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1세 (1922~1939)
- 1929년 무솔리니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 교황령을 포기하는 대신 바티칸과 인근 영토(현재 바티칸 시국), 7억 5천만 리라의 보상금, 채권 10억 리라를 받아냄. 이 돈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행정처(훗날 바티칸 은행)"가 설립되고, 평신도 금융가 '베르나르디노 노가라'가 국장을 맡음
-무솔리니가 교회 내 청년단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1931년 회칙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Non Abbiamo Bisogno)」를 발표. 무솔리니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 선종시 까지 무솔리니와 계속 불편한 관계 유지
-1933년 히틀러와 "제국종교협약"을 체결, 교회의 자유와 가톨릭 단체, 청년모임 보장, 학교의 종교교육 등 여러가지를 약속받음
-1937년 회칙 「깊은 근심과 함께(Mit Breender Sorge)」를 발표해 히틀러의 파시즘 정책과 그릇된 인종주의, 종교 탄압을 비판. 독일어로 발표하여 모든 독일 교구의 성당에서 낭독하게 함.
소위 그리스도 이전의 고대 게르만적 사유에 따라 인격적인 신 대신에 음험한 비인격적 운명을 숭배하는 자는 하느님의 현명하심과 그 섭리를 부인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종이나 민족 혹은 국가나 국가 형태를 인간적인 국가권력이나 다른 인간적인 공동체 구성의 기본 가치로 보고, 그것을 종교적 가치를 포함한 모든 가치의 최상위 규범으로 여기며 우상숭배의 제식으로 떠받드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명령하시는 사물의 질서를 왜곡하고 기만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격분한 히틀러는 가톨릭 단체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학교를 폐쇄시키거나 청년단체 회원들을 체포하는 등 교회 탄압을 시작. 언론을 통해 비오 11세를 "유다인 교황"이라고 비난.
비오 12세 (1939~1958)
- 바티칸 내 전쟁포로, 난민 조사사무소 설립
- 1939~1944년동안 3천명 이상의 유다인을 남아메리카로 피신시킴
-3500명 가량의 이탈리아 내 유다인들을 홀로코스트로부터 교황청과 개인 사유지에 숨겨줌
-5천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위해 외국으로 탈출할 여권, 비행기표, 서류들을 마련
-독일군의 로마 점령 시 히틀러는 비오 12세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고, 추기경들은 비오 12세를 피신시키려 하였으나 "로마 주교로서 로마에서 죽겠다"는 말과 함께 도망가지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스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공식적이고 명확한" 비난 성명 내지는 회칙을 발표하지 않아 전후 비판의 대상이 됨.
----------------------------------------------
예전에 가갤에 올렸던 거 가져옴
"교회가 적극적으로 파시즘이랑 싸웠느냐" 라고 하기엔
우리가 할 말 없기는 해
세간에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가 눈 감고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 뿐...
보수적인 종교인의 현실적인 한계지만 그래도 악마와 손잡진 않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