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사람들은 전쟁을 즐기지. 이들은 에드워드 왕과 웨일즈 공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전리품으로 돈더미에 앉기 위해 대담하게 싸움터에 뛰어들 거야. 우리에게 진짜 왕이 있다면, 프랑스인들에게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 싸우려는 왕이 있다면, 그는 함께 해협을 건너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10만 명의 궁수와 6천 명의 중장병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지금 우리 잉글랜드에는 그런 왕이 없다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5)



1415년 3월 10일, 헨리 5세는 의회에서 프랑스 침공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 공격 목표가 가스코뉴인지 북부 프랑스인지는 의원들에게조차도 알리지 않았다.


4월, 모두의 관심이 잉글랜드에 집중된 사이, 왕세자 루이는 탄기 뒤 샤텔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도움으로 파리 시와 주요 정부 직위들을 장악했다. 아르마냑파 지도부가 믈룅 성에서 대책 회의를 하는 동안 왕세자 혼자 몰래 빠져나와 파리로 돌아왔고,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바스티유 요새의 통제권을 장악한 뒤 브르타뉴 군대를 입성시켜 파리 시의 요충지들을 점령한 것이다. 아르마냑파는 주요 관직에서 대부분 해임되고 왕세자의 측근들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아르마냑파를 숙청한 왕세자는 아내이자 부르고뉴 공작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냉대하고 파리 시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자신이 부르고뉴파의 통제에서도 벗어났음을 알렸다. 모욕을 당한 부르고뉴 공작은 비록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했지만 정치적 양보 없이는 왕세자의 통치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6월, 프랑스의 외교 사절단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헨리 5세는 가스코뉴의 주권을 요구했지만 사절단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고, 결국 헨리는 왕세자 루이의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8월 초, 헨리 스크롭과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의 역모가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모두 체포된 뒤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고작 며칠 뒤인 8월 11일 원정군이 솔렌트에서 출항한다.


8월 14일, 셰프앙코에 상륙한 헨리는 곧바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뒤, 센강 하구와 레자르드강이 교차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소도시 아르플뢰르를 포위했다. 왕세자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을 견제하느라 파리에서 멀리 떠날 수 없었고, 잉글랜드군은 도시를 봉쇄한 채 방어선을 조금씩 점령해갔다.


9월 22일, 아르플뢰르 주둔군은 결국 항복한다. 이로써 프랑스는 전략적으로든 위신에서든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잉글랜드군도 질병과 전투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2. 아쟁쿠르 전투 (1415)



헨리 5세는 육로를 통해 칼레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우선 잉글랜드군의 힘을 과시하고 프랑스 왕의 위신을 떨어뜨리려는 전략적 수단이었다. 또한, 방어가 약한 아르플뢰르에서 프랑스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며칠 거리의 육로 행군은 함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유리하기도 했다.


1415년 10월 8일,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헨리는 처음에는 증조부인 에드워드 3세가 한 것처럼 블랑슈타크라는 이름의 여울목을 통해 솜 강을 건널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샤를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길목을 미리 선점했다. 잉글랜드군은 청야전술로 황폐화된 강변의 마을들을 따라 4일을 더 행군했지만 도하 지점을 찾을 수 없었고, 남쪽으로 행군 방향을 틀어서 프랑스 수비군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다음 그 짧은 틈을 노려 도하 지점을 찾는다는 도박 같은 작전 끝에 결국 기적적으로 수비군을 따돌리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0월 24일, 강을 건너느라 낭비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한 4일간의 강행군 끝에 잉글랜드군이 마주한 것은 칼레로 향하는 좁은 계곡 너머의 도로와 평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메뚜기 무리 같은' 프랑스 군대였다. 프랑스군이 칼레로 향하는 길목의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잉글랜드군에는 전투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프랑스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계획 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편견과 달리 달브레와 부시코는 전투 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기동부대들을 하마 맨앳암즈 중심의 야전군으로 재편한 채 잉글랜드군을 맞이했다. 후위에 배치된 800~1200기의 정예 기병들이 잉글랜드 궁수들에게 기습적으로 돌격하는 것으로 전투를 시작하고, 약 4천명의 쇠뇌수들이 제압 사격을 퍼붓는 동안 주력인 중보병대가 잉글랜드군 대열에 안전하게 접근하며, 그 사이에 소수의 분견대가 진영을 우회해서 포위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을 한 번의 전투로 섬멸하는 것이 당초에 입안된 작전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잉글랜드군이 먼저 방어 진영을 해체하고 장궁의 사거리 안으로 진격해서 프랑스군 진영에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기병 말뚝을 뽑아내고 다시 설치하는 사이 잉글랜드 궁수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지만 정작 그 궁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배치된 프랑스 기병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브르타뉴의 기욤의 연대기는 롬바르디아와 가스코뉴 출신 기병들이 궁수들의 위협 사격에 겁을 먹고 돌격을 거부했다고 비난한다. 반면에 질 르 부비에의 연대기는 기병대의 지휘관인 클리네 드 브라방과 루이 드 부르봉이 잉글랜드군이 먼저 공격을 가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람에 기병들이 대부분 불가에 앉아있거나 말을 돌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기병대가 뒤늦게나마 예정대로 공격을 개시했지만, 진창 위에서 1천 기에 달하는 기병들이 대열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절반 가량인 400기만이 출격했다. 결국 기병들은 장궁병들이 정면에서 퍼붓는 사격과 대기병 말뚝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주한다.


이어서 프랑스 보병대가 진격했지만, 당초에 계획된 쇠뇌수들의 지원사격은 없었다. 와브랭에 따르면 전장이 좁아서 맨앳암즈와 궁수들을 동시에 투입할 공간이 없었고, 생드니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하마 맨앳암즈 대열의 선두에 선 귀족들이 궁수들의 지원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맨앳암즈들은 정면 사격에 취약한 급소인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 면갑을 내렸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얇은 면갑이 화살에 관통당할 가능성을 두려워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쏟아지는 화살비와 아군 방향으로 패주하는 기병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 등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잉글랜드군 대열에 이르러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의 얇은 선형진을 6피트에서 12피트 정도 밀어붙였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잉글랜드 군종사제들이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울부짖듯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맨앳암즈들의 얇은 대열은 기적적으로 공격을 버텨냈고, 양익의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2배 이상 두꺼운 프랑스군 대열을 역으로 밀어내거나 돌파해서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헨리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사타구니를 검으로 찔리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을 정도로 치열한 백병전이었다. 화살이 떨어진 궁수들도 검, 단검, 도끼, 말뚝 고정용 나무망치 등을 들고 백병전에 참가했고, 유일한 이점이었던 숫자에서 비롯된 응집력을 잃은 프랑스군은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쟁쿠르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11월 23일, 헨리 5세는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왔다.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에드워드 3세 시대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한 의회와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랭커스터 왕조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종식시켰다.


한편 아쟁쿠르 전투에서 지도층의 상당수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면서 아르마냑파는 약화되었다. 기회를 포착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샤를 6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이에 왕세자 루이는 잉글랜드군과 싸우려면 칼레로 진군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부르고뉴군은 멈추지 않았다. 부르고뉴군을 막기 위해 유능한 군인이지만 독선적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가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부르고뉴파에 동조한다는 의심만으로 많은 시민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베르나르의 강경한 대응에 부르고뉴군은 결국 퇴각했지만, 아르마냑파는 파리 시민들의 증오를 샀다.


12월 18일, 왕세자 루이가 이질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형에 비해 정치적 재능과 경험이 부족하고 장인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의 통제를 받는 동생 장이 새로운 왕세자가 되었다.




3. 2차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6)



1416년 1월, 아르마냑파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상징적 중요성을 지닌 아르플뢰르를 탈환하기 위해 육군과 함대를 동시에 소집했다. 이를 위한 군사 작전의 준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민세를 부과하고 소금세를 2배로 인상했다.


프랑스군에 포위된 아르플뢰르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전의 포위 공격으로 인해 도시의 방어 시설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며, 주둔군은 현지에서 자원을 징발하고 약탈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급품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3월에는 약탈 부대가 포위군의 매복 공격을 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발몽 전투).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헨리 5세는 구원군을 보내 포위를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파리에서는 부르고뉴파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었다. 약 500명의 용의자가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정부와 시민들 사이에 공포감이 퍼졌다. 이에 아르플뢰르를 포위공격 하고 있었던 아르마냑 백작이 일시적으로 휴전을 맺고 파리로 돌아가면서 잉글랜드군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맨앳암즈 1,000명 이상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온 아르마냑 백작은 체포된 용의자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뒤 공개 처형했으며, 부르고뉴파의 근거지로 지목된 파리의 도축업 조합의 특권을 폐지하고 정육점 거리를 강제 철거했다. 이로 인해 아르마냑파와 파리 시민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5월, 독일 왕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했다. 극도로 호전적이며 평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아르마냑 백작은 지기스문트의 제안을 무시했지만, 이자보 왕비는 지기스문트를 지지하며 자신의 사촌이자 왕세자 장의 장인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을 대표로 파견했다.


그렇게 시작된 협상에서 헨리 5세는 브레티니 조약의 완전한 복원과 아르플뢰르의 양도를 요구했다. 프랑스 대표들은 파리 추밀원과의 협의 없이 이러한 조건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협상은 일시 중단되었다. 헨리 5세의 제안을 전달받은 아르마냑파 지도부는 노골적인 거부 대신 협상을 질질 끌면서 지원군 모집을 방해하는 동시에 포위 공격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다시 주민세를 부과했다. 결국 잉글랜드 정부는 협상이 속임수라고 판단하고, 8월 14일 아르플뢰르 구원을 위한 함대를 출항시켰으며, 같은 날 저녁 아르플뢰르 인근 해안에 도착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접근하자 프랑스 함대는 슬로이스 해전과 같이 좁은 해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요격에 나섰다. 치열한 해전 끝에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후 프랑스 함대가 후퇴했다. 그렇게 해상 봉쇄가 풀리고, 아르마냑 백작이 이끄는 육군도 퇴각하면서 아르플뢰르 포위전은 잉글랜드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9월, 왕세자 장이 파리로 출발했다. 이자보 왕비와 바이에른 공작은 부르고뉴파와의 평화 노선을 추구했고, 잉글랜드의 위협에 맞서 단결하고 국왕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왕세자 장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부르고뉴 공작도 이에 호응하여 잉글랜드와의 중립 조약을 포기했다. 그러나 아르마냑 백작의 강한 반대로 협상은 지연되었다.




4. 2차 캉 포위전 (1417)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는 처음엔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왔지만, 도중에 헨리 5세에게 설득되어 갑자기 아르마냑파와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선언했다. 헨리 5세는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3세의 선례에 따라 독일 황제와 저지대, 즉 부르고뉴파와 연합해 북부 프랑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이 이자보 왕비와 바이에른 공작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1417년 2월, 브르타뉴 공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르마냑파가 다시 파리를 장악하면서 부르고뉴 공작과의 평화 협상이 중단되었다. 바이에른 공작은 협상을 재개하지 않으면 왕세자 장을 에노 백령으로 다시 데려가겠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아르마냑 백작은 바이에른 공작을 기습적으로 체포하려 했지만 바이에른 공작은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4월 5일, 왕세자 장이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잉글랜드의 침략에 맞서 프랑스를 통합하고자 했던 지난 1년의 노력은 전부 허사가 되었다.


이자보 왕비는 아르마냑파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군사를 소집했지만, 아르마냑 백작의 신속한 대응 때문에 실패하고 투르 성채에 감금되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아르마냑파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자신을 부패에 맞서는 개혁가로 묘사하면서 정부를 장악한 간신들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명분은 북부 프랑스 전역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랭스, 트루아, 오세르 등 많은 도시 공동체가 부르고뉴 공작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왕실 관료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7월, 부르고뉴 공작은 또다시 군사를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다. 주요 도시들에서 저항은커녕 오히려 환영을 받으며 부르고뉴군은 아무런 방해 없이 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헨리 5세 역시 이 기회를 노려 노르망디 침공을 개시한다.


8월 1일, 맨앳암즈 3000명과 궁수 9000명이 포함된 약 16000명 규모의 잉글랜드군이 센강 하구에 상륙했다. 당장 부르고뉴 공작을 막기에 급급한 파리 정부가 노르망디로 구원군을 보낼 가망은 없었으므로 상륙 지점 인근 도시와 요새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로 항복했다.


8월 13일, 잉글랜드군은 내륙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15일 노르망디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인 캉을 포위했다. 잉글랜드군은 대포로 성벽을 뚫은 뒤 9월 4일 도시 내부에 진입해 약탈과 학살을 벌였다. 9월 19일, 결국 아성에서 농성하던 주둔군마저 항복하면서 도시가 점령당했다.




5. 파리 포위전 (1417)



1417년 8월 26일, 부르고뉴군이 보베에 집결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소금세를 제외한 모든 전쟁세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뒤, 센강과 우아즈강의 요충지들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파리를 포위했다. 그리고 투르에 감금된 이자보 왕비를 구출해 아르마냑파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아르마냑파는 센강 상류의 요충지 코르베유를 지켜냈지만, 곧 파리의 주요 곡물 공급원 중 하나인 보스 지방의 요충지인 샤르트르와 에탕프가 함락당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프랑스 남부에도 지원을 호소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세금 경감 약속 때문에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이 캉을 점령한 뒤, 바이외와 리지외는 저항 없이 항복했다. 어린 알랑송 공작의 어머니 마리 드 브르타뉴는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강경히 맞섰고, 4000여 명의 병력을 소집해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요새와 도시들에 배치했다. 그러나 고작 2주 안에 동프롱과 팔레즈를 제외하고 전부 함락당했다.


이후 헨리 5세는 노르망디에서 정복한 영토를 안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칙령을 군대에 다시 선포했고, 과도한 세금의 폐지를 약속하며 노르망디인들을 회유했다. 고위 지방관은 잉글랜드인으로 대체되었지만 하급 행정부는 프랑스의 제도들과 인사를 그대로 유지했다. 생드니 수도원 연대기의 저자는 노르망디가 빠르게 정복된 이유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오랜 내전으로 입은 피해와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지만, 이렇듯 지혜롭고 공정한 통치자로 이름난 헨리 5세의 평판도 한몫했다고 언급한다.




6. 파리 학살 (1418)



1418년 1월, 아르마냑 백작이 에탕프와 몽테리를 탈환하면서 파리 시의 봉쇄가 풀렸다. 하지만 남은 전력을 총동원한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상리스 탈환에 실패하면서 아르마냑군의 사기는 다시 추락했다.


한편 노르망디에서는 팔레즈가 결국 잉글랜드에 점령당했고, 반년 가까이 지속된 정부의 무대응에 완전히 사기가 꺾인 요새와 도시들이 줄줄이 항복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은 계속 아무런 방해 없이 에브뢰를 점령한 뒤 루앙 공략을 준비한다.


5월,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중재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 공작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아르마냑파의 지도층 대부분은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부르고뉴 공작을 사면하고 평화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지만, 아르마냑 백작과 일부 지도층의 강력한 반대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5월 29일 새벽, 아르마냑 정부에 불만을 품은 파리 시민들의 협조로 부르고뉴군 분견대 수백 명이 파리 시내에 진입했다. 이들은 거리에서 '부르고뉴와 평화'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는 한편, 오텔 생폴을 습격해 샤를 6세를 확보했다. 하지만 왕세자 샤를은 탄기 뒤 샤텔과 함께 탈출해 바스티유 요새로 도망쳤다.


갈수록 더 많은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결국 부르고뉴파가 파리 시를 장악했다. 파리 주교를 포함한 아르마냑파 지도층 일부는 부르고뉴파로 전향해서 목숨을 건졌지만 아르마냑 백작을 비롯한 나머지는 폭도들에게 붙잡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아르마냑파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성을 잃은 폭도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포함해 아르마냑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모두 붙잡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이날 무고한 희생자를 포함해서 약 2000명의 파리 거주자가 부르고뉴 지지자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7. 루앙 포위전 (1418)



1418년 7월 초, 잉글랜드군이 군사적 요충지이자 성벽과 석조 다리를 가진 도시 퐁드라르슈를 포위했다.


7월 14일, 부르고뉴 공작이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퐁드라르슈의 구원 요청을 전달받은 부르고뉴 공작은 곧 가겠다고 답변했지만, 아르마냑파 잔당들이 왕세자 샤를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버티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10월 경, 잉글랜드군의 루앙 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파리 대학의 교수들은 지금이라도 구원군을 보낼 것을 촉구하며, 루앙 하나만 지켜도 잉글랜드가 노르망디에서 어부지리로 쌓은 위태로운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루앙을 잃으면 프랑스는 노르망디를 잃으리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쫓겨난 아르마냑파든 아르마냑파 잔당들에게 반포위된 부르고뉴파든 다른 곳으로 병력을 돌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두 파벌 모두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있었기 때문에, 9월 16일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잉글랜드에 맞서 연합한다는 내용의 평화 조약이 공식적으로 비준됐지만 며칠도 못 가서 휴지조각이 되었다.


12월 26일, 왕세자 샤를은 스스로를 국왕 대리인이 아닌 섭정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아르마냑과 왕세자 파벌은 공식적으로 부르고뉴 정부와 결별했다.


이듬해인 1419년 1월 19일, 루앙 시는 결국 잉글랜드에 항복한다.




8. 부르고뉴 암살 (1419)



1419년 3월, 스코틀랜드가 왕세자 샤를에게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당시 스코틀랜드군은 1402년 험블턴 힐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로 신식 갑옷을 수입하고 장궁병을 도입하고 군율을 확립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상당한 강군으로 거듭나 있었다.


한편 루앙이 함락된 뒤에도 부르고뉴파와 왕세자파는 자신들이 처한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침략자인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 것은 평판이 추락하고 지지세력이 분열될 위험이 있으므로 그다지 고려할 만한 선택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상대 파벌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단지 협상을 하는 것은 상대 파벌에 대한 위협 수단으로서 너무나 유용했다. 5월, 왕세자파와 부르고뉴파는 3개월의 휴전을 맺고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가 왕세자파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간을 보면서 협상이 예정보다 지연되었다.


7월 11일, 마침내 왕세자파의 양보로 사면, 관직 배정,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푸이이에서 왕세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작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7월 31일, 잉글랜드군이 우아즈강의 요충지 퐁투아즈를 기습해 점령했다. 파리의 중요한 방어 거점인 퐁투아즈의 함락과 겁에 질린 난민들의 도착은 수도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부르고뉴 공작과 이자보 왕비는 파리 방어를 포기하고 샤를 6세를 데리고 라니쉬르마른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클래런스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파리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내전으로 황폐화돼 있었던 파리 시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왕국의 수도를 보호하지 못한 부르고뉴 공작의 명성 또한 추락했다.


왕세자파는 이자보 왕비와 동맹을 맺고 샤를 6세까지 확보한 부르고뉴 공작에 비해 명분 면에서 열세에 있었으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와 내통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푸이이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하지만 부르고뉴파를 제압하지 못하는 이상 이전처럼 교착 상태가 계속될 뿐이었고, 잉글랜드의 위협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감당 못할 일을 벌였음을 알게 된 왕세자파의 지도부는 결국 부르고뉴 공작을 물리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9월 10일, 왕세자파는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논의한다는 구실로 부르고뉴 공작을 회의에 초대했다. 그리고 탄기 뒤 샤텔과 다른 암살자들이 몽트뢰유 다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을 습격해 살해했다.


하지만 왕세자파의 기대와 달리 부르고뉴파는 분열되지 않았다. 왕세자 샤를의 어머니인 이자보 왕비는 내통자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부르고뉴파와 협력을 강화했고, 파벌 간의 타협과 정부의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도시 공동체들은 헨리 5세와 진지하게 협상을 시작했다. 이제는 프랑스 정복도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 헨리 5세는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동군연합을 제안했고, 도시 대표단은 헨리 5세의 솔직한 말투와 그의 군대의 규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0월, 잉글랜드군이 묄랑 다리를 점령하면서 파리 시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부르고뉴파 주둔군은 신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게 파리 시민들이 잉글랜드군에 항복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헨리 5세와 신속하게 합의할 것을 촉구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처음엔 신중한 태도로 협상을 시작했지만 헨리 5세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은 헨리 5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9. 트루아 조약 (1420)



몽트뢰유 다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이 암살된 후, 브르타뉴 공작은 처음에는 왕세자 샤를의 편을 들었지만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의 동맹이 현실화되자 부르고뉴 공작으로 편을 바꾸려 했다.


그런 이유로 1420년 2월, 왕세자파는 브르타뉴의 이탈을 막기 위해 브르타뉴 공작을 납치해 샹토소 요새에 감금했다. 하지만 브르타뉴 공작부인 잔 드 프랑스는 신속히 군사를 소집해 공작령 내의 왕세자파 지지 세력을 제압한 뒤 브르타뉴 공작이 감금된 샹토소 요새를 포위한다.


5월 21일, 트루아 대성당에서 헨리 5세를 샤를 6세의 후계자이자 섭정으로 삼는 내용의 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헨리 5세와 발루아의 카트린의 약혼이 이루어졌고 부르고뉴 공작을 비롯한 프랑스인들은 미래의 프랑스 왕이 될 헨리 5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얼마 뒤 잉글랜드군이 파리 시에 입성하고 고위 관직의 일부가 잉글랜드인으로 대체된다.


헨리 5세는 곧바로 센강과 마른강의 요충지들에 위치한 왕세자파 요새들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6월 11일, 잉글랜드군이 상스를 점령했고, 7월에는 몽트뢰유를 점령한 뒤 믈룅을 포위했다.


7월 5일, 결국 샹토소 요새 주둔군이 공작부인에게 항복하고 브르타뉴 공작을 석방했다. 브르타뉴의 왕세자파 귀족들은 모두 영지를 몰수당한 뒤 추방되었고, 브르타뉴 공작은 그렇게 강화된 권력으로 잉글랜드와 동맹 협상을 시작한다.


11월 17일, 믈룅이 4개월 간의 포위공격 끝에 점령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분노한 헨리 5세는 항복한 주둔군 중 많은 수를 처형하거나 투옥했다.


12월, 파리 삼부회에서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이 자신의 의지이자 국가의 의지라고 선언했다. 그밖에 왕세자 샤를을 포함한 8명이 부르고뉴 공작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고, 전비 마련을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10. 보제 전투 (1421)



1421년 2월 14일, 헨리 5세는 다시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런던에 돌아왔다. 이후 헨리는 2개월 동안 잉글랜드 전역의 주요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과 그것을 위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력 있게 연설하는 동시에 잉글랜드 민족주의와 대중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한편, 헨리 5세의 총독으로서 프랑스에 남아 있던 클래런스 공작은 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앙주 지방으로 원정을 나갔다. 이에 스코틀랜드 지원군과 소수의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왕세자파 군대 6000여 명이 요격에 나섰다. 3월 14일, 클래런스 공작은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군하던 중 보제에서 왕세자파 군대와 마주쳤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 상황에서 클래런스 공작은 헌팅던 백작 등 노련한 지휘관들의 후퇴 권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개시했고, 클래런스 공작 자신을 비롯해 병력의 2/3이 전사하고 생존자들이 대부분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한다.


보제 전투는 4개월에 걸친 믈룅 포위전에 이어, 잉글랜드군은 무적이 아니며 프랑스인들이 파벌로 분열되고 사기가 꺾였을지언정 프랑스의 국가적 역량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많은 프랑스 귀족과 도시들이 왕세자파로 전향했다. 브르타뉴 공작은 다시 왕세자파로 편을 바꿨고, 5월 왕세자파 삼부회는 상당한 액수인 80만 리브르의 전쟁세를 승인했다. 이에 힘입어 왕세자파 군대는 보스 지방을 공격해 상당한 영토를 탈환한다.




11. 드뢰 포위전 (1421)




1421년 6월 11일, 보제 전투의 소식을 들은 헨리 5세는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칼레에 상륙했다. 처음의 계획은 피카르디에 남아있는 왕세자파 잔당들을 진압하고 지역을 안정화하는 것이었으나, 곧 왕세자 샤를이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샤르트르로 진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망트에 도착하자, 왕세자파는 샤르트르의 포위를 풀고 방돔으로 후퇴해 브르타뉴군과 합류한다.


8월 20일, 잉글랜드군은 약 한 달간의 포위공격 끝에 드뢰를 점령했다. 헨리 5세는 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방돔으로 진군했지만 왕세자파의 군대가 12000명으로 두 배 이상 많았고, 노련한 지휘관인 버컨 백작이 잉글랜드군을 요격하러 나오지 않고 진영을 지키자 별수 없이 동쪽으로 후퇴한다.


잉글랜드군이 동쪽으로 향하자 브르타뉴군은 브르타뉴 방면으로 철수했고, 스코틀랜드와 프랑스군 일부는 오를레앙을 방어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머지 대부분은 남쪽의 가스코뉴 전선으로 진군했다. 프랑스군의 재배치를 확인한 헨리 5세는 강행군으로 루아르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 중인 왕세자군 주력을 기습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루아르강을 따라 동쪽으로 후퇴한다.


한편 8월 29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왕세자파의 지원군이 피카르디 서부에서 행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요격에 나섰다. 지원군은 르 크로투아 인근에서 다른 부대와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강이 불어나는 바람에 솜강의 여울목을 건너지 못하고 부르고뉴군에 따라잡혔다. 1000여 명의 부르고뉴 기병들과 비슷한 숫자의 왕세자군의 전투가 벌어졌고, 왕세자군은 병력의 약 절반이 전사하고 주요 지휘관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생존자가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승리한 부르고뉴군 역시 군사작전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기에 별다른 이득이나 명성도 얻지 못하고 퇴각한다.




12. 모 포위전 (1422)



1421년 9월 말, 동쪽으로 행군을 계속하던 잉글랜드군은 욘 강의 요충지 빌뇌브를 포위공격해서 5일 만에 점령했다. 그리고 마른 강의 요충지이자 강력한 방어시설과 수비대를 갖춘 도시 모를 포위했다.


하지만 주둔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했고, 포위군은 악천후, 질병, 탈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급여 기록에 따르면 크리스마스까지 잉글랜드군은 전체 병력의 1/6을 잃었다. 특히 헨리 5세의 사촌인 젊은 기사 존 콘월이 포격으로 사망하고, 외아들의 잔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 존 콘월 경이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사건으로 포위군의 사기가 추락했다. 존 콘월은 1412년 클래런스 공작의 원정부터 시작해 프랑스에서 진행된 모든 군사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명성 높은 지휘관이었다.


12월 6일, 윈저 성에서 미래의 헨리 6세가 탄생했다. 크리스마스 무렵 소식을 접한 헨리 5세는 크게 기뻐하지 않고 특유의 금욕적인 반응을 보였다.


1422년 5월, 잉글랜드군의 주요 지휘관 여럿이 전사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모 시와 요새가 점령되었다. 마른 강의 수운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파리 시의 식량 공급이 안정화되었고, 지역에서 가장 정예한 주둔군의 전멸과 가장 강력한 요새의 함락은 다른 왕세자파 요새 주둔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모가 함락된 이후 왕세자파는 북부 프랑스에서 더 이상 조직적인 저항을 벌이지 못했다. 보제 전투 이후 왕세자파로 돌아섰던 브르타뉴 공작도 잉글랜드의 힘을 인식하고 다시 잉글랜드로 편을 바꿨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보제 전투의 패배, 솜 강에서의 무리한 강행군, 그리고 모 포위전으로 주력군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는 명목상으로는 왕세자 샤를 대신 헨리 5세를 지지했지만 사실상 중립이었고 브르타뉴는 대놓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확고한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르고뉴는 북부 프랑스 도시들의 지지를 잃으면서 힘이 빠졌다. 결국 헨리 5세는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13. 헨리 5세의 죽음 (1422)


1422년 6월 25일, 탄기 뒤 샤텔이 지휘하는 왕세자군이 루아르강의 요충지인 라 샤리테를 점령하고 코스네를 포위했다.


7월 7일, 헨리 5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를 위해 벵센으로 옮겨졌다. 그는 가마에 탄 채로라도 코스네를 구하기 위한 군대를 지휘하려 했지만, 코르베유까지 행군한 다음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과 삼촌인 엑서터 공작에게 지휘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이 접근하자 왕세자군은 곧바로 포위를 풀고 회군한다.


8월 31일, 바지선과 가마에 실린 채 뱅센으로 돌아온 헨리 5세는 결국 신하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그는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를 잉글랜드의 호국경이자 어린 헨리 6세의 후견인으로 임명했고, 베드퍼드 공작에게는 프랑스에서의 군사, 외교, 행정을 맡겼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할 것과, 아쟁쿠르 전투와 모 포위전에서 붙잡은 프랑스 포로들을 아들인 헨리 6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석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왕세자파가 우연히 내부에서 붕괴되지 않는 한 전쟁이 협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지만, 그 협상 조건에서 노르망디만은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했고 30일, 왕세자 샤를이 뮈엉 성에서 열린 검소한 즉위식에서 샤를 7세로 선포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카스티야, 그리고 교황 마르티노 5세 역시 샤를 7세의 왕권을 인정했지만, 잉글랜드인들은 여전히 그를 도팽이라 불렀고 심지어 잔다르크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인들도 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그렇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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