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뿌린 씨를 걷을 때가 되었다. 그런데 마침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 앞길에 암운이 걸려 있었다.
7월 26일, 아이젠하워 장군은 런던에서 처칠 수상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였다. 나중에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수상에게 미국신문들이 영국군은 전투에서 그 몫을 다 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사상자도 그만큼 나고 있지 않다고 보고 있는데 근심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자기 견해로서는 동부측면에 있는 영국군이 좀더 공격적이어야 할 것이며, 또 그럴 수도 있다고도 말했다는 것이다. 이튿날인 7월 27일 저녁에 처칠 수상은 책임있는 몇몇 사람을 불러 아이젠하워 장군과 회식하게 하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는 이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영국군은 모든 전투를 미군에게만 떠맏기고 있다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기본전략을 승인했으며, 그 전략이 수행되어가고 있는데, 그런데도 독일군의 기갑병력이 계속해서 영국군 전선에 고정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나더니 아이젠하워 장군은 영국군이 소련군이 한 것처럼 동서 양전선에서 동시에 주요공세를 취하지 못한다니 어떻게 된 것이냐고 질문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영국군측 인사들은 동부전선의 소련군이 가진 병력의 우세는 300%인데 비하여 영국군은 실질적으로 겨우 25%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한다. 우리 영국군은 6월 25일에 이미 동부측면에서 돌파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면적인 공세였으며 신속한 일제공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전투를 진행시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나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며칠 안으로 우리는 전쟁사 사상 가장 큰 성공이라고 일컬어질 대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었다.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생색을 낼 수 있는 역할은 못했으며, 따라서 급기야는 미국신문들이 그것이 미군의 승리였다고 떠들어대기 알맞게 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나의 가장 큰 친구의 한 사람인 이 위대하고도 선량한 사람이 그때 자기가 할일 없는 착오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생각을 꿈에도 못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쟁수행이란 일에 부딪칠 때마다 아이크와 나는 반드시 양극단에서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오던 터이다. 나의 군사술로 말한다면, 아군은 항시 균형이 잡히게 배치해 놓고 적군은 이와 반대로 균형을 못잡게 만들어 놓는 것이 그 기본이었다. 나는 언제나 적의 예비대를 넓은 전선에 분산시켜 놓고 그 방어선에 구멍을 뚫어나갈 계획을 세우곤 하였다. 적으로 하여금 그러지 않을 수 없게 해놓고 난 다음에 아군의 예비대로 하여금 적의 전선을 화살처럼 휘어져 들어가 맹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 장군은 언제 어디서 누구의 편에서나 반드시 공격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가 항상 쓰는 수단인 모양이었다.
베델 스미스는 언젠가 아이젠하워 장군을 축구코치에 비유한 일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터치라인을 오르내리며 보는 사람마다 힘을 내라고 응원의 목소리를 내지른다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중순의 프랑스 전선에 있어서 독일군의 처지는 아주 갈팡질팡이었다. 파리는 8월 25일에 함락되었는데 그 이튿날 최고사령부에서 발표한 내부 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2개월 반에 걸친 격전으로 말미암아 이제 유럽에 있어서의 전쟁종결은 멀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일, 특히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일정한 계획이 준비되어 있어서 브래들리를 만나 이에 동의를 얻기로 하였다.
영미합동 제12집단군과 제21집단군의 대병력을 집결시켜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무적의 40개 사단의 대군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브래들리 장군에게 뭉뚱그려 설명하였다. 이 대군으로 하여금 도버 해협의 해안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밀고 올라가게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안트베르펜과 네덜란드 남부를 확보하고 동부로는 아헨과 쾰른을 장악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모든 군사행동은 파리를 주축하로 하여 계획되어 있었다. 그 목적은 겨울이 되기 전에 라인강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신속하게 루르 지방을 장악하기 위하여 벨기에에다 강력한 공군을 두는 데 있었다. 브래들리는 이 계획을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혐성국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