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봐도 알겠지만 윾발 하라리가 쓴 머담한 작전을 보고 삘받아서 소개하고자 한 에피소드 소개하고자함
다른 내용도 재밌긴 하지만 싹 다 올리면 저작권과 내 시간 문제가 있고 해서 내가 제일 감명 깊게 본 에피소드 소개하려고 함
군갤의 아이돌 커티스 르메이께서 말씀했듯이 현대전에 와서는 공장과 그 옆에 사는 스즈키를 조져버리는건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 적의 생산 능력을 조지면 그게 곧 적의 전력 약화니까. 하지만 중세시대땐 그러지 않았다. 물론 무기를 만드는 공방이야 있었다. 문제는 이탈리아 사는 마르코가 창을 만들고 독일에 사는 헤르만이 방패 만들고 영국에 사는 존이 안장을 만드는 그런 구조였다는 점이다. 근대적 공장과 다르게 당시는 따로 따로 떨어진 지역에서 징수를 하는게 일반적이었고 고가치 표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성 정도였다.
하지만 드물게 고가치 표적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었고, 고가치 표적이 잘 경비되었을 때 기사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뒤치기였다. 애초에 속임수나 용병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건 딱히 기사도에 위배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고. 16세기 머추장국을 조지고 부르고뉴도 조진 엘랑국은 필연적으로 통합 스페인의 지배자 저지대의 상속자, 오스트리아 가문의 수장이자 신롬의 황제인 합스부르크랑 전쟁이 터지면서 그런 드문 고가치 표적이 전장에 나타났다.
엘랑국의 프랑수아는 1525년 파비아에서 개털리고 포로가 되어 마드리드 조약에 서명하고 풀려나자 마자 카를 5세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리고 또 졌다. 그나마 독일 개신교와 오스만이 합스부르크를 견제 해준 덕에 버텨서 어찌저찌 1529년 협정을 맺고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1536년 후기로마인 오스만이 쳐맞자 기독교인답게 이를 돕기 위해 이탈리아로 치고 들어가고 무슬림 해적들에게 안락한 항구를 내어주었다. 오스만을 줘패던 카를 5세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완전히 엘랑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방어를 넘어 프랑스로 진군하기로 결정한다.
프랑스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탈리아 전선에서 엘랑 당했고, 알프스를 넘은 합스부르크 군대는 프로방스로 착착 진군해 들어갔다. 훈련도나 규모나 합스부르크의 상대가 안되던 프랑스의 장군 안 드 몽모랑시는 수비군이 쫄릴 때면 꺼내드는 전술을 써먹었다. 일부 거점 (다리, 강둑 등)을 제외하고는 창고와 밭은 태우고, 가축은 도살하고, 우물에 독을 타고, 사람들을 '소개' 시켰다. 반항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뭐 그런거 신경쓰고 청야 전술 쓴 적이 있나.
약탈이 보급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중세에 합스부르크는 당연히 보급난에 시달렸다. 유일한 보급로로 가는 길은 아비뇽과 그 주변의 론강 뿐이었다. 원래 아비뇽은 교황 땅이고 카를5세와 교황은 동맹이었지만, 협상하자고 꼬드긴 뒤 뒤통수를 치는 기사도적 전술로 이미 프랑스에게 함락된 상태였다. 농민들이 펼치는 저항도 귀찮았다. 한 번은 농민들이 화승총을 들고 교회에서 존버한뒤 황제를 저격하고자 한 일도 있었는데, 버마에서 전두환이 살아난거 마냥 화려한 옷을 입은 장군을 황제로 착각하고 쏴버려서 살기도 했다.
청야 전술이 잘먹히고 있었지만, 그걸로 이겼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거나 저지선을 돌파하면 결국 이기는건 합스부르크니까. 게다가 비보가 도착했다. 몇몇 방앗간이 청야 전술에도 부서지지 않고 남아 합스부르크의 생명줄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옥수수를 대충 먹었다가는 소화불량으로 탈이나기 때문에 최첨단 기술로 옥수수를 빻는 방앗간은 생명줄과 같았다. 프랑스도 이를 알고 방앗간은 특히 더 신경써서 부수라고 했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릴리 없었다.
결국 합스부르크가 다른 보급을 마련하기 전에 방앗간을 부수는게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대부분 방앗간은 소수 습격대로 파괴 가능했다. 문제는 오리올의 방앗간이었다. 합스부르크 점령지 한복판에 있는데다가 다른 일은 안하고 방앗간만 지키는 병력 60명도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황제일가를 비롯한 6000명의 병력이 먹는 식량이 오리올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프랑수아는 당연히 이곳을 부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게 쉬우면 애저녁에 부쉈겠지... 이탈리아 용병은 요청을 받자마자 불가능하다고 바로 거절했다. 이유도 타당했다. 프랑스 점령지 마르세유에서 25키로 떨어져 있는 오리올은 수많은 정찰병과 기병으로 드글거렸다. 제국군 본대와 거리도 가깝고, 250명 이상의 부대와 방앗간 수비 60명이 상시 대기중이었다. 즉 25키로를 행군해서 방앗간에서 혈전을 벌이고 부랴부랴 달려온 제국군을 격파 한 뒤 다시 25키로를 걸어와 복귀해야하는 작전이었다. 상식적으로 자살하라는 소리였다.
왕은 닥달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유로파라면 별동대 꾸려서 지역 점령하고 산화하면 되겠지만, 군인도 휴먼이야 휴먼!이다 보니 자살할 생각은 아무도 없었다. 프랑수아는 1000명이 뒤져도 오리올 방앗간을 불태우라고 명령했지만 여전히 아무도 안 나섰다. 한 번 퐁트라유라는 귀족이 호기롭게 나섰다가 세부 내용을 검토하고 엘랑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폭탄 돌리기를 할 때 블레즈 드 몽뤼크라는 30대의 무명 보병 장교가 나선다.
별 볼 일 없는 귀족에 장남도 아니었던 블레즈는 군인으로 입신양명하겠다고 집을 뛰쳐나왔다. 물론 세상은 녹록하지 않아 그가 줄을 댄 지휘관들이 다 죽는 바람에 아직도 하급장교였다. 이때 프랑수아가 오리올 방앗간을 부수는 자에게 큰 포상을 내린다는 소식이 귀에 들려왔다. 블레즈는 정신이 나가 이 임무에 자원한다.
그의 생각은 심플했다. 다른 지휘관은 1000명 정도데려갈 생각이었지만 그는 120명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잘아는 전쟁에 이골이 난 용병 120명이면 충분히 방앗간을 부수고도 남는다는 계산이 섰다. 문제는 복귀길이었는데, 그는 기병이 오기 힘든 산길로 도주하기로 했다. 120명이면 어찌저찌 좁은 산길로도 도망갈만해 보였다. 당연히 다른 지휘관들은 그를 병신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왕이 보채는 상황이니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군바리 심보로 결국 작전을 허락했다.
당시에는 보안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곧 모두가 블레즈가 오리올로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블레즈가 출발하기 위해 성문으로 가자 군인들이 길을 막고 자기도 데려가달라고 사정을 했다. 타반 영주 가스파르라는 사람은 귀족 20명을 끌고 참피 수준으로 떼를 썼고 결국 데려가기로 했다. 시간을 낭비하고 밖으로 나서자 그의 고향 출신 기병들이 따라와서 자기도 이 자살길에 동행하겠다고 떼를 썼다. 결국 이들도 합류했다. 현대 기준으로보면 촌극을 넘어서 참사 수준의 출발이었지만, 당시 정보 전달 수준으로 블레즈가 출발했다는 사실을 합스부르크가 알기는 어려웠다.
블레즈는 기병들을 대로를 타고 먼저 가서 방앗간 옆 성당까지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머지는 계획대로 산길을 탔다. 급속 행군으로 오리올에 도착했을 때 기병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기다릴 시간이 없는 블레즈는 기병없이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밤에 시작할 예정이었던 작전은 해가 뜰락 말락 할 때가 되어야 간신히 시작됐다.
60명은 성벽 근방의 집을 거점으로 수비대를 막기로 했다. 쪽수야 상대도 안되지만 이쪽 병력 규모를 모르니 수비대가 안 나오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블레즈는 이들에게 절대로 방앗간에 지원 오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머지는 방앗간으로 달려갔다. 방앗간에 도착했을 때 수비군은 자는 중이었지만 보초가 있었다.
뉘신지라는 질문에 에스파뉴라고 당당히 답한 볼레즈는 총알 세례를 받았다. 그날의 암구호는 황제의 영토였다.
씨벌 이미지 첨부 안돼서 그냥 썼더만 왜 첨부가 되냐 또
엘랑결말추 후기로마 오스만 비추
앵 약탈이 주가되면 군기에 안좋지않나유? 합스부릌애덜 사병 부사관 간부말도 달라서 통제도 잘안됬다는데 어캐 해결했나봐유
124.54// 내 알기로는 용병은 약탈하는게 일상이었고, 신사적으로 징발하는 경우도 있고, 돈주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는데 어쨌든 현지에서 해결하는게 대부분이었다 캄
팩트1. 중세시대 유럽에 옥수수는 없었다. 옥수수를 빻는 방앗간은 중세시대에 있을수 없다.
밀이겠지 밀은 빻거나 갈아야 하니
중세 시절 얘기에서 corn을 현대에 옥수수라고 생각없이 번역하는 일이 있는데, corn은 원래 옥수수가 아니라 곡식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이 현대에 옥수수에 쓰이게 돼서 그럼. 자주 번역 실수가 나는 부분이지
꿀잼글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