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거란과 991년부터 1019년까지 국경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고, 특히 993년과 1010년,1011년 3차례에 걸쳐 청천강 이남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고려 성종 12년 10월(서기 993년 10월)에 거란은 왕의 사위이며, 동경유수인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려는 박양유를 상군사,서희를 중군사,최양을 하군사로 하여 거란의 침공에 맞서게 하였다.거란의 1차 침공은 봉산군 전투와 안융진 전투 그리고 이후의 강화협상으로 전개되었다. 거란과 고려의 최초 전투였던 봉산군 전투는 고려의 지휘관이었던 선봉군사 윤서안이 포로가 될 정도로 고려가 패배하였다. 봉산군전투에서 고려가 패했던 원인은 이 지역에 고려의 대비가 소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려에서 전투에 투입된 부대는 지휘관의 직함이 선봉군사인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지역에서 상시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아닌 조정에서 급파된 중앙군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에 대한 성곽 축조 기록도 없다. 거란의 침공에 급히 전방으로 나가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거란에 패배하였던 것으로추정된다. 봉산군 전투 이후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은 고려 조정에 항복을압박했다. 서희는 소손녕이 보낸 협박 서찰을 보고 “화친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성종에게 화친을 주청하였다. 고려 성종은 이몽진을 거란 진영에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지만 소손녕은 화친을 거부하고 고려에게 항복을 다시 한번 더 강요했다. 이몽진의 화친제안이 거절되고 소손녕의 압박 강도가 높아지자 고려 중신들은 전쟁을 거두고 항복하자는 투항파와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황주와 절영을 국경으로 삼자는 할지론을 중심으로 격론을 벌였다. 고려 성종과 대신들이 할지론으로 기울자 서희는 이에 반대하면서 ‘선항전 후협상’을 주장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 논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소손녕은 기병을 파병하여 안융진을 공격하여 2차 전투가 발생하였다. 안융진전투에서는 고려군이 대승하여 청천강 유역의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소손녕은 고려에 여전히 항복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고려 임금 성종의 명을 받은 서희는 거란과의 강화조약에 나서 강동6주를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은 고려의 현종 원년(1010년) 11월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약 3개월 동안 치러졌다. 거란의 성종은 현종 원년(1010년) 5월에 “고려에서 강조(康兆)가 임금을 죽인 것은 대역무도한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죄를 물어야겠다.”하고 7월에 고려로 사신을 보내 고려의 목종을 살해한 이유를 물었고 이에 고려 조정은 전쟁이전 네 차례나 거란에 사신을 보내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거란의 성종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치겠다고 통보해왔다. 거란의 성종(聖宗)은 40만의 원정군을 이끌고 1010년 11월17일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지금의 의주)에서 고려군과 최초로 맞섰으나 순검사 양규(楊規)와 이수화(李守和)등 장수와 군민들의 항전으로 성의 함락에 실패하고, 거란군은 고려군에 의한 후방의 위협을 우려하여 20만 여명의 군사를 흥화진주변에 잔류시키고 귀주와 통주, 작주, 안북부(安北府), 서경(西京)을 거쳐 이듬해인 1011년 1월1일에 개경에 입성하였다. 거란군은 남진하면서 고려 군민(軍民)들의 저항으로 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정복하지 못하고 개경에 입성하였다. 이후 고려 국왕의 거란에 대한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한 고려의 강화제의에 거란은 개경을 점령한 지 10여일 만에 개경에서 철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란의 철군 경로인 평주(平州), 신계(新溪), 강동(江東),순천(順川), 영변(寧邊), 귀주(龜州)를 연하는 선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투력에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다. 고려와 거란의 3차 전쟁은 1018년 12월에서 1019년 1월까지 약 2개월 동안 실시하였다. 3차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서 거란은 2차 전쟁 시 강화조건 이었던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조속히 이행 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고려는 거란의 군사적 예봉을 완화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국왕의 친조라는 강화조건을 제시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조건을 실행하지 않았다. 또한 거란은 제1차 전쟁 시 서희와의 협상에 의해 고려에 귀속되었던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깨달아 성종이 친정하였던 2차침공 이후인 1012년부터 1017년까지 5년동안 6회에 걸쳐 사신을 보내고 대·소규모의 군사적 침공을 시도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으나, 고려는 강동 6주를 확고히 장악함으로써 거란의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거란은 1018년 가을부터 소배압의 지휘 하에 10만에 이르는 대군을 편성하여 고려를 침공하였다. 요군의 주력부대는 도통(都統)소배압(蕭排押)의 지휘 하에 고려 방어군 주력부대를 우회하기 위해지형이 험한 서북계 북로를 택하여 단기간 내에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진출을 기도하였으나 남진간에 내구산과 마탄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심대한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남진을 계속한 거란의 주력군은 1019년 1월초에 개경북방 100리 지점의 신인현(新因縣:신계)까지 진출하여 고려를 기만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려 측에 화의를 제기하면서 정찰기병을 개경방면으로 진출시켜 개경을 급습하려고 시도하였지만 고려군의 기습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1019년 1월에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거란의 철군병력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실시하여 연주, 귀주 등지에서 거란군을 패퇴시켜 26여년에 걸친고려와 거란의 전쟁 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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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거란의 침공 경로

  이와 같이 고려는 거란의 무수한 침공을 받았지만 전쟁이 종결되자 고려의 위상은 전쟁이전보다 국제적위상이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송나라조차 “고려가 거란을 섬기고 있지만 거란이 고려를 두려워한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렇듯 실질적인 승리를 가져온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택하였던 전략에대하여 분석하겠다. 이를 위해 먼저,고려가 택한 전략 수립에 영향을 주었던 거란의 고려 침공배경과 이유를 먼저 분석한 후 거란에 맞선 고려의 전략결정과정과 전쟁수행전략을 분석하겠다.

거란의 고려 침공전략
1.거란의 전쟁목적과 전략목표
(1)1차 전쟁
  거란이 고려를 최초 침공할 당시의 의도에 대하여『고려사』나『요사』에 명확히 기록된 것은 없으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여요전쟁사』에는 ‘고려 서북계 방어군의 심장부인 안북부를 단시일 내에 장악하고,청천강 남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서경(西京:평양)에 대한 위협을 가함으로써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를 제의하여 청천강 이북지역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즉, 청천강 이북지역을 복속시켜 고려를 거란의 영향권아래 두고자 한 것이 전쟁의도였다고 한 것이다. 안주섭(2001)은 ‘고려를 복속시켜 송과의 교류를 단절시킴으로써 후방 위협을 제거하고자 침공하였다’고 하였다. 그 밖의 대부분의 연구자들도 거란이 송과의 쟁패에 앞서 후방의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소손녕과 서희의 협상결과만을 놓고 유추한 것으로 너무 단편적이다. 따라서 좀 더 구체적인 의도 파악을 위한 분석이 필요하였다.
  거란의 침공 목적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이전의 거란의 지속적인 화친제의, 거란의 원정형태와 침공이후 고려에 대한 요구조건, 고려와의 협상결과에서 알 수 있다. 먼저 거란의 고려에 대한 화친 노력이다. 거란은 922년에 태조인 아율아노기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낙타와 말·모포 등의 예물을 진상하고 친선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시기는 거란의 개국시기로 배후에 있는 고려를 우방으로 만들기 위하여 거란의 태조부터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942년에 거란은 30여 명의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하였지만, 고려의 태조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거란의 사절단을해도(海島)에 감금하고 거란의 태종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 묶어놓아 굶겨 죽였다. 일부의 연구자들은 만부교사건이 거란이 침공하게 된 하나의 이유라고 하지만, 그 이후에도 거란의 화친 노력은 계속되었다.『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 나타나 있는 거란의 화친노력 사실은 986년에 ‘거란이 궐렬(厥烈)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는 거란이 만부교사건 이후에도 고려와 화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음을 알 수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거란의 원정형태를 통하여 거란의 침공목적을 알 수 있는데,『요사』병위지(兵衛志)에는 황제가 친정하는 경우,도통이 통솔하는 경우, 도통을 임명하지 않을 경우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 황제가 친정하는 경우는 원정대상이 되는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를 차지하거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하였으며, 황제의 친정은 전국적인 동원체제를 가동하여 시행하였다. 거란 태조의 발해친정, 태종의 후진에 대한 친정, 고려와의 2차 전쟁이 그 예이다. 두 번째는 조정의 대신을 도통(都統)으로 임명하여 원정하는 것이다.『요사』(遼史)에는 만약 ‘황제의 원정이 아니고 중신(重臣)이지휘하여 원정하면 15만 명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거란조정의 중신이 도통으로 임명되어 원정 시에는 군사가 15만 명 수준에서 동원되며, 황제가 친정할 때 보다 대의명분이 약하고 동원되는 병력규모가 작은전쟁을 치룰 때 행하여졌다. 원정의 세 번째는 형태는 조정 중신(重臣)을 임명하지 않고 지방관을 임명하는 경우로『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도통은 임명하지 않으며, 단지 기병(騎兵)6만을 보내 적진 깊이 들어가지 않고 300리 안의 마을을 불태워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한다. 즉 도통은 임명하지 않고 특정 지방관을 임명하여 원정하는 형태로 기병위주로 편성하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단기간의 제한된전쟁을 수행할 경우에 시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토를 확보하거나 적의항복을 받는 수준이 아니라 적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히거나 외교적 압력을가하려는 제한적 목적으로 원정 시 수행하는 원정형태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도통이 임명되지 않는 사례는 983년에 송나라에서 하북(河北)에 성을쌓아 당시 남경유수(南京留守)에게 이를 파괴하도록 한 조치가 있다. 즉 고려에 대한 1차 침입 시 비교적 고려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동경유수(東京留守)인 소손녕(蕭遜寧)에게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을 보면 고려의 영토를 정복하거나 항복을 받아내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란의 침공 의도를 추론할 수 있는 세 번째 근거는 소손녕이 제시한 침공이유와 요구조건이다. 거란의 소손녕은 봉산군(蓬山郡:평안남도 안주)을 함락시킨 후 고려에 아래와 같이 글을 보냈다.

"대로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는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대로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너희 나라가 강도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도한다."

  이후 고려가 이몽진(李夢樄)을 사신으로 거란의 진영에 보내자 소손녕은 다음과 같이 글을 보냈다.

"80만의 군사가 다다르리라 만약 강(江:대동강)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모두 멸할 것이니 군신이 빨리 진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너의 나라가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우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시행한다. 만약 화친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빨리 와서 항복하라."

  소손녕은 청천강 이북의 1개의 성을 공격한 직 후 바로 80만이라는 대군을 과시하면서 고려에게 항복을 강요한다. 그러면서도 이몽진에게 화친의 단초를 제시한다. 대군을 인솔하여 원정 왔다고 하면서도 화친을 제의한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거란의 전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네 번째 근거는 서희와의 협상에서 보여준 거란의 태도이다. 전쟁의 불씨가 된 강동6주를 고려에 반환하면서까지 고려에 얻어낸 것은 송과의 단교와 거란에 조빙하는 것이었다. 소손녕의 표현대로 8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한 것에 비하면 거란으로서는 별로 소득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최초부터 고려에 대한 침공이 고려를 몰락시키거나 영토를 빼앗을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거란의 태조이후의 지속적인 고려와의 화친노력, 통상 단기적이고 국지적인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원정형태인 지방관리인 동경유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점 그리고 청천강 이북의 1개의 성을 공격한 이후 바로 항복하라고 하면서 거란의 통상적인 원정형태로 미루어 6만 정도의 병력이었을것임에도 80만이라고 허장성세를 부린 점.서희와의 협상에서 고려가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에 조빙하는 것을 조건으로 강동 6주를 고려에 반환하고 철군하였던 것을 종합하면, 거란의 전략목표는 송과의 전쟁을 위해 고려의 일부지역을 침공하여 군사적 위협을 가함으로써 고려가 송나라와의 우호관계를끊게 하여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 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거란이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침공하는 데에 영향을 준 요소이다. 전쟁의 결정은 정치, 군사적 측면이 복잡한 현대의 경우에는 특정한 단일 인물이 결정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거란의 경우에는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원정형태의 기본은 왕이 친정하는 것이었다. 드로(Draw)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나폴레옹과 같이 전투원과 왕의 직분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 가장 포괄적인 행태의 정치적 지시에서 시작해 가장 상세한 수준의 전장전략(전술)에 이르는 사안들을 결심한다’고 하였다. 거란도 왕이란 단일 인물이전투원과 왕의 역할을 병행하였으므로 전략의 구상과 관련된 결심을 왕이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요사』의 기록에 “동경유수 소항덕에게 고려를 정벌토록 하였다.”라고 하여 성종이 직접 소손녕 등에게 고려 정벌을 명한 것이 나타나 있다. 이렇듯 당시에 거란의 성종 임금에게 고려를 공격하도록 한 영향요소를 분석하겠다. 드로와 손자가 제시한 요소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당시의 송과 고려, 거란의 국제관계이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당시인 10세기 초, 중국대륙은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五代 十國)의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907년 황소 농민군의 장수 출신 주온은 당에 항복한 뒤 오히려 당을 멸망시키고 양(梁)나라를 건립하였으며, 위진 시대의 양나라와 구별하기위해 주온이 세운 양나라를 후량이라 불렀다. 뒤를 이어 반세기 만에 후량(後粱:907~923), 후당(後唐:923~936), 후진(後晋:936~946), 후한(後漢:947~950), 후주(後周:951~960)등 다섯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였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전촉·후촉·오·남당·오월·민·형남·초·남한·북한 등 10개의 군벌 정권이 할거하였다. 그러던 중 후주의 절도사인 조광윤(송태조)이 960년에 송왕조를 건설하고 5대 10국의 혼란과 분열을 가라앉히고 한족(漢族)에 의한 통일 왕조의 시대를 열었다. 한편 중국 대륙의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그 당시동북 요하지역에 있던 거란족이 점차 세력을 성장시켜 만리장성 이북지역 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변방 부족들 통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916년 거란국을 건립한 뒤 947년 요(遼)로 이름을 바꿨다. 한편 송 왕조는 건국초기 한족에 의한 통일 제국 건설을 목표로 삼아 요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송의 거란에 대한 공격은 거란이 중국 대륙으로서의 진출을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송과 거란은 동아시아 및 중국 중원지역에 대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엽까지 약 50여 년 동안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따라서 송은 거란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고려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고려와 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에 외교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한편 거란은 전통적인 우방국인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고려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끌어들임으로써 송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 것이 정치, 군사전략의 일환이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주변 소수민족과 한족은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켰으며,이러한 충돌은 중원에 있는 한족의 왕조가 천자국으로서 더 넓은 국토를 개척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기마 민족이 군사력을 앞세워 중원의 농경문화를 침입한데서 초래되기도 하였다. 열악한 자연 환경의 압박, 농경사회의 거대한 부에 대한 동경, 낙후된 사회 특유의 약탈성과 야만성 등이 서북 소수민족들이 끊임없이 남침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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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거란과의 전쟁직전 동북아 정세

  중국 고대에 몽골고원과 동북의 소수민족이 부단히 전쟁의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역대의 중원 왕조는 모두 그 핵심적인 국방시설을 북방에 두었고, 만리장성을 보완하여 견고히 하였다. 만리장성은 국가방어선의 의미를 지니고있었을 뿐이 아니라 장성남북의 띠 모양지대는 북방의 이민족인 기마민족과 한족인 중원 왕조의 주요 교전 지역이었으며 그 중에서 영토쟁탈전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은 하투(河套)평원, 하서주랑(河西走廊), 요동지역 및 화북지구등 연운 16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전략적 요충지가 기마민족의 수중에 떨어지면 중원 왕조의 국경은 심각한 위협을 받았으며, 이민족의 남침에 지극히 유리한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란은 중원의 5대 10국(五代十國)의 분열기를 틈타 연운 16주를 차지하였다. 송의 건국이후 조광윤은 13년 동안 정벌사업에 나서 남쪽의 9개 할거 정권을 정복하였고, 이어 송나라임금으로 즉위한 태종 조광의가 979년 10개의 할거 정권 중 마지막 하나인북한을 정벌한 기세를 몰아 연운 16주를 수복하기 위해 하복으로 진격하였으나 고량하(高梁河:지금의 북경 사립문 밖 일대)에서 거란의 위계와 협공에 말려 참패하였다. 3년 뒤 982년 거란의 성종이 어린나이(12세)에 즉위하여 거란의 국정이 혼란하다고 여긴 송나라는 986년에 거란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으나 기구란(지금의 하북 탁주시)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이처럼 거란이 고려를 최초로 침공할 당시 거란은 연운 16주를 두고 송나라와 두 번의 전쟁을 치루는 등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한편, 거란이 건국될 즈음 한반도의 정세는 신라가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통일신라·후백제·후고구려의 후삼국으로 분리되어 경쟁하였는데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왕건은 왕조창업과 동시에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고려’라는 국호를 정하고 고구려의 옛 강토를 모두 수복한다는 국가적 목표를 설정하고 북진정책을 추구하였다.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아 도성을 쌓고 학교와 관부를 설치하였으며 주민들을 이곳에 이주시켜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청천강 이남의 안주에는 안북부(安北府)를 설치하고 순안-숙천-성천 등지에 성곽을 쌓아 태조 말년에는 청천강 하류부터 영흥만을 연하는 선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한편 거란은 중원으로의 진출을 위해 개국 초기에는 고려와 화친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922년(고려 태조 5)에 거란은 태조 야율아보기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낙타와 말, 모전 등의 예물을 진상하고 친선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거란의 태도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었으나,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국내사정을 감안하여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동태를 관망하였다. 그러나 926년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국경선이 접하게 되자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정복하고 북방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있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이에 따라 고려는 발해 유민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고, 발해유민이 세운 정안국과 여진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경일대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고려 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훈요10조에서 거란에 대한 경계와 북방정책 추진을 당부하였다. 고려의 역대 제왕들은 태조의 이러한 유훈에 따라 거란의 침략으로부터 고려를지키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중국의 후진(後晉)과 연합하여 거란을 제압하려는 외교활동을 펼치고,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여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여 광군 30만을 배치하고 여진으로부터 기마 700필을 획득하여 기병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도읍을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길 수 있도록 대규모의 토목공사와 청천강 북안의 덕성진(德成鎭:영변),박주성(博州城:박천)등지에 다수의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는 거란의 고려 침공에 대비한 능동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고려의 전략으로서 고려는 거란과 긴장관계를유지하였다. 반면에 송과 고려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가졌다. 같은 유교문화권이고, 농경국가인 한족(漢族)이라는 심정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요인이 있어 정치·외교·문화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려는 건국이후 중국의 5대(五代)왕조와 교류를 하였다. 926년 후당(後唐)에 대하여 사신을 파견하고 932년에 후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후당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중국왕조에 대한 사대 외교를 실시하였고 후당(後唐)에 이은 후진(後晉)에 대해서도 사대외교로 이어졌으며, 938년 고려는 후진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939년 후진은 왕건을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송 제국이 중국을 통일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고려는 962년(광종13,송태조3)에 광평시랑(廣平侍郞)이흥우(李興祐)를 송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이후 고려와 송은 국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고려는 송과의 문화·경제적 교류를 통하여 개국 초기선진문물을 수입함으로써 고려의 경제와 문화수준을 제고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송의 입장에서는 다소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려와 교류하였다. 거란이 연운 16주를 차지하고 송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송은 거란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와 동맹을 맺어 거란을 협공함으로써 동아시아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고려 친선외교노선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관계는 군사동맹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985년 5월에 송나라는거란을 정벌하기에 앞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건국이 얼마 되지 않아 국가의 체제가 정비가 안 된상태에서 송과 동맹을 체결하여 거란을 자극하는 것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리란 판단 하에 송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에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어 송에 동맹을 요청하자 일시적으로 거란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송은 고려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처럼 여·송 양국은 외교적으로는 우호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거란과의 당시 상황에 따라 군사적으로는 상호간에 추구하는 목표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려와 송의 외교․문화적 교류는 중원을 확보하려는 거란에게는 불안감을 증가시키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거란의 입장에서 장차 중원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고려를 침공하여 위협을 가해야 하는 것이 고려 침공의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영향을 준 요소는 거란의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손자는 칠계(七計)에서 ‘적국의 군사력과 비교하여 전쟁의 승부를 사전에 예측하고 전쟁을 일으키라’고 하였다.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기 이전에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946년에는 후진을 멸망시켰으며, 986년에는 송나라에 대하여 침공을 실시하여 역주(易州)를 탈취하는 등 군사력의 기세가 왕성하였다. 고려와의 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거란의 군세는 금위제군과 향병을 합하여 170만명에 이르렀으나 실제 동원 가능한 정예 병력은 10만 내지 12만이었고,나머지는 예비병력이나 노무병력 또는 보조병력으로 동원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의 자질면에서 986년 송과의 전쟁 시 큰 승리를 거둔 소손녕을 포함하여 동북아시아 각국과 전쟁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이 있어 비교적고려와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주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거란은 건국 이래 주변지역으로 세력 확장을 하는 가운데 발해, 후진(後晉)을 멸망시키고 송나라와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연승하는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이 고려를 침공하게한 요소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사료와 기존 연구자의 연구자료를 통해서 손자와 드로(Drew)의 전략수립 영향요소 중에서 국제관계와 군사력이 고려 침공의 가장 큰 직접적인 요소가 되었다. 다른 전략수립 영향요소인 거란의 국내 정치 환경과 경제문제, 국민의 항전의식은 임금이 곧 군사요, 정책을 결정하는 거란의 정치체계에서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작전환경도 원정작전을 주로 하였던 거란으로서는 큰 영향 요소가 될 수 없었다.따라서 송과 고려, 거란의 국제관계와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가 전쟁을 결정짓는 가장 큰 영향요소였을 것이다.

(2)2차와 3차
  전쟁거란 성종이 친정하였던 2차 전쟁 시 거란의 고려에 대한 전쟁의도는 일반적으로 강조의 정변을 문제 삼아 강동 6주의 반환을 목적으로 침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와 거란의 강동 6주 쟁패에 대한 언급은『송사(宋史)』에 나와 있다.

"거란이 고려를 습격한 뒤 고려는 흥화진(興化鎭),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귀주(龜州), 곽주(郭州)등 6개 성을 국경에 쌓았다. 거란은 자기를 배반하려는것으로 생각하여 사신을 보내 6성을 요구하였으나, 고려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려의 궁실을 불태우고 주민을 약탈하였다. 거란이 6성을 요구하였으나고려는 군대를 파견하여 6성을 수비하였다."

  또한 거란이 고려의 침공을 결정 시 거란의 성종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고려의 강조는 제 임금 왕송(王誦:목종)을 시해하고 왕순(王詢:현종)을 옹립하여 이를 보좌하고 있으니 이는 대역무도한 처사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 죄상을 물어야 한다."

  거란이 압록강을 건넌 이후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의 성종이 흥화진 성내의 고려 군민들에게 보낸 통첩에서는 강조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내가 몸소 정예병을 이끌고 이렇게 국경까지 온 까닭은 역신(逆臣)강조가 전왕(前王:목종)을 시해하고 제멋대로 어린 임금을 옹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즉시 강조를 잡아서 나에게 보낸다면 지금이라도 곧바로 군대를 철수시키겠노라."

  이상에서 나타난 기록으로 보아 거란의 침공목적은 강조의 난을 명분으로 강동 6주의 반환을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기록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것은 없지만 강동 6주 만을 목표로 한 것이아니라 다른 전략적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근거로 첫째는 거란 임금이 친정하는 원정형태이다. 거란의 황제가 친정한 사례는 거란 태조가 발해를 친정하여 멸망시킨 것이나, 거란의 태종이 946년 후진(後晋)을 멸망시킨 것. 1004년 거란의 성종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송을 침공하여 전연(瀍淵)의 맹약을 맺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원정대상이되는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를 차지하거나 속국으로 만드는 것처럼 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침공한 사례가 많았다. 특히 거란의 성종이 중국의 중원을 놓고 쟁패하던 송나라를 침공시 20만의 군사규모였던 데 비해 고려를 침공 시에는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왔던 점을 고려시 강동 6주의 반환을 전쟁목적으로 삼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황제가 친정을 하여 상대국을 복속시킬경우 대외적인 명분을 내걸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해당국의 왕조와 관련한문제였다.이는 무경칠서의 『오기』에서 전쟁의 명분 중 가장 상위의 명분인‘의병(義兵)’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강조의 정변을 대외적인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고려의 내란을 명분삼아 고려를 복속시키기 위한 가장 최상의 명분이었던 것인데 이러한 명분을 내걸고 황제가 친정한 것을 강동 6주 반환만을 목적으로 침공하였다고 하기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거란의 적극적인 전쟁목적을 알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을 함락한 이후 개경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일대의 백성들 재물을 약탈하고 수많은 양민을 살상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 왕실의 역대 제왕을 제사하는 태묘(太廟:종묘)와 궁궐, 시가지를 모조리 소각하여 도성일대를 초토화시켰던 사실이다. 이는 고려의 역사를 없애려는 거란의 본심이 나타난 행위로 볼 수 있는것이었다.
  세 번째는 거란의 성종이 고려에 대한 침공 명분으로 내걸었던 강조에 대한 태도이다.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어전회의에서 강조에 대한 징벌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흥화군에서 저항하는 고려인들에게 강조의 난을 침공 이유로 들었던 거란의 성종이 통주에서 고려의 강조를 사로잡아 회유한 점이다.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당당한 기개와 늠름한 풍모에 깊이 감복하여 그를 자신의 신하로 삼기위해강조의 결박을 풀고 투항을 권유하였다. 네가 나의 신하가되기를 원하느냐? (성종),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강조)성종이 이를 두 번물었으나 강조의 대답은 동일하였고, 성종이 강조의 살을 찢는 고문을 하면서 강요하였으나 강조는 숨을 거둘 때까지 고려에 대한충절을 지켰다.”

  대역무도한 죄인이라 칭했던 강조를 인품과 외모에 반하여 거란의 신하로 삼으려하였다는 것은 고려를 침공한 목적이 다른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거란의 침공목적을 알 수 있는 네 번째 근거는 고려인 포로 압송이다. 거란은 유목민족이지만 태조 야율아보기는 동생들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무력에 의한 지배를 완화하고 농경에 주력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후대에도 계승되었다. 유목민들인 거란은 농경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농경지 개척을 위한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거란이 전쟁을 통해 복속시킨 포로를 활용하였다. 거란은 원정 시 항복을 청한 적에 대하여 포로획득을 더 이롭게 여겨 항복을 받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거란이 고려에서 회군하면서 데리고 간 포로의 수가 역사기록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개경에서 압록강까지 철군하면서 고려가 다시 빼앗은 포로의 숫자를 보면 거란이 상당히 많은 수의 포로를 확보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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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해방시킨 포로

  위의 표는『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 나와 있는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해방시킨 포로 수를 제시한 것으로 실제 포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가 해방시킨 기록에 남아있는 포로만 4만여 명이나 되었으니 실제 기록에 남아있지 않고 거란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감안하면 4만 명을 훨씬 넘는 인원을 포로로 삼았으리라 추정되며, 이러한 대규모의 포로 확보는 거란이 침탈하여 멸망시키거나 속국으로 삼는 적극적인 목적을 띄고 전쟁을 일으킨 것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또한 거란의 전쟁목적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로 고려가 강조의 패전이후 12월 9일경에 ‘고려 국왕의 거란에 대한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하자 거란의 성종은 고려를 속국(屬國)으로 취급하고 개경부근 일대를 직할지로 통치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을륨이 거느린 기병 1000기의 호위아래 마노우를 개성유수(開城留守), 왕팔을 개성부유수로 임명하여 개경으로출발시켰다. 비록 서경(평양)에서 이들을 기습 공격하여 격퇴하였지만 고려를 속국화하려는 거란 임금의 속내가 드러난 사건이었다.
  즉, 2차 전쟁 시 거란의 전쟁 의도는 성종이 친정한 점, 고려 수도인 개경의 초토화, 성종의 강조에 대한 태도, 대규모의 포로확보, 개경유수의 임명 등을 고려 시 강조의 난을 명분삼아 고려를 속국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전략목표는 개경을 신속히 점령하여 고려 임금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거란의 고려에 대한 2차 침공에 영향을 준 요소이다. 고려에 대한 2차 침공전의 동북아 정세는 1004년에 거란이 송(宋)을 침공하여 일방적으로 송나라를 밀어붙여 송의 수도인 변경으로 진군할 태세를 갖추기에 이르렀고 이에 송나라는 황제인 진종이 친정하여 황하북안의 전주로진군하였다. 황제의 친정에 고무된 송이 거란에 대한 맹렬한 공세를 가함으로써 거란은 수세에 몰리게 되고 송나라의 화의 제의를 거부하던 거란이 송과의 강화에 적극 나서 거란과 송은 전연(瀍淵)의 맹약이라는 강화조약을 맺어 형제지국(兄弟之國)의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 결과 송은 거란에 매년 비단20만 필과 10만 냥을 예물로 증여할 것을 약조하였다. 송과의 쟁패에서 우위에 선 거란은 배후의 위협세력이 될 고려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한편 고려는 거란과의 국교를 수립한 이후에도 송과 문물교류를 이어가는 이중적인 외교정책을 펴고, 북방의 변경지역에 대한 방비태세를 강화하자 거란이 고려에 대한 침공을 결심하게 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두 번째로 거란의 국내 정치문제가 고려 침공의 영향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983년 거란의 성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이후 나이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대권을 장악하여, 송나라 침공까지 함께 하였던 성종의 생모인 예지황후(叡智皇后)소씨(蕭氏)가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기 직전인 1009년에 사망한 것이다. 그 동안 거란의 황제이면서도 26년간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있던 성종으로서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거란에 복속하지 않은 인접지역에 대한 원정은 황제로서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세 번째로 군사력의 증강이었다. 송과의 전쟁준비 과정에서 군사력을 확충한 거란으로서는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먹잇감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특히 고려와의 1차 전쟁에서 지형에 대한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거란은 북방개척과정에서 고려와 자주 충돌하였던 여진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성종이 고려 정벌을 명하였을 때 여진이 양마 만 필을 바치면서 고려 정벌에 참여할 것을 청하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고려의 지형에 생소한 거란으로서는 비교적 고려의 지리에 익숙한 여진의 참전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거란은 송나라와 고려의 미묘한 국제정세, 거란 국내의 정치문제, 군사력의 증강이 고려와의 전쟁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은 거란의 3차 전쟁의 목적과 영향요소이다.거란은 제 2차 고려와의전쟁 이후로 추락한 자국의 위신을 만회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2차고려와의 전쟁 당시 강화조건이었던 고려 국왕의 친조를 조속히 이행할 것을고려에 촉구하였으나, 고려의 입장에서는 거란군의 철수를 유도하기 위해 국왕의 친조라는 강화조건을 제시하였을 뿐 철군하는 거란군을 패퇴시킨 고려로서는 거란에 친조를 할 의도가 없었다. 이에 대한 예로 1012년(현종3) 4월 고려는 채충순을 보내 거란과의 사대 관계를 청하였는데 거란의 성종은 고려국왕의 친조를 재차 요구한다. 또한 8월에 고려가 재차 사신을 보내 왕이 병으로 친조할 수 없음을 고하였으나,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를 취하도록 조서를 내린다. 이처럼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게되자 고려로부터 흥화진, 통주, 철주, 용주, 귀주, 곽주 등 강동 6주를 탈취하려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왜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요구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고려가 친조를 실행에 옮길 경우 고려 국왕을 억류시키고 고려를 그들의 완전한 속국으로 전락시키고자 의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강동 6주의반환을 주장하였던 이유는 고려가 자의대로 외교를 전개할 수 없도록 압박하는 수단일 수 있다는 점이다. 강동 6주는 고려가 송과의 교류를 위한 통로임은 물론 압록강 일대의 여진을 통제하기 위한 요충지였으므로 국제 관계에서나 교역로의 장악을 위해 강동 6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고려와 송과의 교류를 통제하고, 특히 한반도 동북방의 여진족까지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동 6주의 중요성은 증대되었을 것이다. 또한,강동 6주는2차 전쟁 시에 공략하지 못함으로써 철군과정에 기습을 당하였던 흥화진(興化鎭)등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향후 고려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방어 요충이었던 강동 6주의 환수는 절실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거란은 국왕 친조 문제에 이어 강동 6주의 환수를 계속 요구하였고, 고려 역시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여 거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거란은 1012년부터 1017년까지 5년 동안 고려에 대하여 대소규모의 국지적인 무력도발을 하였고 이러한 도발은 고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자 거란은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무력시위로는 고려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 번째의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즉, 거란의 3차 고려 침공목적은 고려 조정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고려 임금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0월에 ‘동평군왕(東平郡王)소배압을 도통(都統)으로 소허렬을 부통(副統)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앞에서 제시한바와 같이 황제가 친정하지 않고 도통을 원정군의 총수로 임명한 것은 적국을 정복하기 위한 의도로 황제가 친정하는 것과 달리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원정군 편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의 2차 침공에서는 황제가친정하고 병력이 40만 규모였지만, 3차 침공 시에는 10만 규모로 병력을 편성하였다. 또한 거란군이 삼곳천 전투와 연주에서 패하였음에도 서북계 북로를 이용하여 신속히 개경인근의 신은(新恩)까지 도달한 것은 그들의 전쟁의도가 신속히 개경을 점령하여 고려 임금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얻어내려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란이 고려를 세 번째 침공하는데 영향을 미친 요소는 2차 전쟁 시에 황제가 친정하였음에도 철수 간 크게 패하였고,철수의 조건이었던 고려 임금의친조가 이루어지지 않자 황제의 권위에 상처를 입은 거란 황제 성종의 통치기반 확립이라는 국내외적 정치 요인과 3차 전쟁 이전에 수차에 걸친 국지전으로 전력이 약화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고려의 군사력에 대한 거란 군사력의 자신감이 고려 침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거란의 고려에 대한 침공의도와 전략목표는,1차 침공 시에는 송나라에 대한 경략을 앞두고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침략하였으며, 국지적인 전쟁과 위협으로 고려와 강화를 달성하는 것이 전략목표였을 것이라 판단된다. 2차 침공 시에는 거란의 황제가 친정한 점과 정벌국가의 복속을 위한 최상의 명분인 강조의 정변을 문제 삼은 ‘의병’임을 내세운 점, 그리고 고려 침공 시 강조에 대한 성종의 회유, 개경에 대한 방화와 포로 확보 등의 이유로 거란이 고려를 복속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침공하였으며, 이를 위해 개경의 신속한 함락과 고려임금의 항복을 전략목표로 삼았음을알 수있었다. 3차 전쟁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를 비롯한 압록강 일대의 지배권 확립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속히 개경으로 진입하여 거란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는 것을 전략목표로 삼았으리라 판단된다.

2.거란의 군사력과 전쟁수행전략
  고려 침공당시의 거란의 군사력과 전쟁수행전략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거란의 군사력은 군사제도를 위주로, 전쟁수행전략은 전법을 위주로 살펴보겠다.먼저 거란의 군사제도이다. 거란은 다수의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생활을하였던 탓에 경제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주변지역으로 세력을 확장,전쟁을 통해 식량과 말,노동력 등 생산수단을 획득하고,해당지역을 속국화(屬國化)하여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기마민족 특유의 유풍에 따라 군사제도는 송과 고려 등 농경사회 국가와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거란인은 4-5세의 어린 시절부터 소궁(小弓), 단창(短槍)을 휴대하여 수렵과 승마, 궁술을 익혀 전사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갈 수 있었고, 목축에 적합한 생활여건을 찾아 수시로 이동하는 등 군사적 성향이 강한 생활습관이 배어있었으며, 거란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기사(騎射)에 숙달되어 있으므로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유사시에는 전사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예비전력으로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잠재능력은 농경사회의 보병위주 군사집단에 대해서 기동력과 충격력으로 큰 위력을 발휘하여 그들이 전개하는 정복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거란족은 초기에는 순수한 거란인만으로 군을 구성하였지만 주변지역으로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이민족도 군(軍)에 편입되었다. 거란군은 크게 금위제군(禁衛諸軍)과 중부족군(衆部族軍), 향병(鄕兵)의 세 가지 계통으로 대별되었다. 금위제군은 황제의 친위부대인 어장친군(御帳親軍)과 호위부대인 관위기군(官偉騎軍)으로 구성되었으며, 어장친군은 다시 피실군(皮室軍)과 속산군(屬珊軍)의 두 부류가 있었고, 피실군이 약 30만,속산군이 약 20만으로 병종은 주로 기병(騎兵)이었다. 중부족군은 부족단위의 군대로서 사리군(舍利軍),극군(剋軍)등이 있었으며, 정확한 병력규모는 알 수 없다. 또한 향병은 크게 거란족과 이민족(한인,해인,발해유민 등)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혼합편성되어 있었으며, 110만 7300여명에 달하였다. 전시에 거란군은 대체로 3로로 나뉘어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전투부대의 기본 단위는 1대로써 500명 내지 700명의 규모였으며, 10대를 1로로 하였고, 10대의 상위조직으로 1로를 구성하였으므로 1로는 5000〜7000명의 군사조직인 셈이다. 고려와의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거란의 군세는 금위제군과 향병을 합하여 170만 명에이르렀으나 실제 동원 가능한 정예 병력은 10만 내지 12만이었고, 나머지는 예비병력이나 노무병력 또는 보조병력으로 동원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은 거란의 전쟁수행전략에 대해 살펴보겠다.거란의 고려 침공전략에 대하여 역사적 기록은 나와 있지 않으나,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 시 세웠던 전략으로 미루어 추정할 수는 있다.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시 좌 제 6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던 대장군 단문진이 양제에게 다음과 같이 對고구려전략을 헌책(獻策)하였다.

"고구려군은 그 술책이 변화무쌍하니 항복을 제의해 올 경우에도 쉽사리 이를 받아들이지 마옵소서. 공격작전 간에는 1개 거점의 공략에 집착하지 마시고 주야로강행을 거듭하여 오직 수도인 평양성만을 목표로 삼아 공격작전을 단행하십시오.평양성이 무너지면 나머지 거점들도 저절로 붕괴될 것입니다. 한 곳에서 시일을 오래 끌면 군량보급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즉,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으로 최대한 신속히 진공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으로 이러한 전략은 거란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시행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거란의 2차와 3차 침공 시의 전쟁행태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요사』에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군사가 행군하다가 도와 주의 성에 이르러,방어가 견고하여 공격할 수 없으면,군사를 이끌고 지나간다.
② 곳곳의 주성(州城)들이 서로 연락을 못하도록 하여 고립무원의 상태를 만든다.
③ 좌우의 관도(대로), 비탈길, 산길, 나루 등에도 밤중에 군사를 파견하여 순찰을 돌게 한다.
④ 적군이 진을 치고 있으면 진세의 작고 큰, 산천의 형세(중략)를 고려하여 각각 제압한다. 사방에 진을 치고 가장 앞에서 1대가 적진으로 돌격하여 소득이 있으면 일제히 나가고,소득이 없으면 물러나고 제2대가 뒤를 이어 돌격한다.

  ①,②,③에서 거란은 진격로 상에 있는 성곽들에 대해 저항이 거세면 성곽들을 함락시키지 않고 성을 그대로 지나가되, 배후공격을 당할 위험에 대비해일부 병력을 성 근처에 잔류시켜 인근 성곽과 연계할 수 없도록 주변 지역을차단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동력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상대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전략으로 고려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또한 ④에서 성곽을 공격하는 주요 전략이 나타나 있다. 즉,성을 포위하여 약점을살핀 다음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그것이 성공하면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며, 실패 시에는 퇴각하는 척 물러나지만, 이어서 2제대, 3제대가 계속하여 공격하는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거란의 전략은 고려 강조와의 통주성 전투에서발휘되었는데, 거란군의 최초공격이후 퇴각한 줄 알고 방심하던 강조가 재차사방에서 공격을 하였던 거란군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였다. 통주전투에 대하여『요사』와『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11월 을유일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고려의 강조가 맞서 대항하였으나 패배시켰다. 강조는 동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가 병술일에 다시 출병하였으나, 우피실상온 야율적조가 강조와 부장 이립을 사로잡았다. (『요사』 권15성종6년 11월).
② 통화 28년에 황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야율분노가 선봉이 되었다. 동주에 이르자 강조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우리군사에 대항하였다. 세 강물이 모이는 곳에 강조는 머물렀고, 야율분노는 야율홍고를 거느리고 세 강물이 모이는 곳에 친 진영을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으니 이현온 등의 군대는 멀리서 바라보고서무너졌다.(『요사』 권15열전 야율분노)
③ 강조가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강조는 물이 모이는 곳에 있었고 강조는 검차(劍車)로써 거란의 군사를 공격하니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거란의 군사가 여러 번 물러가니 강조는 드디어 적을 깔보고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란의 야울분노가 야율적조를거느리고 삼수채를 격파하자진의 주장이 거란의 군사가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적은 입안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고 하였다.(중략)강조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군사가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년 11월)"

  ①,②,③에서 강조군을 최초로 격파한 것은 거란의 선봉군이었던 야율분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①에 의하면 강조를 사로잡은 것은 우피실군을 지휘하던 야율적조인 점으로 미루어 거란군은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초 전투에서 검차로 거란군을 격퇴시킨 강조가 “입안으로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거란의 작전투입로는 같은 방향에서 이루어졌고, 최초 공략에 실패한 이후 계속해서 공격하였음을 알수 있다. 즉, 거란은 최초 전투에서 고려의 검차에 밀려나 퇴각하였으나 계속하여 2·3제대를 투입하여 공격하였고, 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고려군을 공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조군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친 것으로 보아 성곽에서의 전투가 아닌 평지에서의 전투로 고려군이 대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부대를 주축으로 하고 있어 속전속결의 단기전(短期戰)을 중시하였던 거란군은 보통은 봄에 출병할 경우는 1월에 출병하여 4월에 철군하고, 가을에 출병할 경우에는 9월에 출병하여 12월에 철병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고려와의 3번의 대규모 전쟁 시에는 가을에 출병하고 겨울에 철군하였다. 거란은 중국대륙지역으로 국토를 확장하게 됨에 따라 점차 중국의 문화에 동화되어 거란의 사회형태는 유목민사회와 농경민 사회가 공존하는 복합적 특성을 지닌 반정착 사회로 탈바꿈하여 군사제도에도 그대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요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① 사자를 보내 길을 나누어 출발을 재촉하고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곡식을 밟을까봐 우려해서이다.(『요사』 권34병위지상 병제)
② 군사가 남쪽 송나라 경계에 들어가면 보병, 기병, 병거는 밭이랑을 지나지 않는다.(『요사』 권34병위지상 병제)
③ 조서를 내려 각도의 병력을 징발하고 이어서 경계하기를 감히 벼 곡식에 상해를 입히는 자가 있을 경우에 군법(軍法)으로 논죄하도록 하였다.(『요사』권59식화지 상)
④ 백성의 수확량에 따라 각호마다 곡식을 내어 의창(義倉)에 두도록 하였다. (『요사』 권59식화지 상)"

  ①,②는 출병 시 곡식을 보호토록 한 것이고, ③은 벼 곡식에 상해를 입힌자를 군법에 처하도록 한 것으로 철저히 식량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을 알 수 있으며, ④는 곡식을 창고에 보관토록 조치한 기록으로써 이 모든 기록은 거란이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화되고 군사 행동에 있어서도 곡식을 확보하고 보호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요사』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출병(出兵)은 9월을 넘기지 않고 군사를 돌이키는 것을 12월을 넘기지 않았다."

  즉, 9월부터 12월까지는 추수기로 현지에서 곡식을 획득할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을 고려하였다는 점과 두 번째는 8월 이전에는 영농기 이므로 출병이 제한될 것이라는 점, 세 번째는 겨울이전에 철병하여야 군량보급에 제한이 없고, 다음해의 영농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 출병시기를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거란은 거란병사 1명에 타초곡(打草穀)1명을 배치하였는데 타초곡은 약탈을 통해 현지에서 양식과 마초를 구해오는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로 양식과 마초를 현지에서 구할 수 없으면 전투근무지원에 제한이되므로 이 제도 역시 출병시기와 연관되어 지는 것이며 세월이 흘러 농경사회형태가 심화됨에 따라 타초곡의 형태도 소멸된 것으로 보아 영농문제가 전쟁발발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란은 기동성을 중시한 유목민족의 특성으로 인해 침공국가의 수도까지 신속히 전진하는 속전속결 전략을 추구하였고,고려를 침공하기 이전 군사력면에서 중국대륙으로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통하여 비교적 전쟁경험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중국대륙으로의 영토확장으로 인해 유목민족 특유의 강한 군사적 성향이 농경사회의 접목으로 인해 군사제도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영농을 고려한 출병시기 조정, 곡식을 위주로 하는 전투근무지원체제로의 변화 등 군사전략에도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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