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초, 육군성 장교가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서기관장 사코미즈 히사쓰네를 찾아왔다.
그는 사코미즈에게 "본토 결전 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의용대에서 사용하는 병기를 전시하여 수상 이하 각료들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이 말에는 본토 결전에 대한 찬성을 얻기 위해 육군 측의 준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각료들에게 납득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에서는 스즈키 내각이 종전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본토 결전에 승산이 있다는 점을 반드시 이해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시된 무기를 본 스즈키와 각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각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코미즈는 자신의 회상록 [기관총 아래 놓인 수상 관저]에서 "분노와 절망을 느겼다"면서 무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수류탄은 그렇다 치고 총이란 총은 모두 단발이어서, 총부리에 먼저 화약을 담은 작은 주머니를 꼬챙이로 밀어넣은 다음, 원형봉을 깎아 만든 탄환을 다시 꼬챙이로 밀어넣어 사격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 전통 활이 전시되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는데, 사정거리는 대략 30~40미터, 통상적인 사수의 명중률은 50퍼센트라고 적혀 있었다. 그외에 죽창, 사스마타(U자형 쇠를 꽃은 무기)등이 놓여있었다."
스즈키는 사코미즈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어이가 없군. 이런 상태라면 하루라도 빨리 종전을 제안해야겠어."
참모본부는 같은 해 4월 [국민항전필휴]라는 소책자를 발행, 국민에게 전달하여 사기를 끌어올리려 했다.
이 책자에는 미군 병사와 백병전을 벌일 때에는 죽창으로 상대의 복부를 찌를 것, 낫, 도끼, 쇠망치, 식칼, 쇠갈고리등을 무기로 삼을 것,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에는 비슴듬한 자세로 상대의 가슴을 찌를 것 등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정항해 미군의 사기를 꺾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게릴라전을 위한 교본이기도 했다.
1945년 5, 6월 단계에서 쇼와 육군은 체질상 이미 군사 조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무렵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필사적으로 종전 공작의 길을 찾고 있었다.
- 호사카 마사야스저, 쇼와 육군 내용 중
본토가 이 꼬라지 였는데 관동군 전력이면 준수한 '정예병력' 맞지 ㅇㅇ
아무리 그래도 최정예들은 ㄹㅇ 중일전에 있지 않았을까? - dc App
일본군 사단에서 최정예라고 할게 1945년 시점으로 솔까말 없어. 기준에 정예였던 사단들도 예하 부대들 파견보내고 신병으로 충원되면서 간판만 정예사단이었지
그나마 정예사단이라 태평양전선으로 차출했던 사단들 다 1944년에 고기밥되고 사이판, 필리핀, 오키나와에서 전멸해버렸으니
지나파견군도 상당수가 태평양 끌려가 뒤짐
비난을 들은 후로 국민의용전투대 라고 나름 정예화 노력을 한거 같기도 한데....대상이 60세까지임 ㅋㅋㅋㅋ
ㄹㅇ 낙지 국민돌격대가 조금 더 '정예'로 보일 수준
가장 강했을때보다는 약해졌던거지, 나름 병력을 증강시키고 참호나 요새라인도 나름 신경써서 건설했기 때문에 자기들 딴에는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거임. 다만, 그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시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병력과 장비를 갖추고 사방팔방으로 기동전을 펼칠줄은 몰랐던 것뿐이고, 그런거에 대한 대비는 일본군 수준에서는 애초에 대응이 불가능했던 것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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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군 사령관 아키시바 야에조 발언보면 상륙지점에서 방어 올인이라 답이 없음...
그나마 관동군은 45년에도 만주에 사는 예비역들 데려다 부대 창설하는 여유(?)가 있었더라. 동시기 본토에서는 여고생들한테 죽창 들려주던 판인데
저고도로 비행하는 항공기나 상륙병력을 공격하려고 만든 투석기도 ~~ㅋ - dc App
저건 노약자, 여성같은 약자들 쥐어주려던 무기고 남성들한텐 전원 총기 지급됐었음. 정예도 타퉁작전, 버마등에 투입된 화남지역이나 동남아도서, 오키나와 이오지마에 몰빵됐었고 대전말이 아니라 중순부터 이미 관동군은 무늬뿐인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