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작년에 올린 글입니다.
출처는 'UN 지원사' (국방부) 입니다.
인도(India)
1.참전 경위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신생독립국으로 출발한 이후 줄곧 중립 또는 비동맹노선을 견지하였다.
유엔에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제국에 대한 식민정책에 반대 하면서 강대국간의 화해 모색, 국제간 분규의 평화적 해결에 노력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 전에는 한국의 조속한 통일을 위하여 구성된 유엔 한국위원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인 인도는 1950년 6월 28일 안보리가 한국군사원조를 결의하였을때는 본국의 훈령이 도착하지 않아 기권하였을뿐만 아니라 이후 이 결의안을 수락하는 것도, 그들의 중립외교정책에 변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고 밝혀 군사지원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안전보장이사회 가 7월 31 일 한국 민간인에 대한 구호를 결의하자 이에는 찬성표를 던져 한국지원안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1950년 11월 초에 의료지원부대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경력이 있는 제60야전병원은 참전을 서둘러 준비하였다.
당시 제60야전병원은 외과의사 4 명, 마취의사 2명, 일반의사 8명, 치과의사 1명, 보급관 1명 둥 총 331명의 장병으로 2개의 외과반과 1개의 치과반으로 편성되었고, 또한 이들은 완전한 수송부대, 식량, 의류 및 6개월분의 예비식량 외부과 의무보급품과 장비도 확보하고 있었다.
란가라지(Rangaraj) 중령이 지휘한 제60야전병원은 유엔군이 청천강교두보에서 최종공세 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인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상륙하여 시 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미 제8군에 배속되어 대구로 이동하였다.
제60야전병원은 10일 동안 부대를 재정비한 후 의료지원부대도 없이 한만국경선을 향해 진출중인 영 제27여단을 직접 지원할 목적으로 12월 4일 6개월분의 의약품과 장비를 휴대하고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제60야전병원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 하게 되었다.
2.주요 활동
(1) 1950년도 활동
제60야전병원이 평양으로 진출할 무렵 중공군의 11월공세에 밀린 유엔군이 평양철수를 결정함으로써 제60야전병원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당시 평양은 공산군의 포위망이 압축되는 가운데 유엔군의 철수, 여기에 피난민들까지 가세함으로써 극도로 혼란상황에 빠져 있어 제60야전병원이 정상적으로 철수를 위한 수송수단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하여 야전병원은 귀중한 장비와 의약품의 포기는 물론 의무요원들의 안전한 철수마저도 장담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란가라지 중령이 철수대책 수립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우연하게도 요원 중 수명이 평양역 구내를 정찰중에 방치된 기관차와 수대의 유개 화차를 발견하였다.
천만 다행으로 위생병 중에서 과거 기관차 조수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요원이 있어 이 기관차를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제60야전병원은 12월 5일 이 기관차에 병력은 물 론 장비와 의약품을 싣고 미 공병대가 대동강 철교를 폭파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평양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서울로 철수한 제60야전병원은 최초계획에 의거 영 제27여단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미 제8군사령부가 제60야전병원의 지 원능력이 영 제27여단을 지원하는데 초과된다고 판단하고 2개 제대로 분할 운영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란가라지 중령이 지휘 하는 주력은 영 제27여단을 계속 지원하고 반넬사(Banerjee) 소령 이 지휘하는 제대는 예비의약품을 가지고 대구로 이동하여 영연방 부대들을 위한 후방병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때 대구로 이동한 후방병원은 의무요원들의 교육훈련은 물론 전방제대를 지원하기 위한 예비기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2개월마다 전후방 부대를 교대시킨다는 방침도 결정하였다.
이후 제60야전병원 본대는 12월 14일 의정부에서 영 제27여단 과 합류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본격적으로 전선에서 의료지원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한동안 한산하던 야전병원은 중공군 이 신정공세를 개시하자 의정부 북쪽 10km에 추진배치되었고, 이 때 전상자의 수는 병원의 수용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다.
야전병원은 들것과 지프로 후송되어 오는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의사들은 숙련된 기술과 성실한 봉사정신으로 이들 의 치료는 물론 중환자들은 웅급조치 후 후방병원으로 후송하는데 전력하였다.
이후 제60야전병원은 다시 서울 외곽으로 이동하여 부상자의 치료와 후송 임무를 수한 후 유엔군의 철수계 획에 따라 1951년 1월 4일 한강을 도하하여 수원을 경유 6일 장호원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대구로 내려온 파견대도 12월 말경 영연방군을 지원하기 위한 후방병원을 개소하였다.
(2) 1951년도 활동
1월 하순 유엔군이 재반격을 개시하면서부터 제60야전병원은 새로운 난관에 부닥쳤다.
이때 의무요원들은 밀려드는 환자들도 문제이지만 한국의 한랭한 기후와 몰아치는 한파를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 천막에는 난로를 피웠으나 야간에 취사장의 화 로까지 얼어붙는 강추위에는 난로도 무용지물과 같았다. 이로 인 하여 액체로 된 의약품이 동결되거나 파손될 우려가 있어 각별히 유의 하였다.
특히 피와 얼음 조각으로 뒤범벅이 되어 후송되어 온 전상자의 얼어붙은 의복을 갈아주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제60야전병원의 마취전문의들은 난로가에서 발화될 위험도 무릅쓰고 기체로 된 마취약을 사용,수술을 함으로써 영국군은 물론 영연방군과 미군들까지도 인도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희망하였다.
중공군의 2월공세를 개시하자 영 27여단은 지평리에 고립된 미 제23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2월 14일 남한강을 도하 지평리 산악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제60야전병원도 전방부대를 근접지원하기 위하여 19일 남한강을 도하 새말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전방부대들이 험준한 고지로 진출하면서부터 환자를 구호소까지 후송하는 데 3~4시나 소요되어 환자후송은 물론 응급조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대대가 주암리 북쪽에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위생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방 고지까지 나아가 중상자들을 들것으로 실어 오기도 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중상자들은 웅급조치 후 군단에 서 지원된 환자후송용 헬리콥터로 후방지역 병원으로 신속히 후송함으로써 많은 중상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 제8군이 3월 하순 문산지역에 공수투하를 계획하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전원이 본국에서 공수낙하 훈련을 받은 제60야전병원은 군의관 5명과 7명의 사병으로 편성된 외과반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문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헬리콥터가 후 송활동을 할 수 없는 악천후와 야간에 긴급한 수술을 하고 환자를 간호하며 미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 제27여단 주력이 중공군을 추격하여 38도선 부근으로 진출하자 제60야전병원도 중공군이 4월공세를 개시하기 직전에 가평 북쪽 중촌리로 이동하였다.
이때 영 제27여단이 영 제28여단으로 개칭됨에 따라 제60야전병원도 영 제28여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었다.
그리고 1951년 7월 28일 영연방 제1사단이 창설 된 이후에도 제60야전병원은 계속 영 제28여단을 직접 지원하였다.
그러나 9월 초 영연방 제1사단의 주력부대들이 임진강 북쪽으로 진출하자 제60야전병원도 9월 8일 임진강 북쪽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적의 소화기 사격 및 포격으로 인한 입원환자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10월 3일 아군이 특공작전(Operation Commando)을 개시함으로써, 제60병원도 눈코 뜰 사이 없이 환자 후송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작전에서 의무요원들은 총검과 수류탄 대신에 의약품과 수술기구를 휴대하고 공격부대를 후속하면서 전상자들의 응급조치는 물론 험한 지형과 적의 저지사격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후송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결과 영연방 제1사단은 이 작전에서 전사 58명, 부상 262명이 발생하였고, 이들 중 150여 명은 제60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후송되었다.
불행하게도 제60야전병원은 이 작전에서 부상자를 후송중에 적의 사격과 포격을 받아 의료요원 2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대구분견대는 1951 년 2월 유엔민간구호사령부의 민간인 전상자에 대한 구호요청을 받게 되자 장비와 예비의약품을 휴대한 1개 외과반을 대구서부시립병원에 파견하였다.
당시 서부시립병원은 140병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환자는 화상환자, 총상환자 250명이 수용되어 치료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파견된 외과반은 한국인 의사와 간호원들의 지원을 받아 다수의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대구분견대는 5월 한국군의 요청으로 대구에 있는 국군 제1육군병원에서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수술업무를 인수하였고,
일부는 유엔민간구호사령부가 운용하는 동부시립병원과 서부시립병원에 파견하였다.
이때 인도 의료진은 한국군을 대상으로 3회에 걸쳐 마취교육을 실시하여 마취기술자 30명을 양성하였다.
또한 7월에는 대구지역의 민간인 외래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진료소도 개소하였다.
처음에는 일일평균 10~15명 정도의 환자들이 찾아왔으나 날로 증가하여 연말에는 일일평균 250~300명으로 증가되었다.
특히 8월에는 부대 인근지역에 있는 고아원에서 150명 이상의 트라코마 환자가 발생하자 이들을 격리 수용하고 일본에서 긴급히 의약품을 획득하여 치료에 매진하여 1952년 9월에 병을 완전히 퇴치시키기도 하였다.
대구파견대는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한국 의사들에게 수술기술 전수에도 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원운영 능력도 향상시켜 1951년 말부터는 한국인들이 서부시립병원을 운영할수 있도록 하였다.
(3) 1952년 이후 활동
1951년 동절기부터 시작된 전선의 소강상태는 1952년 전반기 동안에도 계속되었고, 또한 쌍방이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함으로써 환자의 수도 크게 감소되었다.
그러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적의 야포 및 박격포 사격이 증가 하였고, 이 포격의 일부는 후방지역까지 연신되었다.
특히 9월 13~14일 중공군의 포격이 제60야전병원본부 지역에 떨어져 1명이 전 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올 뿐만 아니라 그 후방 물품보관소에서 작업 중이던 2명도 파편상을 입었다.
이때 이들은 후송을 거부하고 응급조치만 받은 후 오히려 아군 부상병들의 치료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연방사단의 정면에서는 간헐적인 포격전만 있을 뿐 대체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1953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1월 말 영연방사단이 작전지역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군단예비가 되어 동두천으로 이동함으로써 영 제28여단에 배속중인 제60야전병원도 모처럼 부대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25개월 동안 직접 수술조를 편성하여 전장을 누비면서 환자를 수술하며 진두지휘 하던 Rangaraj 중령이 귀국 하고 M.B.K Mair 중령이 후임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영연방 제1사단이 전선으로 복귀한 4월 중순 쌍방은 병상포로교환에 합의하는 등 휴전회담이 급진전을 보게 되었으나 목전으로 다가온 휴전회담 이전에 유리한 지형의 확보를 꾀함으로써 다시 전투는 가열되었다.
따라서 수색대의 조우전, 중요고지 쟁탈전 둥 으로 전사상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되었고, 제60야전병원은 휴전협 정이 조인되던 7월 27일까지 4개월 동안 230여 명의 전사상자를 치료중 치료하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한편 대구분견대 요원들은 1952년 6월부터 대구지역을 순회하면서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한동안 일일평균 300여 명 이상을 진료하기도 하였다. 당시 인도 의료진이 치료한 질병 가운데 가장 효험을 본 것은 어린이들이 주로 감염된 트라코마 이었다.
그리고 대구분견대는 1953년 2월까지 총 1,400회에 달하는 중상자 또는 그 밖의 환자들을 수술해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도 제60야전병원은 한국전쟁에서 높은 의술과 박애 정신을 발휘하여 한국 정부, 유엔군사령관, 인도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훈장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휴전 후 인도 정부가 송환거부포로의 경비를 위한 인도관리군을 파견하자 제60야전 병원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분견대와 합류한 후 그 동안 생사 고락을 같이한 영연방사단을 떠나 이들과 합류하였다.
출처는 'UN 지원사' (국방부) 입니다.
인도(India)
1.참전 경위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신생독립국으로 출발한 이후 줄곧 중립 또는 비동맹노선을 견지하였다.
유엔에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제국에 대한 식민정책에 반대 하면서 강대국간의 화해 모색, 국제간 분규의 평화적 해결에 노력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 전에는 한국의 조속한 통일을 위하여 구성된 유엔 한국위원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인 인도는 1950년 6월 28일 안보리가 한국군사원조를 결의하였을때는 본국의 훈령이 도착하지 않아 기권하였을뿐만 아니라 이후 이 결의안을 수락하는 것도, 그들의 중립외교정책에 변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고 밝혀 군사지원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안전보장이사회 가 7월 31 일 한국 민간인에 대한 구호를 결의하자 이에는 찬성표를 던져 한국지원안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1950년 11월 초에 의료지원부대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경력이 있는 제60야전병원은 참전을 서둘러 준비하였다.
당시 제60야전병원은 외과의사 4 명, 마취의사 2명, 일반의사 8명, 치과의사 1명, 보급관 1명 둥 총 331명의 장병으로 2개의 외과반과 1개의 치과반으로 편성되었고, 또한 이들은 완전한 수송부대, 식량, 의류 및 6개월분의 예비식량 외부과 의무보급품과 장비도 확보하고 있었다.
란가라지(Rangaraj) 중령이 지휘한 제60야전병원은 유엔군이 청천강교두보에서 최종공세 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인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상륙하여 시 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미 제8군에 배속되어 대구로 이동하였다.
제60야전병원은 10일 동안 부대를 재정비한 후 의료지원부대도 없이 한만국경선을 향해 진출중인 영 제27여단을 직접 지원할 목적으로 12월 4일 6개월분의 의약품과 장비를 휴대하고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제60야전병원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 하게 되었다.
2.주요 활동
(1) 1950년도 활동
제60야전병원이 평양으로 진출할 무렵 중공군의 11월공세에 밀린 유엔군이 평양철수를 결정함으로써 제60야전병원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당시 평양은 공산군의 포위망이 압축되는 가운데 유엔군의 철수, 여기에 피난민들까지 가세함으로써 극도로 혼란상황에 빠져 있어 제60야전병원이 정상적으로 철수를 위한 수송수단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하여 야전병원은 귀중한 장비와 의약품의 포기는 물론 의무요원들의 안전한 철수마저도 장담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란가라지 중령이 철수대책 수립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우연하게도 요원 중 수명이 평양역 구내를 정찰중에 방치된 기관차와 수대의 유개 화차를 발견하였다.
천만 다행으로 위생병 중에서 과거 기관차 조수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요원이 있어 이 기관차를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제60야전병원은 12월 5일 이 기관차에 병력은 물 론 장비와 의약품을 싣고 미 공병대가 대동강 철교를 폭파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평양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서울로 철수한 제60야전병원은 최초계획에 의거 영 제27여단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미 제8군사령부가 제60야전병원의 지 원능력이 영 제27여단을 지원하는데 초과된다고 판단하고 2개 제대로 분할 운영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란가라지 중령이 지휘 하는 주력은 영 제27여단을 계속 지원하고 반넬사(Banerjee) 소령 이 지휘하는 제대는 예비의약품을 가지고 대구로 이동하여 영연방 부대들을 위한 후방병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때 대구로 이동한 후방병원은 의무요원들의 교육훈련은 물론 전방제대를 지원하기 위한 예비기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2개월마다 전후방 부대를 교대시킨다는 방침도 결정하였다.
이후 제60야전병원 본대는 12월 14일 의정부에서 영 제27여단 과 합류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본격적으로 전선에서 의료지원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한동안 한산하던 야전병원은 중공군 이 신정공세를 개시하자 의정부 북쪽 10km에 추진배치되었고, 이 때 전상자의 수는 병원의 수용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다.
야전병원은 들것과 지프로 후송되어 오는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의사들은 숙련된 기술과 성실한 봉사정신으로 이들 의 치료는 물론 중환자들은 웅급조치 후 후방병원으로 후송하는데 전력하였다.
이후 제60야전병원은 다시 서울 외곽으로 이동하여 부상자의 치료와 후송 임무를 수한 후 유엔군의 철수계 획에 따라 1951년 1월 4일 한강을 도하하여 수원을 경유 6일 장호원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대구로 내려온 파견대도 12월 말경 영연방군을 지원하기 위한 후방병원을 개소하였다.
(2) 1951년도 활동
1월 하순 유엔군이 재반격을 개시하면서부터 제60야전병원은 새로운 난관에 부닥쳤다.
이때 의무요원들은 밀려드는 환자들도 문제이지만 한국의 한랭한 기후와 몰아치는 한파를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 천막에는 난로를 피웠으나 야간에 취사장의 화 로까지 얼어붙는 강추위에는 난로도 무용지물과 같았다. 이로 인 하여 액체로 된 의약품이 동결되거나 파손될 우려가 있어 각별히 유의 하였다.
특히 피와 얼음 조각으로 뒤범벅이 되어 후송되어 온 전상자의 얼어붙은 의복을 갈아주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제60야전병원의 마취전문의들은 난로가에서 발화될 위험도 무릅쓰고 기체로 된 마취약을 사용,수술을 함으로써 영국군은 물론 영연방군과 미군들까지도 인도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희망하였다.
중공군의 2월공세를 개시하자 영 27여단은 지평리에 고립된 미 제23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2월 14일 남한강을 도하 지평리 산악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제60야전병원도 전방부대를 근접지원하기 위하여 19일 남한강을 도하 새말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전방부대들이 험준한 고지로 진출하면서부터 환자를 구호소까지 후송하는 데 3~4시나 소요되어 환자후송은 물론 응급조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대대가 주암리 북쪽에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위생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방 고지까지 나아가 중상자들을 들것으로 실어 오기도 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중상자들은 웅급조치 후 군단에 서 지원된 환자후송용 헬리콥터로 후방지역 병원으로 신속히 후송함으로써 많은 중상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 제8군이 3월 하순 문산지역에 공수투하를 계획하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전원이 본국에서 공수낙하 훈련을 받은 제60야전병원은 군의관 5명과 7명의 사병으로 편성된 외과반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문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헬리콥터가 후 송활동을 할 수 없는 악천후와 야간에 긴급한 수술을 하고 환자를 간호하며 미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 제27여단 주력이 중공군을 추격하여 38도선 부근으로 진출하자 제60야전병원도 중공군이 4월공세를 개시하기 직전에 가평 북쪽 중촌리로 이동하였다.
이때 영 제27여단이 영 제28여단으로 개칭됨에 따라 제60야전병원도 영 제28여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었다.
그리고 1951년 7월 28일 영연방 제1사단이 창설 된 이후에도 제60야전병원은 계속 영 제28여단을 직접 지원하였다.
그러나 9월 초 영연방 제1사단의 주력부대들이 임진강 북쪽으로 진출하자 제60야전병원도 9월 8일 임진강 북쪽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적의 소화기 사격 및 포격으로 인한 입원환자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10월 3일 아군이 특공작전(Operation Commando)을 개시함으로써, 제60병원도 눈코 뜰 사이 없이 환자 후송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작전에서 의무요원들은 총검과 수류탄 대신에 의약품과 수술기구를 휴대하고 공격부대를 후속하면서 전상자들의 응급조치는 물론 험한 지형과 적의 저지사격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후송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결과 영연방 제1사단은 이 작전에서 전사 58명, 부상 262명이 발생하였고, 이들 중 150여 명은 제60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후송되었다.
불행하게도 제60야전병원은 이 작전에서 부상자를 후송중에 적의 사격과 포격을 받아 의료요원 2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대구분견대는 1951 년 2월 유엔민간구호사령부의 민간인 전상자에 대한 구호요청을 받게 되자 장비와 예비의약품을 휴대한 1개 외과반을 대구서부시립병원에 파견하였다.
당시 서부시립병원은 140병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환자는 화상환자, 총상환자 250명이 수용되어 치료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파견된 외과반은 한국인 의사와 간호원들의 지원을 받아 다수의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대구분견대는 5월 한국군의 요청으로 대구에 있는 국군 제1육군병원에서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수술업무를 인수하였고,
일부는 유엔민간구호사령부가 운용하는 동부시립병원과 서부시립병원에 파견하였다.
이때 인도 의료진은 한국군을 대상으로 3회에 걸쳐 마취교육을 실시하여 마취기술자 30명을 양성하였다.
또한 7월에는 대구지역의 민간인 외래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진료소도 개소하였다.
처음에는 일일평균 10~15명 정도의 환자들이 찾아왔으나 날로 증가하여 연말에는 일일평균 250~300명으로 증가되었다.
특히 8월에는 부대 인근지역에 있는 고아원에서 150명 이상의 트라코마 환자가 발생하자 이들을 격리 수용하고 일본에서 긴급히 의약품을 획득하여 치료에 매진하여 1952년 9월에 병을 완전히 퇴치시키기도 하였다.
대구파견대는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한국 의사들에게 수술기술 전수에도 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원운영 능력도 향상시켜 1951년 말부터는 한국인들이 서부시립병원을 운영할수 있도록 하였다.
(3) 1952년 이후 활동
1951년 동절기부터 시작된 전선의 소강상태는 1952년 전반기 동안에도 계속되었고, 또한 쌍방이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함으로써 환자의 수도 크게 감소되었다.
그러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적의 야포 및 박격포 사격이 증가 하였고, 이 포격의 일부는 후방지역까지 연신되었다.
특히 9월 13~14일 중공군의 포격이 제60야전병원본부 지역에 떨어져 1명이 전 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올 뿐만 아니라 그 후방 물품보관소에서 작업 중이던 2명도 파편상을 입었다.
이때 이들은 후송을 거부하고 응급조치만 받은 후 오히려 아군 부상병들의 치료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연방사단의 정면에서는 간헐적인 포격전만 있을 뿐 대체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1953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1월 말 영연방사단이 작전지역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군단예비가 되어 동두천으로 이동함으로써 영 제28여단에 배속중인 제60야전병원도 모처럼 부대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25개월 동안 직접 수술조를 편성하여 전장을 누비면서 환자를 수술하며 진두지휘 하던 Rangaraj 중령이 귀국 하고 M.B.K Mair 중령이 후임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영연방 제1사단이 전선으로 복귀한 4월 중순 쌍방은 병상포로교환에 합의하는 등 휴전회담이 급진전을 보게 되었으나 목전으로 다가온 휴전회담 이전에 유리한 지형의 확보를 꾀함으로써 다시 전투는 가열되었다.
따라서 수색대의 조우전, 중요고지 쟁탈전 둥 으로 전사상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되었고, 제60야전병원은 휴전협 정이 조인되던 7월 27일까지 4개월 동안 230여 명의 전사상자를 치료중 치료하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한편 대구분견대 요원들은 1952년 6월부터 대구지역을 순회하면서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한동안 일일평균 300여 명 이상을 진료하기도 하였다. 당시 인도 의료진이 치료한 질병 가운데 가장 효험을 본 것은 어린이들이 주로 감염된 트라코마 이었다.
그리고 대구분견대는 1953년 2월까지 총 1,400회에 달하는 중상자 또는 그 밖의 환자들을 수술해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도 제60야전병원은 한국전쟁에서 높은 의술과 박애 정신을 발휘하여 한국 정부, 유엔군사령관, 인도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훈장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휴전 후 인도 정부가 송환거부포로의 경비를 위한 인도관리군을 파견하자 제60야전 병원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분견대와 합류한 후 그 동안 생사 고락을 같이한 영연방사단을 떠나 이들과 합류하였다.
1줄 요약: 요오시 오늘 저녁은 카레다
- dc official App
흙흙... 캄솨합니다 뚫훍맨...
머추장국보다 위대한 영국이다
끝없는 인더스강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른다.
이래도 안 갓도 입니까?
저곳이 진정한 영국이다 - dc App
감사합니다.. 앞으로 카레를 더 자주 먹겠습니다..
터키와 인도, 동남아 국가의 지원은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진갠지스곤곤래
ㅠㅠ
퍄 이름답게 정말 인도주의적이셨구먼
흑흑 감사합니다 카뤼센세
갓갓인도느님 흑흑
진짜로 카레먹고옴 - 우주비행 마이너갤러리 놀러와주세요 <- 스페이스엔진 마이너갤러리도!
근데 트라코마가 뭐임? - dc App
찾아보니 결막에 감염증이 일어나는 병이라고 하네요. 쉽게말해 눈병이요
ㅇㅎ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