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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표의 우람한 55구경장 포신이 조심스럽게 에이브의 포탑을 더듬었다. 이런 쪽으론 전혀 경험이 없는 흑표였기에, 의식적으로 서툰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포신은 얼마나 빠르게 내려야 하며 에이브의 사이트 스커트는 어떻게 훑어야하는지 따위만 머릿속에 가득 찬 나머지, 정작 자신이 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은 망각한지 오래다. 긴장을 한 탓인지 주포의 구동계가 뻐근해왔다.
"ㅎ...흐앗"
거대한 포탑과 차체 사이의 좁은 틈으로 120mm가 스치자 에이브는 움찔하며 포탑을 회전했다.
"이야, 니 소설도 쓰나?"
히터 먼지냄새만이 가득 찬 교실을 청량한 목소리가 깨웠다. 반쯤 멍하게 있었지만 이내 정신이 확 돌아와서 쓰던 걸 황급히 가렸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니 뭐.. 어쩌라고. 근데 왜."
괜스래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오늘까지 내라던 문이과 선택표. 니만 안냈다. 어서 내라."
"아 그거. 근데 왜 지금 말하노. 옆자리면서."
"니가 맨날 잠만 쳐자니까 글치."
말없이 책상 서랍을 뒤져 꼬깃꼬깃한 갱지를 찾아내 대충 동그라미와 사인을 한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계속 마음을 간지럽힌다.
"가스나도 아니고 왜 문과고. 소설가라도 할라고?"
"꼭 그런건 아니고. 그냥 글쓰는 걸 좋아해서."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어정쩡하게 종이를 가린 팔꿈치가 저렸다. 교실도 묘하게 더운데다 건조한 탓에 숨이 살짝 가빠졌다. 뜬금없지만 요전에 엄마가 운동 좀 하라고 뭐라하던 게 생각났다.
거짓말.
"자."
굳이 종이를 준다고 강조해서 말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고운 모랫바닥을 흘러지나갔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도 좀 빨리빨리 내고."
"알았다."
"그리고 아무리 무기 좋아해도 학교에서 그러는 거 아이다."
1
학급 정원은 짝수인 것보다 홀수인 게 좋았다. 옆자리에 있는 빈 책상에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으니까.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들의 스쳐가는 시선에, 똑같이 눈빛으로 변명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옛날 말이다.
올해는 특이하게도 우리 담임 덕에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했다. 그러는 바람에 나는 갑순이와 같이 앉게 되었다. 갑순이는 엄청 이쁘다곤 못하겠지만 탱글탱글하고 귀엽게 생겨서 한번이라도 꼬집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곤 한다. 그런 주제에 공부도 잘해서 전교 1등에 반장에 아무튼 뭔가 좋다 하는 건 전부 하고 있는 성격이니 나랑은 전혀 접점도 없었을 인물임이 분명했다.
6교시.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단풍색 빛줄기가 교실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언제나 반복되는 종소리가 들렸다.
"좀 일나라."
"차피 내 문과갈끼라서 과학 안들어도 된다."
"닌 생윤도 안 듣잖아."
"경제랑 동아시아사 칠꺼거든."
"좀 일나라고."
계속되는 재촉에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킨다. 갑순이는 왠지는 모르지만 항상 나를 깨운다. 그 뿐만 아니라 과제를 내라고 닥달하기도 한다. 보통의 경우에는 뒷담화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고, 그나마 착하다고 하는 녀석들도 무관심 이상의 호의를 보여주지 않는 나에게, 왜 그렇게 심하게 간섭하는지 모르겠다.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되나?"
"뭔데."
말문이 막혔다. 괜한 오해를 사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괜스래 짜증을 낸다면,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뭐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착할지도 모르는 여자애한테 할 수 있는 가장 찌질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니 있잖아."
"어."
"니는 왜 나 안 무시하는데?"
2
학생의 95퍼센트 이상이 수시로 대학을 가는 우리학교에서, 모의고사 치는 날은 그저 야자 없는 날에 불과하다. 전국 백분위 4.92의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100분의 수학영역 시간은, 어쩌면 이 정도 시간을 주면 나도 가뿐히 1등급 쯤은 받을 꺼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너무나도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시곗바늘이 11시를 지나고부터, 산발적으로 들리던 연필 소리가 하나 둘 기세를 잃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깨어있는 것은 수학 시간만큼 그림 그리기 좋은 환경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수학 시험지의 맨 마지막 장은 갑순이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인지 아예 비어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시간도 충분하기도 하다.
벌써 어느 정도 형태는 잡혔다. 패튼의 옆구리를 통째로 뒤덮은 궤도를 그려나간다. 살짝 튀어나온 궤도의 울퉁불퉁한 돌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샤프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야한다. 둥그스름한 포방패를 뚫고 하늘로 솟은 주포에 명암을 넣을지 말지 고민한다.
11시 30분이었다. 교실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갑작스런 정적에 놀라 주위를 돌아본다. 모든 아이들이 엎드려있었다. 맨 앞에 계시던 늙은 감독관 선생님도 꽤나 목이 아파보이는 자세로 졸고 계신다. 오로지 내 앞의 앞에 앉은 갑순이만이 시험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갑순이가 정신없이 시험지를 넘기는 소리가 다시금 교실을 깨운다. 어째서인지 한장이 아니라 두세장씩 넘기고는 다시 야무진 손으로 샤프를 쥐고 깨작거린다. 나도 결국 색칠을 하기로 결심하며 다시 시험지에 손을 댄다. 어째서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사각거리는 소리 때문에 그림에 집중할 수 없다. 어느 샌가 나는 그림을 그린다는 목적을 망각한 채 그 소리에 맞추어 아무렇게나 연필을 놀리고 있었다.
이 넓은 교실이, 교실을 채우는 뜨거운 바람과 햇살이 오로지 갑순이만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넓은 세상에 갑순이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그곳에 내가 있었으면 어떨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결론적으로 둘은 맞으니까.
종이 울렸다. 맨 뒷자리에서 시험지를 걷어오라길래 일어선다. 오랫동안 고독한 싸움을 해오던 갑순이는 시험지 위에 살포시 스러진다. 가까이 가보니 시험지가 살짝 젖은 것 같기도 하다.
"저, 음. 시험지 걷어야되는데."
대답이 없다.
"많이 망쳤나. 몇점인데."
갑순이는 말 없이 OMR 카드를 내밀었다. 나도 아무말 없이 건네받았다. 왠지 빼앗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시험지의 회색이 진해졌다. 등을 토닥여줄 뻔 했지만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다.
"92점."
등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패튼보다 레오파드가 더 좋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덕문학추 1 이상성욕비추 1 같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