당항 등의 국가와 반목(反目)을 하고 있었다. 요는 사방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아래 〈표 6〉과 같이 북면변방관(北面邊防官)을 설치하였다.
위의 〈표 6〉과 같이 요는 1068년 도종(함옹 4년) 대에 북면변방관에 도통군사를 설치하였다. 요의 지방군사 기구인 도통군사는 북면관에 속하며 예하에 통군사, 부사, 도감 등을 배속시켰다. 남·북대왕원에 남·북 도통군사가 있으며, 이들이 전쟁시에 도통군을 통솔하였다. 동경도통군사, 동북로도통군사, 동로도통군사, 서남면도통군사, 남경도통군사, 산서병마도통군사, 보주도통군사, 서북로통군사, 도탑령통군사 등은 변방 주둔군을 통솔하였다. 특히, 동경도통군사는 동경도 각 로(路)의 병사들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동북로도통군사는 태주(泰州), 장춘주(長春州), 영강주(寧江州), 동북 제부의 병마를 총괄토록 하였다. 남경도통군사는 남경한군(南京漢軍)을 총괄하고, 산서병마도통군사는 서남쪽 변방을 방어토록 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행군시에도 통군사를 설치하였으며, 동정통군사(東征), 서정통군사, 남정통군사가 있었다. 행군도통은 전시에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였다. 황제가 친정을 할 때는 훈척대신 중에서 선발하여 행영병마도통과 부도통을 삼았다. 대장이 출정할 때는 행군도통이라 불렀다.태조가 919년 요양의 옛 성을 수축한 이후에 발해와 한족(漢族)의 민호(民戶)를 옮겨와 살게 하였다. 수축한 성의 이름을 동평군(東平郡 : 현재의 요령시)이라 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방어사는 관할구역의 방어를 담당하는 군관이며, 요대에는 방어주의 장관으로 그 위치는 단련사(團練使) 아래 자사(刺史)의 위였다. 방어사 아래 방어부사와 방어판관을 두었다. 요의 각 주에는 절도사(節度使)가 있었으며,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였다. 요는 주군(州軍) 외에 부족 절도사가 있어 거란족 및 기타 부족을 다스렸다. 부족조직 및 그 부민은 변방을 방어하는 부족군이 되어 군사적 책임을 다하였다. 각 부족은 정해진 방목지와 수비 지역을 가지고 있었다. 부족군 가운데 오원부와 육원부는 남경에 주둔하여 송나라에 대비하고, 오외부는 동북에서 여진을 방어하며, 돌여불부와 저특부 등은 서북에 주둔하면서 서북의 각 유목부족을 방어하였다. 날랄부와 을실부, 품부 등은 서남에 주둔하면서 서하와 조복을 대비 하였다. 요는 국경 지역에 초토사(招討使)와 통군사(統軍使), 도부서사를 설치 운영하였다. 서북로초토사는 진주(鎭州)에 주둔하고 서북지역의 유목민을 통제하였다. 서남로 초토사는 풍주에 주둔하며, 서하 방면을 방어하였다. 동북로 통군사는 태주 지역을 담당하고, 도부서사는 황룡부에 위치하면서 동북 지방의 국경을 수비하였다. 국경 지역의 여러 부족민으로 조성된 군대를 규군(糺軍, 부족군)이라 하였다. 이들은 농경민이 아닌 유목민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요의 수비군으로 운영되었다. 이들 수비군의 군호(軍戶)는 군목이규군(群牧二糺軍)으로 편성하였으며, 군목이규군은 동북로와 서북로의 여러 규(糺)로서 군을 편성하였다. 996년 성종(통화 14년)은 각각의 수비군에 도감을 두어 규군을 정식 수비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요의 동북방 국경 수비군과 관련된 것으로 『요사』에 고려의 『대요사적』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요가 고려와 여진에 대비하여 동북방 국경 수비군을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동북방 국경 수비군은 모두 1부(府), 1주(州), 2성(城), 70보(堡), 8영(營)으로 구성되며, 정병 2만2천 명이었다. 고려와 여진을 방어하기 위한 동북방 국경 수비군은 아래 〈표 7〉과 같다.
요는 변방지구에 안무사(安撫使)를 분산 배치하였다. 이들은 변경을 순찰하고 적의 반항과 항복에 대한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제치사(制置使)를 두어 지방을 관리토록 하였다. 제치사는 제사(制使)라고도 하며,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관리하는 일도 맡았다. 제치사는 1로 또는 여러 로의 군사를 통괄하는 일도 수행하였으며, 임시직이었다. 이밖에 요는 지방의 치안을 위해 연변순검사(緣邊巡檢使)를 두었다. 특별한 경우 기병 6만명 정도가 계절을 따지지 않고 국경 밖 3백여리를 순찰하였다. 이들 특별 순찰병들은 순찰지에서 사람들이 살수 없도록 주거지를 파괴하고, 곡식과 가축을 기르지 못하게 하였다.
요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은 국가들을 『요사』는 속국군(屬國軍)으로 분류하고 있다. 기록된 국가는 59개이며, 이들 국가 가운데 신라와 고려가 포함되어 있다. 속국군은 요나라의 지원군으로서 지원군의 규모는 국가의 편의에 따라 결정하였다. 만약 속국이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요나라는 바로 응징하였으며, 흥종 중희 17년(1048년)과 같이 철불득국(鐵不得國)이 지원군을 보내고자 하여도 조서를 내려 불허한 예가 있다.
3. 요의 기병과 보병 전술
가. 기병 전술
요군은 황제의 친정과 황제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에도 동원병력은 대략 10만 내외였다. 요군의 최소기본단위는 조(組)와 편사(偏師)이다. 요군은 항상 5~10기를 단위로 하는 조를 편성하여,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 적의 뒤를 추격할 경우에는 반드시 나머지 해당 조원도 함께 추격에 가담하여 서로 협조하도록 하는 군령(軍令)이 있었다.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그 구성원 전원을 극형에 처하였다. 이 때문에 거란군의 기병들은 항상 개인 행동을 삼가고, 적과 맞서서 싸울 때는 서로 힘을 합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요의 1편사는 일반적으로 전차(戰車)의 경우 25대이고, 보병의 경우 사졸 50명이다. 이밖에 부대 규모로는 최소 단위가 1대로 5백~7백명의 규모였다. 그리고 10대를 1도(5천~7천명), 10도를 1면(5만~7만명)으로하여 전투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요군은 부대를 편성하면서 형제, 숙질, 부자와 같은 친족을 하나의 대로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친족 또는 씨족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부대원간의 응집력이 높았다. 요군은 행군을 하면서 최대한 말을 쉬게 하였으며, 북을 세 번 두두리면 고함을 치며 사기를 올렸다. 적을 만나면 그동안 타지 않았던 말을 타고 대오를 갖추며 싸웠다.요군은 기병 1인이 말 3필을 가지고 다녔다. 이는 말의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유목민들이 자주 사용하던 전술이다. 요군은 전쟁에 참전하더라도 국가에서 병기와 군량을 제공하지 않았다. 요군은 스스로 기병 한명 당 철갑 1벌, 마천(馬韆), 비(轡), 마갑피철(馬甲皮鐵), 활(4장), 화살(400개), 길고 짧은 창, 골타(餶朶), 부월(斧銊), 작은 기, 추추(鎚錐), 화도석(부식돌), 마우(馬盂), 사(粆) 1말, 사대(粆袋), 탑구(搭鉤), 전산(氈傘) 각 1개, 미마승(麋馬繩) 2백자를 스스로 준비토록 하였다. 또한 전투병사의 보급을 위하여 打草谷騎(타초곡기)와 守營鋪家丁(수영포가정)를 각각 1인씩 두었다. 타초곡의 임무는 병사가 출정시 병기와 장구를 조달하고 군량과 마초(馬草)를 보급하였다. 요군은 전진할 때에 좌·우 익군을 평행선 노상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적의 군세가 막강할 경우 접근전을 피하고, 적의 보급을 끊어 버리기 좋은 전술이었다. 요군의 전술적 특징으로 돌격기병이 있다.
돌격기병은 1기병이 3말을 이끌고 파상적으로 선봉 1대가 소리를 지르며 적을 공격하였다. 선봉 1대는 적의 저항이 약하면 계속 파상적으로 돌격을 하고, 적의 저항이 크면 후퇴를 하였다. 선봉 1대를 2대가 지켜보고 있다가 선봉 1대와 같이 파상적으로 적진으로 돌격을 한다. 이때 선봉 1대는 휴식을 취하며 말에게 물과 풀을 먹인다. 마찬가지로 3대는 2대를 지켜보고 있다가 같은 행동을 하였다. 이렇게 요군은 적을 공격하면서 3교대로 나누어 휴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병사와 말을 쉬게 하여 돌격기병의 효율성을 높일수 있었다. 요군은 돌격기병의 파상적인 공격 후에도 적이 쉬지 못하도록 타초곡군을 이용하여 적을 교란시켰다. 한편, 요군은 3교대로 적을 공격하는 방법과 함께 적의 선봉을 꺽기 위한 다른 전술로 병력을 3등급으로 나누었다. 제1등급은 최정예병으로 편성하고 이들은 전열의 최후방에 배치하였다. 제2등급에 속하는 병사들에게는 전열의 중간에 배치하였으며, 3등급에 속하는 병사들을 전열의 최전선에 배치하였다. 적이 3등급의 병사들과의 싸움으로 전열이 흐트러지면 제2, 제1의 정예병이 투입되는 전술이다. 요군은 복병과 같은 기습군과 기병을 이용한 기동 특수군을 활용하였다. 요군의 수색대인 원탐난자군(遠探攔子軍)은 각 부대에서 가장 빠르고 날쌘 자를 1백여명 뽑아서 편성하였다. 이들은 선봉군 전·후 8km 부근에서 전진하였다. 야간에는 본대와의 거리를 2~4km로 유지하면서 천천히 달렸으며, 언제라도 말에서 내려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순찰중에 적이 있으면 즉시 사로잡아 정보를 구하고, 적의 세력이 크면 신속하게 선봉부대와 주력부대에 이를 보고하였다. 원탐난자군은 기동간 경계 및 수색임무 이외에도 숙영지에서의 경계임무도 아울러 수행하였다. 거란군은 행군로상에 있는 요새들을 바로 공격하였으며, 만약 적의 요새가 크면 공격시의 허와 실을 따져서 공격의 유무를 결정하였다. 요군은 적의 밀집 방어를 뚫기 위한 전술로 부족군으로 이루어진 철요군(鐵鷂軍)을 운영하였다. 철요군은 철로 기사와 말을 중무장한 것으로 돌격기병의 역할 보다는 적의 밀집방어를 파괴하기 위한 특수기병이었다. 철요군은 철로 중무장한 갑옷을 병사와 말이 입고 있어서 적의 칼날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밖에 송에서 항복한 포로를 활용한 특수군으로 사첩군(四捷軍)과 귀성군(歸聖軍)이 있다. 이와 같이 요군의 주력은 기병으로 이루어진 돌격기병이였다. 이들은 스스로 보급을 충당해야 했으며, 적지에서 물품을 약탈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약탈은 고려와 같은 국가에서 실시한 청야전술에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본국에서의 보급도 전선이 길어질수록 원활하지 않아, 요군은 장기간의 지구전을 수행하기 힘들었다.
나. 보병 전술
요군은 한족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요새화된 성곽을 점령하기 위한 전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산과 계곡이 많고, 성곽이 많은 지역에서는 기병 보다는 보병이 효과적이다. 요군은 한족이 주축이 된 보병 중심의 향병을 운영하였다. 요는 한족을 활용한 보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1023년에 병마도총관부(兵馬都摠管府)를 설치하였다. 병마도총관부는 남면통병(南面統兵)의 상설기구이며, 5경의 유수가 병마도총관을 겸하여 총괄하였다. 병마도총관부에는 한족이 많으며, 송에서 항복한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마도총관 아래에 병마부총관과 동지병마사(同知兵馬使), 병마판관(兵馬判官)등이 있었다. 병마도총관부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요사』에 956년 후주가 침략해 오자 남경유수 소사온을 병마도총관으로 삼아 대적하게 하였으며 후주의 익진관 등을 함락시켰다. 963년에는 송이 익진관에 성을 쌓으려 하자 남경유수가 이를 막고 있다. 또한 993년 성종은 동경유수 소항덕(蕭恒德 : 고려사에는 소손녕(簫遜寧)임)에게 고려 1차 침공을 맡겼다. 5경의 유수는 병마총관을 겸하면서 오경향병을 통솔하였으며, 오경향병은 요의 주력군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오경향병은 농민병으로 일정기간 순번을 통해 군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때문에 유목 생활이 군사훈련과 같았던 상무적 성격의 요군은 전술적 변화를 갖게 된다. 요군은 전술적으로 보병 중심의 운영으로 돌격기병에 의한 신속한 전술이 아닌, 방진(方陣)에 의한 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보병은 기병 보다 공성전(攻城戰)에 효과적이다. 요군은 적의 성곽을 공격할 때 성 주변의 참호(塹壕)를 정복민을 활용하여 메우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의 투석기를 사용하여 성곽을 파괴하였으며, 성곽을 오를 때도 정복민 가운데 노인과 어린이를 강제로 먼저 오르게 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점차 요군은 기병과 보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전술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공성 장비도 함께 개발하였으며, 공성을 위해 공병단도 운영하였다. 공병단은 공성을 위한 굴착과 토산축조를 전문으로 하는 부대였다. 요군의 보병이 공성을 위해 운제(雲梯), 당차(撞車), 발석차(發石車) 등의 공성 장비를 갖고 성을 공격하였으며, 보병을 엄호하기 위한 특수군으로 포병(砲兵)과 노병(弩兵) 등이 있었다. 요군은 적의 성곽이 견고하고 방어가 철저해서 정복하기 힘들면 성안으로 대량의 활을 쏘아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과 성을 포위한 후에 북등을 치며 시끄럽게 해서 적을 겁주는 전술이 있었다. 요군은 공성전에도 적성이 버티고 항복하지 않으면,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본진은 적성을 통과하여 진군하였다. 남은 병력은 적성을 포위해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었다. 요군은 군량 등을 현지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장기전이 불리했으며, 후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병력을 남겨 둔 것이다. 요군은 통과한 지역의 적군이 뒤늦게 인근 적 요새와 공동 전선을 구축할 경우를 대비하였다. 통과지역 각 성 부근에 정예기병 100여 명씩을 매복시켰다가 적 성이 열리면 성 안으로 기습 공격을 하여 성안을 정복하거나, 야간에 풍향을 이용한 화공으로 적 성안을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요의 군제와 전술을 살펴보았다. 요는 건국 전에 고팔부와 수십부, 대하씨 연맹, 요련씨 연맹을 거치면서 부족제도를 완성하였다. 요의 태조인 야율아보기는 과거 혈연조직을 기초한 씨족집단을 재편하여 요제국 체제하의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으로 바꾸었다. 요의 태조는 북·남 재상부를 만들어 거란족의 민정과 군정을 맡게 하였으며, 태종 대에 북면관에 예속시켰다. 태종 대부터 북면관은 요의 군사를 총괄하였다. 태조와 역대 황제들은 항복한 정복민을 자신을 궁위에 배속시켰으며, 이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친위군인 궁위기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보병의 중요성이 부각 되면서 한족을 활용한 오경향병을 양성하여 요의 중앙군으로 활용하였다. 요의 황제들이 궁위군과 오경향병을 중앙군으로 양성한 것은 건국 초기 요의 주력군이었던 부족군을 견재하기 위함이었다. 이들 부족군은 거란족으로 구성된 기병 부대로 시작하여, 다양한 부족으로 편성된 부대인 규군으로 범칭(汎稱)되었다. 규군은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정권 찬탈에 이용될 수 있었다. 요군은 핵심 중앙군으로 어장친위군을 운영하였다. 어장친군으로 태조가 만든 대장피실군과 응천황후가 만든 속산군이 있었다. 이들은 전장에 나가 활약을 했으며, 변방의 위급한 일에 대응하는 신속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 친위군에는 다양한 특수병들이 있었으며, 주변 부족의 특기를 살린 특수군도 있었다. 요는 기존의 부족적 성격의 부족군을 확대 개편하여 5경을 중심으로 방어군을 편성하였으며, 변방군을 운영하여 사방의 적을 방어하였다. 특히 동북면의 고려와 여진, 남방의 송, 서방의 서하에 대한 방어에 치중하였다. 요의 건국 초기에는 부족적 성격이 강한 기병을 활용한 돌격기병이 핵심 전력이었다. 돌격기병은 적의 중심지로 빠르게 침입하여 적의 수도를 장악하고, 왕이나 적군의 지휘자를 사로잡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술도 산과 계곡이 깊고, 성곽이 높은 요새화된 성곽을 공성하는 것은 힘들었다. 성곽을 공성하는 것은 기병보다는 보병이 유리하였다. 요는 고려와 송 등과 같은 국가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기병과 함께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향병을 운영하였다. 향병은 한족이 다수 포함 되어 있었으며, 병농일치의 부대였다. 향병으로 이루어진 보병은 주로 공성을 위해 투입되었다. 공성을 위한 부대는 공병단과 투석부대와 같은 다양한 병종(兵種)을 양성시켰다.
출처
저널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논문저자 : 한국교원대학교 전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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