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팔레스타인 만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코 원혜진의 『아! 팔레스타인:만화로 보는 팔레스타인 역사』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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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왜곡된 근현대사"를 만화로 배운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테러리스트"라고 매도당하고 주장하며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건데 이 만화야말로 노골적인 왜곡을 일삼는 만화이다.


1. 만화의 묘사


만화는 PLO의 초기활동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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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간설명없이 갑자기 '검은 9월단' 사건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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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9월'을 매우 짧게 설명하고 넘어가고 있는데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1970년 9월 요르단 정부군의 토벌작전을 큰 타격을 받은 시기" "같은 해 11월 요르단의 총리를 보복 암살한 게릴라"라고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요르단 정부군이 왜 토벌작전을 실시했는지는 만화에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만화가는 차마 화자의 입을 빌려 직접 전쟁을 왜곡하지는 못 하고 이스라엘인의 입을 빌려 사건의 실체를 왜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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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9월에 친미 성향의 레바논 후세인 국왕은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을 추방"했다고 만화는 묘사하고 있다.


2.진실


이것은 실체를 왜곡한 것이며, 팔레스타인의 명문 가문 할리디가(家) 출신의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조차 이런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검은 9월은 PLO가 요르단 원주민들을 모욕하고, 요르단군을 적으로 취급하며, 요르단을 상대로 폭력 사태를 일으키며 지속적으로 도발하다가 참다못한 요르단 군대에게 추방당한 사건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정치인, 판사, 외교관, 언론인 등을 배출한 팔레스타인의 명문 가문 할리디가(家) 출신의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는 검은 9월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67년 이후 외교와 선전에서 잇따라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성공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번 여러 적수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의 카라메 공격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위가 상승하는 것을 막으려는 첫 번째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1968년 베이루트 공항을 겨냥한 대대적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여러 차례 항공기를 납치하고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세력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자, 하심 가문 정권과 파국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저항 운동 쪽에 승산이 없는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에 직면하고 대중적 공감도 일부 상실한 저항 운동은 그해에 이른바 검은구월단 사건 속에서 암만에서 밀려났고, 1971년 봄에 요르단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요르단 와해 사태를 거치면서 저항 운동의 일부 요소들, 특히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그 시점까지 유지하던 성공적인 역동성의 아우라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모하게 적들을 도발하고, 의지처가 되는 나라들을 소외시키며, 결국 쫓겨나게 되는 저항 운동의 이런 양상은 11년 뒤 베이루트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

라시드 할리디, 유강은(2021),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180-181.


이스라엘에 태어나서 6년간 군에 복무하며 포병대 장교로서 1982년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으나, 1987년 인티파다 발발 후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가혹하게 진압하는 이스라엘의 정책에 반대하여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1994년 런던 킹스칼리지대학교에서 전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같은 대학의 전쟁연구학과 교수 아론 브레크먼도 팔레스타인-요르단의 관계와 검은 9월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비록 서안 주민 가운데 스스로를 애초부터 요르단인으로 여긴 사람은 없었지만, 요르단 강 서안과 동안의 병합, 나아가 옛 팔레스타인 전체와 요르단의 통합은 일리 있어 보였다.

그러자 점차 많은 서안 주민들이 하심 정부를 받아들였다. 특히 요르단이 연간 23퍼센트에 달하는 경제 성장을 누리고 그 번영의 과실이 서안 지구까지 흘러넘치던 1960년대에는 더욱 그랬다. 압둘라 왕(1951년 7월 20일 예루살렘에서 암살되었다)의 손자로 1952년에 왕위를 계승한 후세인 빈 탈랄은 서안 주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서안과 동안의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나날이 무르익던 화합 분위기가 병합 17년 만인 1967년 갑작스럽게 가라앉았다. 이스라엘군이 아랍인들이 거주하던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구를 점령하고 요르단 강의 다리들을 마구 폭파함으로써 상징적으로, 그리고 사실상 물리적으로 양안을 다시 갈라놓았던 것이다.

아론 브레크먼, 정회성(2016), 『(중동 테러리즘의 불씨를 지핀) 6일 전쟁 50년의 점령』, 53-54.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밀려난 PLO는 그 후 요르단에서 서안 지구로 자금과 무기를 보내고 지침을 하달하면서 점령에 대한 저항운동을 결집하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요르단 영토에서는 후세인 왕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국왕을 쫓아내고, 요르단왕국을 배후기지 삼아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고,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해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PLO의 입장에서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길게 국경을 맞대고 있는 데다 PLO에 동조하는 팔레스타인 출신 인구가 다수인 칸큼 대단히 이상적인 터전이었다.

하지만 이는 후세인 왕의 단호한 의지를 과소평가한 PLO의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1970년 9월 국왕은 자신의 왕국에서 일정한 지역을 아예 지배하다시피 하면서 줄곧 문제를 일으키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그들을 레바논으로 몰아냈다. 요르단군이 팔레스타인 게릴라 축출 작전을 벌인 이 시기가 이름하여 '검은9월'이다.

『(중동 테러리즘의 불씨를 지핀) 6일 전쟁 50년의 점령』, 127-128.


1949년부터 1974년까지 런던 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 학과 내 중동사학 교수를 지냈고, 1974년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겨 명예교수로 있으며 현존하는 금세기 최고의 중동학자라는 평가까지 받는 버나드 루이스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요르단에서는 팔레스타인 지도부와 요르단 왕정조직이 1970년 9월에 서로 대치했는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요르단 정부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여 유혈 패배를 맛보았다.

버나드 루이스, 이희수(1998), 『중동의 역사』, 386.


프랑스 레위니옹 대학의 부교수이며, 팔레스타인 문제 전문가인 오드 시뇰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968년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페다인들은 하심 왕조에 위협을 가한다. 까닭인즉 요르단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들이 1967년에 아랍권이 전쟁에서 지고 나서, 요르단 국왕이 1949년 이후의 국경선으로 한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유엔 결의안 242조의 내용을 수용한다고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970년 9월 요르단 국왕은 통치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군대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제압하려 든다.

오드 시뇰, 정재곤(2008),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정당한가』, 54-55.


독일의 정치학 박사 마틴 쇼이블레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요르단에서는 극단주의 팔레스타인인들 때문에 점점 심각한 사회문제가 대두했다. 1970년 9월 요르단 국왕을 테러하려던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들의 계획이 가까스로 무산되었다. 그 사건 이후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요르단 군인들이 벌인 PLO 요원 퇴치작전은 암만의 길거리에서 거의 시가전을 방불케 했다. 팔레스타인의 극단주의자들이 민간 항공기를 납치하는 사건도 여러건 일어났다. 그때부터 '검은9월단'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결국 PLO는 요르단에서 떠나야만 했다.

마틴 쇼이블레, 노아 플룩, 유혜자(2016),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150-151.


오정석 중장은 중동전쟁전사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PLO는 창립초기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요르단에 근거지를 두었다. 그러나 PLO가 요르단 정부와 각종 마찰을 빚다가 1970년 9월, 팔레스타인 급진 게릴라들이 여객기 3대를 납치하여 요르단에 착륙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다. 은인자중하던 요르다 국왕 후세인 1세는 9월 15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PLO 지배하의 난민촌과 수도 암만지역에 군대를 투입하여 PLO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일명 '검은 9월' 사건이다. 큰 타격을 입은 PLO는 인접한 레바논으로 거점을 이동하여 베이루트에 캠프를 설치했다.

오정석(2022), 『중동전쟁전사』, 839.



하버드 대학교에서 중동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중동 근대사 교수 유진 로건의 책이 검은 9월을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일부 팔레스타인 분파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에 필요한 첫 걸음이 "반동적인" 하심 가 군주제 타도를 통한 사회혁명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아랍 대중을 끌어모았다. 살라 칼라프도 관계 파탄에서 게릴라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우리들의 행동이 상당히 일관적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썼다. "자신들의 힘과 위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페다인(팔레스타인 특공대)들은 원주민인 요르단 사람들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종종 우월감을, 때로는 거만함을 보이곤 했다. 잠재적인 동맹자라기보다는 적으로 취급했던 요르단 군대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더욱어 심각했다." 그러나 모든 팔레스타인 분파들은 후세인 왕이 자신들에게 일구이언으로 행동하며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반하는 미국과 심지어는 이스라엘과도 협력하고 있다 생각했다.

결국 1970년에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은 정면출동하게 되었다. 6월에 인민전선이 요르단 주재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을 인질로 잡았고, 암만의 가장 큰 호텔인 인터컨티네탈 호텔과 필라델피아 호텔을 장악해서 870명이 넘는 손님들도 인질로 삼았다. 후세인 왕은 암만의 난민 캠프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진지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을 파병으로 것으로 대응했다. 휴전이 체결되어 인질 전원이 풀려나기까지 일주일 동안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레일라 칼레드는 인민전선이 계속해서 싸우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민중의 신임을 받고 있던 우리는 왕의 분열된 군을 격퇴할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후세인을 퇴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라고 훗날 회고했다.(중략)

마흐무드 이사는 영웅 대접을 받으며 요르단으로 돌아왔고,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다음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극적인 PFLP 작전―동시다발적으로 이스라엘과 서구의 비행기 3대를납치해서 요르단 사막으로 데리고 오는 임무였다―수행을 위해서 우선 활주로를 준비해야만 햇다. 인민전선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세계 언론의 1면을 장식하고, 요르단에게 팔레스타인 혁명 운동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것은 고의적인 도발이었고, 후세인 왕과 요르단군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사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동쪽에 위치한 도슨즈 필드로 알려져 있던 폐기된 활주로에서 작업에 들어갔다.(중략)

폭약이 설치된 빈 항공기는 연속적으로 굉장한 폭발음을 내며 파괴되었고, 이 장면이 세계 언론의 텔레비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5일 후에 요르단군이 팔레스타인 혁명 운동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더 큰 폭발이 예고되었다. 팔레스타인 분파들은 너무 오래 머무르면서 후세인 왕과 요르단군의 눈총을 사고 있었다. 카라마흐의 행복은 검은 9월(팔레스타인 혁명 운동을 요르단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벌어진 전쟁을 이렇게 불렀다)과 함께 사라졌다. 군주제를 타도하고 요르단을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도약대로 변모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인민전선이 비행기 납치라는 불법행위를 요르단 영토에서 자행한 것이 결국은 마지막 결정타가 되었다. 파타는 인민전선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요르단 사람들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 분파들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혁명 운동과 하심 가 군주제가 공존하기에는 요르단이 너무 좁았다.

후세인 왕과 요르단군은 자신들의 테러 활동을 위해서 요르단 영토를 점령한 PFLP의 대범함에 격분했다. 요르단군이 도슨즈 필드에서 벌어지고 있던 납치 사건에 개입하려 하자 팔레스타인의 게릴라들은 인질을 위협하는 것으로 반격에 나섰다. 요르단 군인들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인질 위기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때를 기다렸다. 팔레스타인의 위협에 맞설 수 없었던 요르단 병사들은 자신들의 남성다움이 훼손되었다며 군주에게 폭동을 일으킬 태세였다. 그 무렵 후세인 왕이 기갑부대를 사찰하러 왔을 때 군인들이 항의의 표시로 안테나에 여성 속옷을 매달아놓았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 우리야말로 여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전차장이 군주에게 말했다.

9월 17일, 후세인은 군에게 행동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검은 9월은 총력전이었다. 열흘 동안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요르단군과 싸웠는데, 이 분쟁이 지역 내의 큰불로 번질 조짐을 보였다. 분열된 중동 세계의 보수적인 군주 세력의 수장 격인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신해서 개입하려는 "진보적인" 아랍 이웃 국가들에게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6일 전쟁 이후 요르단에게 배치된 이라크군이 후세인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팔레스타인 해방군의 군기를 펄럭이는 시리아의 탱크들이 북쪽 지방을 실제로 침범했다.

팔레스타인의 게릴라 부대와 시리아군의 침공으로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자 사태는 요르단군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고, 이에 후세인은 미국 및 영국과의 우정에 호소했고 심지어는 외부공격으로부터 요르단의 영공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까지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서구의 개입은 이 일대의 우방국들을 보호하려는 소련의 대응을 촉발시킬 위험이 있었다. 사태가 통제 불능에 빠지기 전에 아랍 국가들 간의 중재에 나선 나세르는 분쟁에 대한 해결책을 촉구했다.

나세르는 영향력을 발휘하여 아라파트와 후세인을 9월 28일에 카이로로 불러들여서 이견을 조율하도록 했다. 아랍 국가의 수장들이 성사시킨 협상의 결과로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은 전면적인 정전에 합의했다.

유진 로건, 이은정(2022), 『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497-501.


명백하게 팔레스타인 측이 요르단을 상대로 도발을 하다가 쫓겨난 사건인데 이것이 "친미"와 무슨 관계인가? 이 만화에서 이것보다 심각하게 왜곡한 건 레바논 내전에서 PLO의 활동이라고 하겠는데 그것까지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니 이번 글에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