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1887 ~ 1990).
신성불가침의 일본 천황의 책임을 처음으로 언급한 건 다름 아닌 일본 황실의 일원이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전후 일본 황실의 침묵을 깨고 최초로 공개적으로 발언권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1946년 2월 27일, 나루히코는 요미우리호치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황실의 많은 구성원이 히로히토 천황의 퇴위에 동의했고 히로히토의 동생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아키히토 황태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년 3월 4일, 나루히코는 비슷한 취지의 인터뷰를 AP통신과 진행했고 뉴욕타임즈를 통해 이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나루히코는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와 함께 1930년대부터 미국과의 대립 구도 및 연합국과의 전쟁을 일관되게 반대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으며 진주만 공습 이후로도 미국과의 평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후 나루히코는 일본의 총리가 되어 적대 행위 중단을 감독하고 패배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이 안전하다는 국민을 안심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사실상 나루히코 내각은 미국의 허수아비 내각이었는데, 나루히코는 맥아더의 치안유지법 폐지 명령에 불복하다가 임기 54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임했지만 여전히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
비록 황족으로서 계승 서열은 낮은 편이었지만(32명 중 24위), 그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 황족은 나루히코의 형인 구니노미야 모리마사 왕(영친왕의 장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두 명 뿐이었는데, 모리마사는 이세 신궁의 관련자, 야스히코 왕은 난징대학살의 주동자로 직간접적인 전쟁범죄자였던 데 반해 나루히코는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워 실질적으로 일본 황족 중 가장 발언권이 강했고, 정치인으로서도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거물이었다.
이후 나루히코는 도쿄에서 퇴위 문제가 몇 달 동안 논의되었다고 인정했다. 불과 며칠 전에 나루히코는 히로히토를 알현하여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국무회의에서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루히코는 히로히토가 국가의 패배에 대해 '죽은 자와 그의 유족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전례 없는 발언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은 엄격한 계층 사회였다. 황실과 주요 화족들이 나루히코처럼 불충한 표시를 나타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섭정 후보였던 쇼와 천황의 막내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섭정 후보였던 쇼와 천황의 두번째 동생,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며칠 후 천황의 막내 동생인 다카히토는 히로히토가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하고 기꺼이 섭정으로 자원했다. 또 다른 형제인 노부히토도 섭정이 제안되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는 배고픔과 극도의 고난이 가장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퇴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검열된 언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명인 다쓰지 미요시가 천황은 '직무 수행에 극도로 태만'했고, '전투에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스러운 군인들을 배신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임해야 한다는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은 히로히토의 퇴위를 바라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바로 맥아더였다.
미국의 일본 통치를 담당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히로히토가 왕위에 머물기를 고집했고, 히로히토를 자신의 임무의 주요 협력자이자 기능자로 채택했다.
1946년 초에는 같은 황족들도 일반 국민들도 인정한 완전한 패배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히로히토 천황의 지위를 보호했다. 그러나 새해 초에 히로히토는 자신이 인간임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히로히토를 문자 그대로 국민의 숭배를 받는 절대 통치자에서 입헌 군주로 바꾸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였다.
히로히토의 퇴위를 논한 나루히코의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나루히코는 다른 방법으로 일본 황실의 위기를 초래했다.
나루히코는 1947년 자발적으로 신적강하를 신청하면서 다른 황족도 동참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고, 결국 다이쇼 천황의 직계 4남을 제외한 모든 황족이 평민으로 강등되어 오늘날 일본 황실의 남성 후계자 부족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나루히코는 슈퍼마켓을 운영했지만 얼마 못 가 파산했고 이후 히가시쿠니교 라는 신흥 종교를 창시했다가 미 정부에 의해 금지된 후, 구황족에 전 총리라는 신분에 비해선 비교적 조용히 살다가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총 4명의 아들과 9명의 손자를 남겼는데, 만약 나루히코가 황족 신분을 유지했다면 오늘날 일본 황실의 남성 후계자 부족 문제는 거론조차 안 됐을지도 모른다.
출처
1946: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95-96p
천황제를 유지는 하되 히로히토는 퇴위시키고 다른 군주로 대체했음 어떻게 굴러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