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對)거란 전략 판단 및 결정
  거란의 침공에 따라 전략목표 수립을 위한 고려의 전략판단 및 결정과정을살펴보겠다. 침공을 받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전쟁목적이었을 것이며, 이를 위해 고려는 전쟁을 통해 국가를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거란의 요구조건에 굴복할 것인가라는 전략목표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고려가 어떠한 전략적사고와 전략판단과정을 거쳐 전쟁을 택하고 강화를 택하였는지를 분석하겠다. 고려는 거란의 3번째 침공 시에는 1차와 2차 전쟁 시의 자신감으로 거란의 침공에 맞서 강화 협상 없이 전쟁만을 수행하였으므로 고려가 위기에 봉착하여 전략적 고민을 했어야 하였던 1차 전쟁 시와 2차 전쟁 시의 전략판단및 결정과정을 살펴보겠다.

1.1차 전쟁 시 서경 중신회의
  먼저,거란의 1차침공 시 고려의 전략 판단 및 결정과정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거란의 최초 침공 시 고려는 초기에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973년 5월에 여진이 거란의 침략을 알려주었는데도 고려의 조정에서는 여진이 고려를 속이는 줄 알고 대비를 하지 않다가 재차 여진의 통보에 10월이 되어서야 고려성종이 서경(평양)에 행차하여 전쟁을 독려하고,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량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계에 주둔하여 거란을 막게 하였다.
  거란은 고려를 침공한 이후 봉산성에서 최초로 전투를 하였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고려의 선봉군사(先鋒軍使) 윤서안(尹庶顔)을 포로로 잡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봉산성 전투에서 고려 군민(軍民)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투력에 심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이후 고려군의 봉산성 탈환 전투로 인해서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거란은 봉산성에서의 전투력 손실과 원정으로인한 장거리 기동으로 인해 더 이상 남진하지 않고 고려에 항복하라는 서한을 전달한다. 이에 고려의 조정은 항복 및 할지론자와 항전론으로 분열되었다. 최초 거란의 위협에 놀란 조정은 처음에는 항복 및 할지론이 우세하였다.

"임금께서 개성으로 환궁하고 중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합니다. 서경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로부터 절경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따라 성종은 항복 및 할지론을 염두에 두고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일부 백성들이 반발하여 곡식을 받지 않아 남게 되자 적에게 이용될까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지시하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조정 신하가 항복 및 할지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서희가 임금에게 아래와 같이 건의하였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싸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부는 군사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요, 다만 능히 틈을 보아 움직이는데있을 뿐인데 어찌 쌀을 버리십니까? 또한 거란의 동경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에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여진에게 점거되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등의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군사가 쳐들어 온 것도 그 두 성을 빼앗으려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 군사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대번에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이니 저들이 요구하면 그대로 주시겠습니까?"

  위와 같이 서희는 임금에게 아뢰며, 항전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민관어사 이지백(李知白) 역시 서희와 같이 항전을 주장하였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자손에게물려주어오늘까지이르렀는데한사람의충신도없어대번에 가벼이토지를적국에게주려고하니어찌원통하지않겠습니까?"

  이같은 서희와 이지백의 주장에는 당시 청천강 이북의 여러 지역에서 거란군과 싸우고 있던 고려 군민의 항전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거란침공 초기에 항전 및 할지론이 우세하였지만 고려 조정의 서희와 이지백 같은 중신과 대다수의 고려 군민(軍民)의 여론에 밀려 성종은 할지론과 항복론을 거두게 되고, 거란과 전쟁을 하는 항전론을 택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의항전론에 영향을 준 요소로는 국민의 저항의지를 들 수 있다. 앞서 제시한 것처럼 고려의 태조가 남긴『훈요10조(訓要十條)』라는 유훈에 의해 ‘금수(禽獸)와 같은 나라’로 표현된 거란은 배척해야 하는 나라라는 의식이 당시의 고려인에게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건국 당시 고려의 구성원은 발해유민을 포함한 고구려계 유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으므로 발해를 멸망시킨거란에 대하여 적개심이 높았고, 고려는 무력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던 만큼 국민의식의 저변에는 상무정신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상무정신을 가진 고려민들이 조정의 임금과 신하가 투항론을 주장하자 거세게 반발하였고,이러한 민심을 대변하여 서희와 이지백이 임금에게 건의하게 됨으로써 항전론으로 전략이 결정되게 된 것이다.
  이후 고려의 반응이 없자 거란의 소손녕은 계속 남진하여 안융진에서 전투를 치룬다.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의 중랑장 대도수와 낭랑 유방은 거란의 선봉부대가 주둔 중인 청천강 강안으로 기습 공격을 실시하여 거란의 전열을 교란시키고 강력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심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고, 예상외로강한 고려의 군사력에 놀란 소손녕은 황급히 군사를 거두어 청천강 북안으로철수하였다. 이후 고려의 추가적인 병력 증원과 방어태세 강화로 곤경에 처하게 된 거란은 강화협상에 더욱 매달리게 되고 항전론을 주장하였던 고려는 항전을 접고 협상에 응하게 된다.
  최초 봉산성 전투에서 패하였을 시에는 항전을 채택하였던 고려가 안융진에서 승리를 거둔 후 강화협상에 응하는 전략의 변화과정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변화과정은 고려 조정에서 전략을 택하는 과정과 이러한 전략을 택하는 속에 숨겨진 전략적 사고를 중점으로 연구하였다.
  고려의 조정은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중신들의 활발한 토의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란의 침략소식에 고려 임금 성종은 평양에서 어전 회의를 주관하여 여러 중신들의 의견을 들었다.『고려사』에서는 서희와 이지백의 항전론만 자세히 기술하고, 투항론과 할지론에 대해서는 서희의 계책에 대비하여 한심한 의견들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서희의 주장이 뛰어났음을 주장하기 위한 역사기술의 대비효과를 감안해야 한다. 특히,할지론을 주장한 당시의 조정 관료들이 거란에 대해 겁을 집어먹은 나약한 관료가아니라 나름의 논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즉 당시 고려의 주 방어선은 안북과 서경(평양)이었으며,압록강 이남은 주변 산성들의방어력이 약하여 돌파당하기 쉬웠고, 이후 방어선은 절령(자미령,황주남쪽)라인으로 형성되어 있으나, 이 역시 당시에는 거란의 대군을 막을 만큼의 방어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어차피 승산이 없을 바에야 절령 이북의 땅(청천강 이북의땅)을 떼어주자는 주장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항론과 할지론 주장에 대하여 서희와 이지백은 앞장에서 기술한것처럼 조목조목 반박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조정의 활발한 내부 토론을 거쳐 고려는 거란의 대규모 군사에 맞서 항전론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봉산성 전투의 패배이후 항전론을 채택하였던 고려가 오히려 안융진전투에서는 전쟁을 중지하고 협상을 택하였던 이면에는 이러한 활발한 내부의견조정을 거치는 과정에서의 전략적인 사고과정이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이러한 사고과정은 앞에서 제시한 게임트리에 의하여 분석하겠다. 전략적 사고는 상대가 나를 앞서나가려는 것을 인식하고 상대를 앞지르기 위한 전략을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략적 사고는 상대성과 함께 목적지향성을 지니게 된다. 전략적 사고의 목적 지향성이란,전략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므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즉 최종게임(endgame)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가장 유리한 상황인지를 판단하고 끊임없이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또한 거란 입장에서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므로 상대성을 고려해야한다. 이를 기초로 1차 봉산성 전투이후의 상황에 대한 게임트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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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봉산군 전투이후 게임트리

  봉산군 전투에서 패전한 고려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경우는 DC 즉 고려가 전쟁을 원하고 거란이 화친을 원할 경우로 비교적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중단할 수 있다. 반면 거란의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경우는 CD로서 고려로서는 거란의 요구에 응해야하는 불리한 상황이다. 또한 고려입장에서 최악의 경우는 DD로서 자칫 전쟁의 승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잿더미가 될 경우로서 차라리 할지론과 투항론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경우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희와 이지백은 유리한 입장을 점한 거란의 요구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간언하며 항전을 주장한다. 역사서에는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봉산성의 패배로 나라 전체가 대규모로 잿더미가될 수 있는 상황 하에서 굳이 항전론을 주장한 이면에는 임금과 조정 관료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서희의 전략적 판단 근거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판단 근거로 첫째는 80만 대군에 대한 의문이다. 80만 대군은 어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소손녕이 언급한 80만에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서희는임금에게 “지금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선뜻 이북 땅을 내어주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간하였다. 즉, 서희는 거란의 80만 대군에 대한 의문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서희는 31세 때에 내의시랑의 벼슬로 송나라 사신의 총책임자로 파견되어 송나라로부터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군대의 지휘와 관련 있는 명예직을 수여받는다. 그만큼 서희가 당시에 군사적인 식견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사실이며, 이렇게 송나라 사신을 다녀온 국제적 경험과 군사적 식견을 활용하여 당시에 송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거란의 군제(軍制)와 전술을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거란의 원정군 편성은 왕이 친정할 때 통상 30〜40만의 대군이 동원된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2차 침공 시 거란의 황제인 성종이 친정하였음에도 병력은 40만이었으며, 1004년 송나라 침공 시에도 20만을 동원하였을 뿐이다. 더구나 중신도 아니고 동경유수인 소손녕이 지휘하는 부대가 80만 대군이라고 한 것에 충분히 의심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지역 유수가 지휘하는 전쟁의 목적은 전면전이 아닌 특정한 목적을 지닌 국지전이었음을 간파하였을 것이다.
  두 번째는 거란과 송나라의 당시 정세이다. 당시는 연운 16주(지금의 북경지방에서 산서성 북부에 걸쳐있는 지역)를 놓고 송나라와 거란이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군사가 고려에 배치되어있는 상황에서 송나라가 배후에서 거란을 침공하면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거란 내부적으로 어린 성종이 즉위하여 모후 승천 황태후가 섭정을 하는 가운데, 농경파와 유목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고려를 침공하기 직전인 986년에 송나라 태종이 연운16주를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려와의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것이다. 송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희는 송과 거란의 정세와 군사적 대립관계를 충분히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소손녕의 모순된 요구조건이었다. 거란은 자칭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하면서도 오직 ‘항복’만을 원할 뿐 다른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다. 또한 소손녕이 침공의 이유가 민사를 돌보지 않는 것, 즉 ‘부휼민사(不恤民事)’라는 것은 천자가 자신에게 사대하는 인접국에 대한 거론이다. 즉 80만 대군을 들먹이며 군사적으로 위협하였다가 강화를 위해 온 사신에게 천자로서 국왕의 임무를 문제 삼는 행태에서 전쟁을 통한 고려의 멸망보다는 화친의 가능성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3가지 요인을 근거로 고려는 거란이 고려의 영토 확보와 섬멸과 같은 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고려와의 전면전을 치루지 않을 것이라는것을 간파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판단 하에 봉산성 전투에서 패하였다는 이유로 강화협상을 하면 거란의 요구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는 거란에 대하여 항전을 택한 것이다. 봉산성 전투이후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협상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자 고려는 그제야 거란과의 강화협상에 나섰다. 안융진 전투는 고려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인 산성전투가 아니고 청천강을 넘어온 거란군과 평지에서의 싸움이었다. 평지에서 전투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기병부대 위주의 거란군이 보병위주로 구성된 고려군에게 패한 것은 거란군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며, 고려에 대한 전의가 많이 상실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또한 단기 속전속결 전략을 구사하는 거란에게 당시의 전투 시기는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로서 현지에서 보급물자를 해결해야 하는 거란으로서는 대규모 군사를 유지하기 위해 전투근무지원의 어려움이 증대되는 시기였다. 또한 고려의 강력한 산성을 피하는 우회전술로 인해 발생하는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을 우회한 산성의 요지에 남겨둠으로써 부대 대형의 종심이 깊어져 협조된 작전과 퇴로 확보의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더하여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송나라보다 멀리 떨어진 고려에 대규모의 병력을 장기간 체류시킬 수 없는 심정적인 불안감도 증가하는 시기였다.
  한편 고려의 입장에서는 안융진 전투이후의 자신감에 더하여 이러한 거란의 취약점을 식별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상황에서 강화 협상을 할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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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안융진 전투이후 게임트리(Game Tree)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거란이 전쟁을지속하는 경우(DD)를 회피하려고 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결과적으로 봉산성 전투 이후 협상을 하였다면 고려가 거란에게 항복하고 청천강 이북을 최소한 내주어야만 전쟁을 중지 시킬 수 있었겠지만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의 협상은 고려가 주도적으로 협상할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이다. 고려는 거란과의 상대성을 고려하여 봉산성 전투이후 불리한 상황을 가장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고 난 이후 강화협상을 한 것이다. 전쟁을 중지하고 강화협상을 한 시점이 고려의 국익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시점에 강화협상을 실시한 것이며, 이는 현대의 전략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운 바 없는 고려인들이 그들만의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낸 결과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시점에서 강화협상을 한고려는 협상의 결과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조빙을 하는 대신 압록강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강동 6주를 얻음으로써 고려의 국경을 청천강 북방에서 압록강까지 넓힐 수 있는 기틀을 잡았다. 고려는 전략적 사고와 판단을 통하여 봉산군 전투이후 청천강 이북의 영토를 내 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거란과 맞서싸우는 전략을 선택하고 이어서 안융진 전투에서의 승리한 시점에서 강화 협상을 선택함으로써 거란의 대규모 군사를 물리치고 오히려 영토를 확장하기까지 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2.2차 전쟁시 고려 현종의 이경(離京)및 대피(待避)
  다음은 거란의 성종이 친정한 2차 전쟁 시 개경함락의 위기에서 고려의 전략 판단과 전략 결정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다.
  거란이 강조(康兆)가 거느린 고려의 방어군 주력부대를 돌파하고 삭주를 거쳐 청천강을 도하할 즈음인 12월 9일에 고려는 거란 측에 국왕의 거란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강화를 제기하는 한편 거란이 남진할 수 있는 통로인 서북계 남북의 모든 진영과 청천강 이남지역에 방어태세를 공고히 할 것을 명하였다. 고려의 강화제의에 거란의 일부 장수들이 화의 교섭을 반대하기도하였지만 거란 임금 성종은 고려가 거란의 위세에 눌려 완전히 굴복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고려 측의 강화제의를 수락하였다. 고려의 강화제의를 수락한 거란은 마노우와 왕팔을 사신으로 고려에 보냈으나 서경(西京:평양)성을 방어하던 고려군에 의해 기습 공격을 당하여 화의가 결렬되었다. 이후 12월 26일 거란군은 서경을 떠나 개경을 향해 남진하여 왔다.이에 고려조정은 조정이 개경을 포기하자는 파천론(播遷論)과 거란과 화의를 맺자는 강화론(講和論)으로 의견이 분열하였다. 강화론을 주장하는 조정의 신하들은 조정이 개경을 포기하고 파천할 경우 청야작전(淸野作戰)을 전제로 한 장기항전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는 곧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거란군이 이미 개경근교까지 육박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더는저항하지 말고 거란에게 항복을 조건으로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강감찬(姜邯贊)을 비롯한 일부 장수들은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의 형세가 너무나 강성하여 지금으로서는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지금은 그 예봉을 피하고 훗날을 도모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거란의 예봉을 피하여 임금이 피난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고려의 현종 임금은 소수의견인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비를 비롯한 일부의 왕실인원을 거느리고 나주까지 대피하고 고려는 개경을 내주면서까지 항전하는 것을 택하였다. 이렇듯 개경함락의 위기 속에서 소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항전을 택하였던 고려의 전략선택에 영향을 준 요소는 먼저거란과의 1차 전쟁이 종결된 이후 998년에 경군(京軍)이주력인 육위(六衛)를 정비하여 군사체제를 확립하였고, 성종때 후반부터 북방지역에 대한 축성을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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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성종시대 성곽축조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종 때 초기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북방지역의 성곽축조가 활발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종 12년 거란의 1차 침입이후 적극적인 성곽축조가 이루어졌고, 이는 이후 서북면지역의 변경구축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음은 검차라는 신무기의 활용이다. 정확히 언제 개발되어 있는지는 나와있지않지만 용주 방어선 전투 등에서 활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검차에 대한 기록은 송규빈의『풍천유향(風泉遺響)』에서 구조와 형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검차는 길이가 9자쯤 되는 두 개의 나무를 가지고 수레채를 만들며, 앞뒤에는 나무를 가로대고 축을 받게 하여 외줄의 두 바퀴를 달며, 그 위에 판자를 깐다. 그리고 두 수레채의 중간 부분에 각각 바퀴 하나씩을 달아 속에 넣어 두었다가 수레를 끌고 갈 때에는 두 개의 바퀴만을 사용하고, 수레를 멈추고 있을 때에는 속에 넣어두었던 두 바퀴를 내려 네 바퀴를 이용하게 한다. 수레채 맨 앞에는 예리한 칼날을이중으로 꽂아 놓으며, 짐승의 얼굴 모양을 단 세 겹의 방패를 설치한다. 이렇게한다면 군대가 아무리 곤경에 빠진다 하더라도 어찌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군사제도의 정비와 북방에 대한 성곽축조,검차 등 신무기의 활용은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여 항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고려군민의 저항의지도 높았다. 흥화진에서 서경에 이르기까지 주요 거점지역의 모든 전투에서 군인과 일반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전투를 하였으며, 특히 작주전투에서는 작주 방어군의 수장인 조성유가 야음을 틈타 성 밖으로 도망간 상황에서도 성안의 군인과 일반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거란군의 공세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최후를 맞기도 하였다. 또한 서경성 전투에서는 승장(僧將)범인이승병부대를 편성하여 방어의 일익을 담당하는 등 고려인들의 저항정신은 집요하였다. 거란의 침입에 맞서서 항전론으로 거란에 맞섰던 고려의 전략 채택에는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과 국민의 저항의지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음은 거란의 2차 침공 시 고려가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될 위기 속에서도 항전론을 채택한 전략적 사고과정을 살펴보겠다. 거란의 황제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거란의 최초 침공 시와 마찬가지로 투항론과 항전론이 치열하게 다툼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 조정에서 투항론이 가장 우세하였던 시기는 서경이 피탈당한 이후의 시점이다.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였다."

  서경이 함락되기 이전에도 거란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고려의 조정은 거란에 맞서 항전하였고 서경이 함락된 이후에야 투항론이 본격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항론도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감찬은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부흥을 도모해야 합니다.”라고 왕에게 권하였다.또한 지채문 역시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지만 원컨대 좌우에서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따라서 고려는 서경이 함락되고 수도인 개경이 함락될 위험 속에서도 항전론을 채택하였다. 이렇게 항전하던 고려는 국왕이 남쪽 나주까지 대피하고 개경이 거란에게 함락된 이후 거란에 강화를청하고 거란은 이를 받아들여 1011년 1월에 철수하게 된다.거란의 최초 침공때와 동일하게 거란의 위세가 팽배할 때는 항전하다가 어느 정도 거란의 전투력이 소진되었을 때 강화를 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경 패전 이후의 상황에 대한 게임트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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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서경 전투이후 게임트리(Game Tree)

  서경전투에서 패하고 수도인 개경까지 내준 처지에 있던 고려는 전쟁을 계속하여 전국이 잿더미가 되는 것이 최악의 경우이지만, 거란이 전 국토를 잿더미화 하는 전쟁을 치루지 않을 것이란 전략적 사고가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즉 개경까지 거란군이 진출하면서 귀주와 서경에서 병력 손실이 있어 고려임금을 추적하여 전 국토를 황폐화시키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이라는 점과 거란 성종의 친정이유가 강조의 체포에 있었던 만큼 강조가 체포된 상황 하에서 명분 없는 고려와의 장기적인 전쟁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것이다. 결국 개전 초기에 거란의 전세가 우세한 상황 하에서 강화를 맺으면고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감찬도 “거란의 예봉을 피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후에 1011년이 되어서야 고려는 “거란이 고려 영내에서 철군하면 고려 국왕이 거란에 입조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거란에 강화를 제의하였고 거란의 성종은 이를 즉각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를 게임트리화 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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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현종의 대피이후 게임트리(Game Tree)

  거란이 회피하고자 한 것은 DD의 경우로 고려 침공을 개시한 이후부터 도처에서 고려 군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전투 손실을 입게됨에 따라 전투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므로 군사들이 더 이상 전의를 잃기 전에 철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거란의 황제가 친정하였음에도 고려 임금의 직접적인 항복을 받지 못하고 고려 신하인 하공진 일행의 강화조건을 받아들여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장기간의 원정과 고려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시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거란의 사정을 정확히 간파한 고려는 적절한 시점에 강화를 제의하여 거란의 철군을 얻어낸 것이다. 즉 2차 전쟁에서도 고려는 전략적인 판단을 통하여 유리한 시점에서거란과 강화를 하였다.
  다음은 3차 전쟁 시 고려의 항전과 영향요소이다.고려는 거란과의 2차 전쟁 이후 거란의 친조 요구와 강동 6주 반환을 거절한다. 2차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친조는 거란의 철수를 유도하기 위한 고려의 책략이었으므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또한 강동 6주는 청천강 이북의 방어요충지라는 군사적 가치 외에 여진족에 대한 통제라는 측면에서 정치적인 중요성도 매우높았다. 고려가 거란의 요구를 일축한 것은 앞선 거란과의 전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결과이며, 동시에 거란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한 방어전략을 수립하고 군사대비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거란과의 3차 전쟁이전에 북방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였다. 즉 압록강 이북의 북방민족이 귀순해오자 이들을 활용하여 국경지역의 변방수비를 강화하였으며 용주, 철주, 안의진 등의 요충지에 성곽을 축조 또는 개축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앞서 치룬 거란과의 전쟁에서 얻은 자신감과 거란군에 대한지속적인 방비 노력으로 전승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거란의 3차 침공시에는 강화 제의없이시종전쟁을 치렀다.
  거란과의 3차 전쟁 시 전략 결정과정 분석은 1차와 2차의 전쟁에서 얻은자신감으로 침공한 거란에 맞서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지않았으므로 분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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