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함
일단 고려 장교=호족이걸 기본으로 잡고 가야하고, 개인 사병 굴리는게 당연해서 요즘으로 치면 의원이 보좌관들 월급주듯 저 녹봉에서 아래 부하들 월급도 들어감
조선은 사병이 없어진대신 군대가 자체적 조달/물자생산을 자급자족하거나 염세나 환곡처럼 행정시스템의 일부로 장난질 하기 좋았던거도 감안해야함
누가 제대로 정리 해주겠지
익명(oliver2324)2024-03-02 22:11
답글
상장군 대장군 이런놈들은 무신정변 정중부 이소응급 거물들인데 얘내들은 녹봉 안받고 수조권 받잖아
국사시간에 그렇게 배웠던거 같은데 분명히
익명(vacation5418)2024-03-02 22:13
답글
그 수조권으로 하는게 사병 양성임
대장군 상장군 이런 직위가 침공때 갑자기 여럿 임명되는게 뭔 뜻이냐면 "넌 이제부터 장군이니까 만단위 사병 꾸려도 ok"라는 뜻임
호족들끼리 영지전이 당연한게 고려였고, 실제로 지방 호족끼리 작당해서 약탈교역시도한다거나 홍건적/초적/왜구의 침공에 따로 놀다 각개격파당한 이유가 있음
못 믿겠으면 이성계가 황산대첩 이기기 직전 고려사등의 서술을 나무위키등에서 찾아보면 이해할거임
익명(oliver2324)2024-03-02 22:17
답글
그리고 무신정변은 기존 개경의 대호족=문관이랑 지방출신 신흥 세력=무관이 제대로 터진거라 보면 됨
고려-거란전쟁/여진정벌/서경천도 진압등으로 계속 지방출신이 중앙군에서 출세하는데, 기득권 호족놈이 술마시고 수염태우니까 꼴받아서 폭발한거라
한편 국가 는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라고 하는 ‘왕토 사상(王土思想)’을 이념적 바탕으로 민전에서 생산되는 수확물의 일부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였다. ‘수조권(收租權)’이라 부르는 권리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수조권에 입각하여 국가가 사유지, 특히 민전 소유자로부터 수확물 가운데 일부를 거두었던 것이다.
익명(180.231)2024-03-02 22:23
답글
그리고 녹봉vs수조권도 골때리는게 당장 쓸수 있는 현찰vs지역의 자원 동원 허가라서 받은놈이 무능하면 좋은 시전을 받아놓고도 원하는 만큼 노역이나 생산물을 쥐어짜질 못 했음
아래 부하 봉급을 녹봉으로 이야기한 이유중 하나가 당장 사병들 먹이고 입히는데는 권리보단 현찰이 급한거라
익명(oliver2324)2024-03-02 22:25
답글
수조권은 사병 양성이 아니라 수확물 걷어갈 수 있는 권리라서 사병 양성이랑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음
익명(180.231)2024-03-02 22:25
답글
ㅇㅇ 근데 저게 땔감/곡물/광물/공예품 징발이라 사병운용과 연관됨
철소나 갑옷&화살 부곡이 자신의 수조권에 포함되느냐 문제로 경주 호족끼리 치고박은 사례도 있음
익명(oliver2324)2024-03-02 22:28
답글
에초에 고려 무관 대다수는 부유한 호족 출신도 아니라 그냥 대대로 무관일 해온 가문이거나 무예 잘쓰는 사람 데려다가 임명한거임
고려 관리 중 조상이 호족 출신인건 문벌귀족 = 문관이고 얘네가 대대로 음서로 자리해먹어서 권력 유지한거임
익명(180.231)2024-03-02 22:29
답글
물론 무신정변 시절이면 무관 중에도 호족 출신이 한두명 있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조상이 호족인 고려 관리들은 음서와 과거로 문관 노릇했음
왜냐하면 무관 자체가 정3품 상장군이 최종관직이라서 문관보다 훨씬 품계 안좋고 대우도 구려서 굳이 무관을 할 이유가 없었거든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기록보면 문관도 저렇게 받을려면 정1~2품은 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
고작 무관인 정3품 상장군이 저렇게 받을리가 없잖아
익명(180.231)2024-03-02 22:13
답글
에초에 고려시대 무관들은 대다수가 호족 가문도 아닌게 그냥 무예 뛰어난 사람들 + 대대로 무관해온 가문에게서 뽑아서 고려시대 문관과 다르게 호족 출신 얼마없는 걸로 알음
이 때문에 정3품 상장군이 최고직으로 문관보다 품계가 훨씬 낮았음
익명(180.231)2024-03-02 22:18
실베잖아 그냥 새로 알아봐야지
닥철(ekrcjf12)2024-03-02 22:17
증거도 없는글 믿지마라
익명(124.62)2024-03-02 22:17
개경 환도 이후 원나라의 정치적 지배 아래에 접어들면서 강도 시절보다는 점차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과 권세가들의 광범위한 토지 겸병으로 재정난은 계속되어 품록의 감소, 체불, 지급 정지 등 지급이 정상적으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공민왕은 개혁 정치를 통하여 난국 타개와 국가 중흥을 위한 노력의 일부로서 녹제 쇄신을 시도하였으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후기에 1 · 2품으로 360석을 받아야 할 재상의 녹봉이 20~30석에 불과하였으니, 그 이하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녹봉은 고려 왕조 멸망 직전인 1391년(공양왕 3) 10월까지 지급되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978#section-7
레퍼런스도 따로 없는 실베글을 믿음?
군인 대우가 저랬으면 무신정변이 났을까
저런 자료는 누가 만드냐 그럼
대충만든 날조자료 관련갤마다 다른 계정으로 한바퀴 돌린 다음 사실이라고 바락바락 우기기
복잡함 일단 고려 장교=호족이걸 기본으로 잡고 가야하고, 개인 사병 굴리는게 당연해서 요즘으로 치면 의원이 보좌관들 월급주듯 저 녹봉에서 아래 부하들 월급도 들어감 조선은 사병이 없어진대신 군대가 자체적 조달/물자생산을 자급자족하거나 염세나 환곡처럼 행정시스템의 일부로 장난질 하기 좋았던거도 감안해야함 누가 제대로 정리 해주겠지
상장군 대장군 이런놈들은 무신정변 정중부 이소응급 거물들인데 얘내들은 녹봉 안받고 수조권 받잖아 국사시간에 그렇게 배웠던거 같은데 분명히
그 수조권으로 하는게 사병 양성임 대장군 상장군 이런 직위가 침공때 갑자기 여럿 임명되는게 뭔 뜻이냐면 "넌 이제부터 장군이니까 만단위 사병 꾸려도 ok"라는 뜻임 호족들끼리 영지전이 당연한게 고려였고, 실제로 지방 호족끼리 작당해서 약탈교역시도한다거나 홍건적/초적/왜구의 침공에 따로 놀다 각개격파당한 이유가 있음 못 믿겠으면 이성계가 황산대첩 이기기 직전 고려사등의 서술을 나무위키등에서 찾아보면 이해할거임
그리고 무신정변은 기존 개경의 대호족=문관이랑 지방출신 신흥 세력=무관이 제대로 터진거라 보면 됨 고려-거란전쟁/여진정벌/서경천도 진압등으로 계속 지방출신이 중앙군에서 출세하는데, 기득권 호족놈이 술마시고 수염태우니까 꼴받아서 폭발한거라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6_0040_0020_0010
한편 국가 는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라고 하는 ‘왕토 사상(王土思想)’을 이념적 바탕으로 민전에서 생산되는 수확물의 일부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였다. ‘수조권(收租權)’이라 부르는 권리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수조권에 입각하여 국가가 사유지, 특히 민전 소유자로부터 수확물 가운데 일부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녹봉vs수조권도 골때리는게 당장 쓸수 있는 현찰vs지역의 자원 동원 허가라서 받은놈이 무능하면 좋은 시전을 받아놓고도 원하는 만큼 노역이나 생산물을 쥐어짜질 못 했음 아래 부하 봉급을 녹봉으로 이야기한 이유중 하나가 당장 사병들 먹이고 입히는데는 권리보단 현찰이 급한거라
수조권은 사병 양성이 아니라 수확물 걷어갈 수 있는 권리라서 사병 양성이랑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음
ㅇㅇ 근데 저게 땔감/곡물/광물/공예품 징발이라 사병운용과 연관됨 철소나 갑옷&화살 부곡이 자신의 수조권에 포함되느냐 문제로 경주 호족끼리 치고박은 사례도 있음
에초에 고려 무관 대다수는 부유한 호족 출신도 아니라 그냥 대대로 무관일 해온 가문이거나 무예 잘쓰는 사람 데려다가 임명한거임 고려 관리 중 조상이 호족 출신인건 문벌귀족 = 문관이고 얘네가 대대로 음서로 자리해먹어서 권력 유지한거임
물론 무신정변 시절이면 무관 중에도 호족 출신이 한두명 있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조상이 호족인 고려 관리들은 음서와 과거로 문관 노릇했음 왜냐하면 무관 자체가 정3품 상장군이 최종관직이라서 문관보다 훨씬 품계 안좋고 대우도 구려서 굳이 무관을 할 이유가 없었거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978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기록보면 문관도 저렇게 받을려면 정1~2품은 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 고작 무관인 정3품 상장군이 저렇게 받을리가 없잖아
에초에 고려시대 무관들은 대다수가 호족 가문도 아닌게 그냥 무예 뛰어난 사람들 + 대대로 무관해온 가문에게서 뽑아서 고려시대 문관과 다르게 호족 출신 얼마없는 걸로 알음 이 때문에 정3품 상장군이 최고직으로 문관보다 품계가 훨씬 낮았음
실베잖아 그냥 새로 알아봐야지
증거도 없는글 믿지마라
개경 환도 이후 원나라의 정치적 지배 아래에 접어들면서 강도 시절보다는 점차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과 권세가들의 광범위한 토지 겸병으로 재정난은 계속되어 품록의 감소, 체불, 지급 정지 등 지급이 정상적으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공민왕은 개혁 정치를 통하여 난국 타개와 국가 중흥을 위한 노력의 일부로서 녹제 쇄신을 시도하였으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후기에 1 · 2품으로 360석을 받아야 할 재상의 녹봉이 20~30석에 불과하였으니, 그 이하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녹봉은 고려 왕조 멸망 직전인 1391년(공양왕 3) 10월까지 지급되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978#sectio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