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對)거란 전쟁수행 전략
  이번 절에서는 전략의 요소 중 하나인 방법측면에서 고려의 전략을 분석하겠다. 클라우제비츠가 전략이란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투를 운용하는기술이라고 하였듯, 당시 동북아의 신흥강국이었던 거란과 맞서 국가의 보존이라는 전쟁목적을 위해 싸워야 했던 고려의 전쟁수행 전략에 대해 분석하겠다. 고려의 전쟁수행 전략에 대해 역사자료에 나타난 사실은 없다. 따라서 수 회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에서 특징적인 요소를 도출하여 조명해보겠다. 신속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속전속결을 추구하는 거란군에 대응하여 고려군은 ‘청야전술과 산성입보 전략으로 서북계 요진에서 수성전을 펼쳐 거란군의 남진을 지연하는 동안 중앙에서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하여 반격을 가하는 형태로 전쟁을 수행하였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연구결과와고려의 전쟁 사실을 근거로 현대의 전략개념을 바탕으로 고려의 전쟁수행전략을 살펴보겠다.
  고려의 전략은 거란군을 고려의 영토내로 끌어들인다는 측면에서 역내 방위전략으로 분류 할 수 있으며 또한 군사력이 제한될 때 주로 사용하는 지구전 전략으로도 구분 할 수 있다.
  역내방위 전략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시에 러시아가 사용한 전략으로 러시아는 드넓은 영토에 비해 도시일지라도 한촌(寒村)에 불과하여 식량은 물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구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이를 이용하여 러시아는 프랑스 군을 자국의 영토 내로 깊숙이 끌어들였으며,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러시아를 복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로 러시아 영토내로 깊숙이 침공하여 갔으나, 러시아의 혹한과 전투근무지원물자 획득의 어려움으로 프랑스군은 궤멸되었다. 또한 지구전 전략은 나폴레옹의 스페인 원정시 스페인에 의해 게릴라전을 중심으로 수행되었으며, 모택동 역시 공산 혁명과일본군과의 전쟁에서 사용하였던 전략이다.

1.청야(淸野)에 기반 한 역내방위 전략
  고려는 거란의 기마를 이용한 기동전에 맞서 한반도 북부의 험한 지형을이용하여 거란의 전투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역내 방위 전략 수행을 위해 고려는 청야 및산성입보 작전을 택하였으며, 이는  고구려가 수와 당과의 전쟁 시 적용하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고구려는 중국 대륙국가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하에서 수도인 평양까지 고구려를 침공하는 나라가 이용할 수 있는 접근로를 중심으로 각 길목마다 주요 거점에 성을 구축하였다. 즉,중국대륙의 수와 당나라의 군대가 고구려를 정벌시 이용할 수있는 요하일대와 요하를 건너 중국의 군대가 지날 수 있는 천산산맥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이어지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기동로 및 내륙기동로 등에 다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다중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기동로를 따라 중첩되어 구축된 고구려의 성들은 개별적으로 방어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방어망을 갖추었다.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한 당의 군대가 요동지방의 요동성과 백암성을함락시키고도 압록강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던 것은 당군의 후방에 위치한 안시성이나 건안성의 군대가 보급로나 퇴각로를 차단 할 경우 위기에 빠질 수있었기 때문이다. 수와 당의 군대는 혹한의 날씨를 고려하여 3, 4월에서 9월까지 약 4-5개월만 군사 활동이 가능하였으므로 고구려군은 험준한 성을지키면서 성곽전투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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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고구려 성의 분포

  여기에 수와 당으로서는 신장된 병참선으로 인해 전투근무지원에 취약점을 노출하였고, 고구려는 이러한 취약점을 이용하여 주민과 식량을 모두 성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청야작전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는 이러한 성을이용하여 침략한 나라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면서 자기 영토내로 깊숙이 끌어들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고려 역시 고구려의 영향으로 한반도 북부의 양계에 설치된 군사거점인 성곽을 활용하여 청야 및 산성 입보전략으로 적의 전투력이 약화된 상황에서고려 조정에서 동원된 중앙군이 주진군과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거란군을 타격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1)청야(淸野)및 산성입보(山城立保)
  먼저 고려의 역내방위전략을 구현하기 위한 청야 및 산성입보전략에 대해 살펴보겠다. 중국 북방민족인 거란은 앞서의 거란군 전법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부대를 주축으로 속전속결의 단기 전략을 중요시하였다.

"거란의 예전 풍습은 부(富)는 말(馬)로 측정하고,그 강성함은 병력(兵)으로 측정하였다.(중략)말은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쫓아 이동하고 사람들은 말의 젖에 의존하며, 일용품을 보급받기 때문에 식량과 말 먹이는 길 곳곳에 널려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장점을 가지고 적을 제압하여 승리하기 때문에 향하는 곳마다 적대할 자가없었다(『요사』 권59 식화지상)"

  즉, 현지에서 언제든지 보급조달을 할 수 있다는 기록이다. 따라서 거란군은 원칙적으로 출동한 병사 각 개인이 군량을 소지하도록 하였으며, 개인이 소지한 군량과 마초가 바닥이 나면 보급 임무를 담당하는 타초곡기(打草穀騎)가 출동하여 적지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양곡과 마초를 약탈하여 전투근무지원이 지속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거란의 전술에 대항하여 고려는 자신들이 방어할 군사기지 안에 충분한 식량과 물자를 확보해 놓고, 현지조달에 의존해야하는 거란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획득할 수 있는 식량과 물자를 획득할 수 없도록 거란의 공격전에 일정한 장소로 옮기거나 이동이 불가하면불태워 없애는 전법,즉 청야(淸野)작전을 구사하였다. 고려의 청야작전과 관련된 사실로서 거란과의 1차 전쟁 시 봉산군 전투에서 거란군에 패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 위축되어 항복론과 할지론이 조정에서 팽배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 임금 성종은 거란에게 항복하는 것보다는 서경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떼어주고 황주에서 절경까지를 경계로 삼자는 할지론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할지론에 따라 성종은 서경의 창고를 방출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남는 것은 강물에 던져 거란의 식량이 되지 않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또한『고려사』에 청야(淸野)라는 용어가 직접 언급된 것은 3차 전쟁인 1019년 1월 3일 거란군이 개경 북쪽 100리 지점의 신은현에 도착하자 고려군은 거란군의 남진에 대비하여 개경성외의 민호를 성내로 이주하고 청야전술을 실시하여 장기전에 대비토록 한 사실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고려사』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타나있다.

"소손녕이 신은현에 도달하니 개경과의 거리가 1백리였다. 왕은 명을 내려 성 밖의 민호를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들판의 곡식을 다 거두었다."

  또한『고려사절요』에도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소손녕이 신은현에 도달하니 개경과의 거리가 1백리였다. 왕은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철거하여(淸野)적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왕이 직접 청야작전을 명하는 것이 나와 있는데, 그만큼청야작전이 주진을 지키는 군의 지휘관뿐만 아니라 고려의 국왕까지도 결정하고 시행하는 작전일 만큼 중국 북방민족인 거란에 대항하는 주요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청야작전은 뒤에서 언급할 산성입보와 통합하여 거란군에게 대항하는 주요 작전이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사료에 언급된 것은 적지만 최초 거란이 침공하였을 때 서경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누어 준 사실과 3차 전쟁시 개성 주위의 모든 백성을 성안으로 들이고 성 주변을 초토화시킨 사실로 비추어 보아 거란과의 전쟁시 청야작전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거란의 최초 침공부터 마지막 침공인 3차 전쟁시까지도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거란과의 전쟁기간 내내 청야작전이 지속적으로 수행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청야작전이 거란군에게 어떠한 효과를 발휘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래는 거란의 2차 고려 정벌시 『요사』의 야율요질에 관한 기록이다.

"고려의 현종이 항복을 빌자 여러 신료들의 의견들이 모두 당연히 받아들어야 한다고 말하였다.야율요질이 이르기를 ‘왕손이 처음 한 번의 싸움에서 패하자 대뜸항복을 받아주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그들의 꾀에 떨어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윽고 왕순은 도망치면서 청야(淸野)작전을 구사하여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들 군사들은 험한 지형에 의지하고 보류를 구축하여 공격으로는 함락시킬 수 없었다."

  여기서 거란에 의해 ‘청야’라는 단어가 직접 언급되고 있으며, 이 청야작전과 험한 지형에 의지한 산성입보로 공격이 실패하였다고 토로하는 것이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청야작전이 개별전쟁에서 영향을 미친 것은 기록된 것이 없지만, 거란군에게는 심적으로나 군사 행동면에서 타격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청야작전은 산성입보와 병행하여 운용됨으로써 거란군의 남진에 제한을 주었다. 산성입보는 견벽고수(堅壁固守)와 인병출격(引兵出擊)을 통해 거란군에게 타격을 주었는데 이와 관련한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거란군의 침공에 맞서 가장 먼저 전투를 치루는 지역이 서북계에 위치한 주진군(州鎭軍)이다. 한반도의 서북부 지형은 산세가 험하고 애로지역이많아 기동로가 제한적이었으므로 돌로 쌓은 산성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않은 백성들의 피난처이자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사들이 이용할 수있는 최적의 전쟁터였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러한 성곽 내에는 적의 포위에도 장시간 대처하기 위한 추가적인 시설을 설치하였는데, 군량 창고는 물론 성두(城頭)나 차성(遮城:이중성벽이나 옹성), 첨원 등의 성곽 방어시설물을 구축하였다.『고려사』에는 이러한 성곽 방어에 대하여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의 진위부위 호장 김거와 별장 수견이 경술년(현종원년,1010년)거란군의 내침때 성을 철저히 고수하여 잘 방어한데다 거란의대부마수까지 사로잡았으므로 김거를 낭장으로 승진시키고 수견에게는 낭장을 증직하였다”고 하였다. 덕종 원년인 1032년에 발생한 일이지만 거란과의2차 전쟁 시에 공을 세운 것을 포상하는 내용이므로 거란과의 전쟁 시 견벽고수(堅壁固守)전략이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이후 서북부에서 반란이 발생하였던 때에도 『고려사』에 ‘견벽고수’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성곽을 활용한 견벽고수 전략이 고려군이 북방의 중국민족에 대항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견벽고수 전략에 의한 전쟁사례로는거란의 2차 침공 시 실시하였던 흥화진 전투가 있다.성종14년에 서희가 개척해 성을 쌓은 흥화진은 조선시대에는 백마산성이라 불렸으며,봉우리 높이가 170m내외이지만 시계가 좋고 경사도가 가팔랐다. 성곽은 이러한 정상부의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견고하게 쌓았으며, 안쪽에도 내성을 쌓아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또한 흥화진은 풍부한 수원으로 장기 농성전도 감당할 수 있었는데 성안에는 내성에 32개, 외성에 3개의 우물이 있었다. 거란군은 1010년 11월 17일부터 23일까지 7일 동안 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결국 성종이 인솔한 40만의 대군 중에서 20만을 흥화진 인근에 있는 무로대에 남기고 남진을 하게 됨으로써 전력의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남진을 하게된 거란군은 12월11일부터 26일까지 서경성에 대해서도 수십 차례의 공격을가하였으나 끝내 서경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조기에 개경으로 남진 하려던 거란군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이렇듯 거란과의 전쟁에서서북계의 군사요새는 견벽고수 전략에 의한 방어력 발휘로 거란군의 공격을지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고려는 효과적인 성곽고수를 위해 오늘날의 전초기지 개념의 수(戍)를 설치하여 운용하기도 하였다. 수에 대한 기록은 “위화(의주)까지 여진의 잔당들을 잡으러 온 거란 군인들이 고려의 수(戍)를지키는 초병에게 여진족을 잡아가는 이유를 설명 하였다” 고 한 것, “최충이 북계의 영원과 평로(희천,신풍)에 성을 쌓았는데 영원성은 구역안에 금강수(戍)를 비롯하여 8개, 편노성에는 구역안에 도융수(戍)를 비롯하여 6개의 수(戍)를 쌓았다고 하였다.” 고 한 근거가 있다. 영원과 평로의 두 진에 성을 쌓았고 그 구역 내에 40~50칸 내외의 수(戍)를 쌓았다는 기록에서 소규모의 전초(前哨)시설을 구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035년의 성곽 구축기록이므로 30여 년 전의 거란 침공 시에도 성곽 구축 시 수(戍)가 병행하여 구축되어 활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의 기능은 앞에서 제시한 전방의 동태를 감시하는 임무 외에도 전방에 추진된 소규모의 전투초소로 운영되어 적의 접근을 경고하고 적과 제한된 전투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는 성안에서 견벽고수 전략만 채택하지 않았다.적정에 따라 인병출격(引兵出擊)하여 적을 괴롭히는 작전을 동시에 벌였다. 1차 전쟁시 안융진전투에서 발해가 멸망 후 귀화해 온 발해왕자 대광현의 아들인 중랑장 대도수와 낭랑 유방은 평지에서 거란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안융진은 비록 둘레가 약 755m, 높이 4.5m 규모의 작은 도성이었지만, 성을 고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출병하여 거란군을 격퇴시켰다. 여기에는 ‘대도수가 이끄는 발해유민이 많아 야지전투에 익숙하였을 것이며, 청천강을 도하하는 거란군을공격하기 위해 출격하였다’는 연구도 있지만 고려군이 인병출격 하여 거란군을 격퇴하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또한 2차 전쟁 시에 흥화진 전투에서 흥화진의 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등이 거란군의 후미를 기습해 7백 명을 죽였다는 사실도 인병출격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거란군의 속전속결의 기동전에 대항하여 고려는청야(淸野)작전으로 거란군의 전투근무지원에 지장을 주고 산성입보(山城立保)로 생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견벽고수(堅壁固守)로 적의 전진을 저지하고, 수(戍)를 운용하여 적정에 대한 탐지와 전초기지활용으로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적정에 따라 인병출격(引兵出擊)하여 적을 괴롭히는 공세적인 수세작전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2)중앙군과 주진군의 결합
  고려는 거란의 침공을 북계에 전개된 주진군이 청야와 산성입보로 거란의남진을 저지하도록 하면서 조정에서 동원된 중앙군이 주진군과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결정적 작전을 수행토록 하였다. 고려는 건국이후 줄곧 자국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북쪽지역에 군사거점지역인 진(鎭)을 설치하고 성곽 등 군사요새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서북방 일대는 거란과의 전쟁이전에 50여 개소에 이르는 성이 신축 또는 개척되어 청천강을 중심으로 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거란과의 1차 전쟁 이후 서희는 압록강 주변의 여진을 구축한후 994년부터 996년까지 압록강 일대에 6개의 성과 선주(평북 동림), 맹주(평남맹산)에도 성을 쌓았다. 고려는 이러한 서북계의 요새화된 진(鎭)을 이용하여거란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동안 중앙에서 대규모 중앙군을 파견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2차와 3차 전쟁에서 구현되었다. 거란과의 2차 전쟁이었던 1010년 11월 26일 거란 성종이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하여 고려와 처음 맞부딪힌 지역은 흥화진이었다. 이 흥화진은 고려와 거란의 국경인 내원성 남쪽으로 159m지점에 있는 산성인데 여기서 고려는 16일부터 22일까지 7일간 거란을 지연시켰다. 흥화진 함락에 실패한 거란군은 주력부대 20만 명을 인주(평북 의주)남쪽의 무로대에 주둔시킨 후 남진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흥화진에서 거란군의 침공을 저지하는 동안 강조가 이끄는 중앙군이 통주일대에 전개하여 성종이 이끄는 거란의 정예 20만 대군과 일전을 치르게 된다.『고려사』에 나타나 있는 사실은 아래와 같다.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394)상장군 안소랑을 행영도병마사,소부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각각 임명해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에 진지를 구축하여 거란의 침략에 대비토록 하였다."

  즉 10월 1일에 임금의 동원령이 내려졌으며,통주를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토록 명령이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강조의 출병과 관련하여『고려사절요』에는 “현종 원년(1010년) 11월 기해일에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가 군을 세부대로 나누어 진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음으로써 중앙군이 동원되어 통주성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는 이 기해일에 강조가 검차를 이용하여 거란과의 싸움에서승리하였으나, 방심하여 사로잡히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중앙군이 동원되어 전개한지 하루 만에 여러 차례의 전투를 하고 방심하다가 사로잡힐 수는 없을 것이므로 실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의 전개 시기는 이보다 앞서서 전개를 완료하였을 것이다. 즉, 10월1일 동원령이 선포된 이후 강조가 통주성에 배치된 것은 11월 기해일 이전이었을 것이므로 고려의 현종임금이 동원령을 내린지 30여일 만에 병력이 동원되어 이동 및 배치까지 완료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원된 병력은 앞장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6위의 중앙군과 남부지방의 주현군의 일부 군사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중앙군의 전방지역 동원은 거란과의 3차 전쟁 시에도 시행되었다.

"거란의 소손녕이 10만을 이끌고 침략하자 고려의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에 주둔토록 하였다."

  위『고려사절요』의 기록에는 20만 8천 3백 명이라는 구체적인 동원병력의 숫자가 나타나고 있으며, 다만 동원되자마자 전투 배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동원 소요일자는 판단할 수 없으나, 신속히 동원되었다는 것은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중앙군이 동원되어 서북계의 진(鎭)으로 투입된 것과는 별개로 동계(東界)의 병력이 북계로 전환하여 전장에 투입된 사례도 있었다. 거란과의 2차 전쟁 시 고려 조정은 강조가 통주에서 패하자 동북계의 방어군을 서경 동쪽 120리 지점인 성천 강덕진으로 옮겨 거란군의 공격에 대비토록 하였다.

"왕이 거란군사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중랑장 지채문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화주(함남 영흥군)를 지켜 동북방을 방비하게 하였다.강조가 패하자 지채문에게 명하여 군사를 옮겨 서경을 구원하게 하니 지채문이 즉시 시어사 최창과 더불어 강덕진(剛德鎭:평남 함천군)에 머물렀다."

  즉 동북계에 배치된 군사를 서북계로 전환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위해 서북계의 주진군이 거란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동안 국가의 모든 가용병력을 동원하여 거란과 일전을 치렀던 것이다. 주진군에 의해 거란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가운데 후방에서 동원된 중앙군에 의해 거란군을 격퇴시키는 전법과 병행하여 이와는 반대로 동원된 중앙군에 의해 거란군을저지하는 사이에 북계의 주진군에 의해 거란군의 측후방을 타격하고, 피탈된 성곽요새를 탈환하는 작전도 사용하였다. 2차 전쟁 당시인 1010년 12월 17일에 도순검사 양규가 흥화진과 통주의 군사를 이끌고 곽주성을 공격하여 거란군에게 점령된 지 열흘 만에 곽주성을 재탈환 한 사실이 있다. 거란군에게 패한 강조가 이끄는 중앙군의 일부는 통주성 고수에 기여하였으며, 이들 중일부는 양규가 이끄는 군사에 포함되어 거란군에게 점령되었던 곽주를 탈환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곽주에 주둔한 거란군은 6천여 명의 규모였으므로 양규가 이끄는 흥화진의 주진군과 통주성에 있던 1천여 명의 중앙군의 협동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통주성에 중앙군의 일부가 남았던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은『고려사절요』에 나와 있는 고려 중앙군의 최초 지휘부편성과 완항령전투에서 승리한 장수들 중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한 명단을 비교하여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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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거란과의 통주성 삼수채 전투 생존장수

  위의 표에 최초 편성된 고려군 지휘부의 장수 중 장현우, 안소광, 최현민, 이방, 박충숙 등은 거란군에 의해 사망 또는 포로로 된 기록이 없고, 특히 최현민은 좌군 병마사, 이방은 우군 병마사, 박충숙은 종군 병마사로 삼군의 주요 지휘관인데 거란군에게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힌 기록이 없으므로 이들 지휘관이 이끄는 고려의 정규군 일부는 통주성 방어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거란 임금이 개경으로 침입해 궁궐을 불사르자 주진군인 귀주별장 김숙홍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만여 명의 거란군 목을 베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진군과 중앙군의 유기적 결합을 통한 전쟁수행은 거란과의 개전초기에는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지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1차 전쟁시에는 중앙군의 투입이 지연되어 전쟁의 승패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하였으며, 2차 전쟁 시에는 중앙군의 총사령부가 있던 통주성에서 거란군에게 패함으로써 거란군의 남진을 허용하였다.통주성에서 고려의 주력군이 패함으로써 이후 12월 8일에는 안주성이, 그리고 12월 10일에는 숙천이 함락되어 거란군이 서경까지 비교적 쉽게 기동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고려사절요』에는 강조가 거란과의 처음 전쟁이후 바둑을 두는 등 강조의 안이한 전쟁상황 인식으로 강조가 패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훈련하고,전쟁을 경험한것이 부족한 당시의 고려군 전투수준이다. 이러한 실태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로 1002년 5월 목종이 내린 교서의 내용이 있다.

"편안한 환경에서 위대한 때를 생각하며 깊은 물가에 다달은 것처럼, 엷은 얼음을밟은 것처럼 조심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토목사업을 광범위하게 일으켜 군인과 장정들에게 노력을 시키며(중략), 그것은 군인들의 원망을 일으켰고(중략), 이러한 때에 만일 군대를 모아 훈련할 일이나 적국이 침입하고 우리가 정벌하여야할 일들이 생긴다면 장차 어디서 용사를 구하고 어디서 사람을 얻겠는가?"

  즉, 6위의 군인들이 잡역에 동원된 사례를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군인들의 불만이 높았던 것과 갑작스런 전란발생 시의 병력동원에 대한 걱정을 목종이 하였던 기록이 있다. 이 교서를 내린 1002년은 고려가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여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중앙군의 사정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즉 거란의 2차 침공 8년전 까지도 대병력의 전술적 운용과 같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거란의 침공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였어도 평상시의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아 강조가 거란에게 패하였던 하나의 원인일 수 있었으리라 유추할 수있다. 이는 거란군의 기습돌파를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 내에 강조의 군대가 궤멸되었던 사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거란과의 1차와 2차 전쟁초기에는 주진군에 의한 전투와 소규모 전투에서는 거란군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대부대 전투에서는 중국 대륙을 석권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대부대 전투를 경험한 거란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그러나 거란과의 전쟁이 지속될수록 고려군의 주진군과 중앙군이 통합한 대부대 전투수행능력도 향상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거란과의 3차 전쟁 시에 있었던 귀주대첩이다. 개경함락에 실패한 거란군은 북쪽으로 철수하는 도중에 1019년 2월 귀주성 평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감찬의 명에 의해 거란군을 뒤쫓던 김종현이 이끄는 1만 병사가 거란군의 후미에서 기습을 실시하여 거란군은 지리멸렬하게 되고 때마침 부는 강풍과 비속에서 고려군이 돌격을 감행하여 거란군을 궤멸시켰다.
  3차 전쟁에 대해 『요사』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소배압 등이 다하와 타하에서 고려와 싸웠는데,요나라 군대의 전세가 불리하였다. 천운군과 우피실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고, 요령장상 온아라달, 객성사 작고, 발해상온 고청명, 천운궁상온 해리 등은 모두 죽었다”

『요사』에 이렇게 자국의 패전을 기록한 것이 흔하지 않고, 특히 전사한 주요 장수까지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전쟁의 피해는 상당하였을 것이다. 비록 공격 기세가 꺾여 철수하는 거란이었지만, 거란과의 최초 전쟁이후 처음으로 대군과의 싸움에서 고려가 완승한 전쟁이었다. 이는 당연히 귀주일대에 있던 주진군과 강감찬이 이끄는 중앙군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당시 동북아 강국이었던 거란에 맞서 전력이약하였던 고려는 대표적인 수세전략인 역내방위 전략으로 강력한 거란의 군사력에 대응하였다. 고려는 청야에 기반 한 성곽전투를 통해 거란군의 전투력과 전쟁지속능력을 약화시키면서 중앙군을 동원하기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중앙군이 동원되면 방어의 결정적인 지점에서 주진군과의 협력작전으로 거란군과 결전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주진군과 협조된 작전으로 결정적 타격을 시도하였다. 다만, 거란과 2차 전쟁 시에는 강조의 방심과 조직적인 대부대 훈련에 대한 경험부족으로 중앙군의 조직적인 전쟁수행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3차 전쟁 시에는 주진군과 중앙군의 유기적인 협조로 거란군을 격퇴시켰다. 고려의 역내방위전략은 수나라에 맞선 고구려의 전쟁수행전략이나, 나폴레옹에 맞서모스크바까지 프랑스를 끌어들인 러시아의 전략처럼 고대와 근대를 아우르는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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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수나라 침공 시 고구려의 역내방위전략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공시 요하에서부터 평양까지 수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전투력을 약화시키면서 수나라 병사들의 체력과 식량을 고갈시킨 후에 살수대첩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은 1812년 6월 22일 네멘강을 건너 러시아의 영토내로 종심깊게 침공하여 모스크바까지 점령하였으나, 한촌(寒村)밖에 없고 도로망이 제한된 러시아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보급 조달에 어려움을겪었고, 장거리 기동으로 인해 전쟁기간이 장기화됨에 따라 러시아 영내에서 혹한을 맞게되어 퇴각하다가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대량의 피해를 입고말았다. 나폴레옹군은 1812년 6월 22일 부터 12월까지 2000km의 거리를 행군하였고, 45만여명이던 원정군 중에서 전사 10만명, 동사 및 아사15만명, 포로 10만명의 피해를 입음으로써 대규모의 원정군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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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프랑스군의 러시아원정(1812년)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긴 러시아의 지형은 자연적으로 청야작전이 시행될 수있는 한촌의 지형이었으며, 여기에 러시아군은 모스크바까지 불태워 프랑스군의 보급을 차단하였고,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전략이 고려와일맥상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나 러시아처럼 적을 자국의 영토내로 끌어들이되, 적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종심이 길지 않았던 고려로서는 한반도 서북부의험한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요지에 성곽을 쌓아 인위적인 종심을 유지함으로써 역내방위전략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즉, 종심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종심의 길이를 대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청야에 의한 고려의 역내방위전략은 반영농사회로 진입하여 곡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거란군의 보급조달에 어려움을 가중시켜 장기간의 원정에 대한 부담으로 거란군에게 조기 철군을 하게 하였고 고려는 철군하는 거란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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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고려시대 양계에 구축한 성곽

2.궤도(詭道)에 의한 지구전 전략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가 강대한 적과 싸우는 수세전략의 한 방법으로 지구전 전략이 있다.손자는 시계편에서 “兵者,詭道”라고 하여 단순히적을 속이는 것뿐이 아니고 적과 아군의 변화된 상황에 맞춰 합당한 방식으로 대응을 하는 전략이 힘이 약한 방자에게는 중요다고 하였다. 고려는 강대한 거란에 맞서 궤도에 의한 지구전 전략으로 거란의 공세를 버티어 내고결정적 작전의 기회를 엿보았다. 즉, 아군이 불리한 시점에서 화친을 제의하여 거란을 퇴각시키고 퇴각하는 적을 타격하는 화전양면전략과 아군의 중심(重心)에 대한 거란공격을 회피하는 전략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1)화전양면(和戰兩面)전략
  고려는 거란의 공세가 거셀 때는 거짓 강화 제의로 위기를 모면하는 화전양면 전략을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거란과의 2차 전쟁이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거란이 강조(康兆)가 거느린 고려의 방어군 주력부대를 돌파하고 삭주를 거쳐 청천강을 도하할 즈음인 12월 9일에 고려는 거란측에 국왕의 거란에 대한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강화를 제기하는 한편, 거란이 남진할수 있는 통로인 서북계 남북의 모든 진영과 청천강 이남지역에 방어태세를 공고히 할 것을 명하였다.고려의 강화제의에 거란의 일부 장수들이 화의 교섭을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거란 임금 성종은 고려가 거란의 위세에 눌려 완전히 굴복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고려 측의 강화제의를 수락하였다. 고려의 강화제의를 수락한 거란은 마노우와 왕팔을 사신으로 고려에보냈으나 서경(西京:평양)성을 방어하던 고려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거란의 사신 일행을 전멸시켰다. 또한 거란이 개경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피난하던 고려의 현종은 12월 30일 경기도 양주에서 하공진과 고영기를 사신으로하여 거란 성종에게 강화를 요청하고 고려 임금의 거란에 대한 친조를 약속한다. 이에 거란 황제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회군 길은 악몽이 되었다. 거란군이 피로하고 약화된 틈을 노려 귀주별장 김숙홍과 중랑장 보량이 거란군을 요격, 1만 명을 살해하였으며, 흥화진의 양규도 무로대에 주둔한 거란군을 공격하여 2천명 이상을 죽였다. 이후 양규는 흥화진과 귀주사이의 여러 방향에서 거란군을 요격해서 거란의 철수를 방해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장병들이 철수하는 거란군의 요격에 가담하였으며, 이로 인한 거란의 병력 손실은 막대하였다. 앞에서 제시한 바대로 야율요질이 “고려 현종이 한 번의 싸움에서 패하자 대뜸 항복을 청하였으나 이는 속임수일 뿐”이라고 한 것처럼 고려조정의 의도된 전략이었던 것이다. 또한『요사』에“통화 29년 봄 정월 초하루에 회군하였는데, 항복한 여러 성이 다시 반란을일으켰다. 귀주 남쪽의 험한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큰비가 내려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쳐서 갑옷과 무기를 대부분 버리고 날이 새자 겨우 강을 건넜다”고하여 고려의 계책에 당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작전은 크게 보아 거란과 맺은 협상조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서희의 강화 협상에 의해 송과 단교 하겠다고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송과의 교류를 계속하였고, 2차 전쟁 시의 강화조건이던 고려 국왕의 친조도 고려는 끝내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3차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결국 고려는 적을 기만하기 위한 위계(僞計)를 병행한 화전양면전략을 사용하여 전쟁준비를 위한 시간을 벌기도하였고,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함으로써 거란군 철군을 유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2)회피(回避)전략
  손자는 용병의 방법을 논하면서 “적에 비해 나의 병력이 열세이면 능숙하게피할 것”을 말하였다.고려는 거란의 공세가 강하면 일단 결정적인 전쟁을 피하면서 시간을 두고 장기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회피(回避)전략을 사용하였다. 크게 보아 산성입보도 회피전략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거란과의 2차전쟁 시에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고려임금이 피난하는 데에서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다. 현대 전략에서 중심(重心)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듯이, 고려의 중심은 임금을 비롯한 왕실이므로 전세가 불리한 상황 하에서 고려 임금이 거란에 맞서 결전을 치루는 것보다는 회피하면서 전쟁을 장기적으로 끌고가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거란의 성종이 서경을 공격하여 아군이 패하자 강감찬은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하였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여 왕에게 남쪽으로 피하도록 권하였다. 거란의 3차 침공 시에도 고려는 거란의 대군에 직접 맞서기보다는 결전을 회피하다가 거란의 공세가 약화되거나 철수 시에 중앙군을 투입하여 결전을 수행하였다. 이렇듯 고려는 거란의 예봉을 피하면서 거란의 약점이 노출되면 반격하는 회피전략을사용하였다. 일단 회피전략으로 위기를 모면한 고려는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취약성을 지닌 거란에 대하여 북계의 주진에서 철수하는 거란군을 지속하여 타격하는 지연전략을 병행함으로써 거란군에게 심대한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고려는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거란에 맞서 근·현대전에서 강한 적에 대응하는 약자의 전략인 지구전 전략을 사용하여 거란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란과의 전쟁 시 고려의 전쟁수행전략을 요약하면 첫 번째로 청야 및 산성입보에 기반한 역내방위 전략으로서 거란군이 진출 할 수 있는 북계의 성곽을 중심으로 군사를 종심 깊게 다중으로 배치하여 견벽고수의 수세전략을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인병출격하여 기습적으로 거란군을 와해시키는 공세적인 전략을 병행하여 거란군의 공격기세를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또한 지형이 험한 내륙 깊숙이 거란군을 끌어들여 청야작전으로 거란의 전쟁지속능력을 약화시키는 가운데 주진군과 중앙군에 의한유기적인 협조 작전으로 거란군의 침략을 막아내었던 것이다. 중앙군과 주진군의 협조는 3차 전쟁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소배압군에 대하여 강감찬의 명을 받은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의 중앙군이 거란군을 후방에서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거란과의 전쟁을 종결짓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위계에 의한 지구전 전략으로서 고려의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에서는 강화제의로 거란의 철군을 유도하면서 철군하는 거란군을 주진군과 중앙군의 협조된 작전으로 격멸시키는 화전양면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전세가 불리할 시에는 거란군과의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는 회피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2차 전쟁 시 개경 함락의 위기 속에 고려 임금이 개경을 버리고 남으로 대피하였던 것이 그 예이다. 임금은 대피하고 지역민은 산성입보하여 장기간에 걸친 지연전을 병행하여 거란군의 취약점인 장거리 원정의 부담감을 높였다. 이러한 전쟁수행 전략을 적절히 활용하여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는실질적으로 승리하였으며, 거란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출처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