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고당전쟁] 2. 당나라의 '수군혁명'
· [2차 고당전쟁] 3. 몽골리아의 각축
·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 [2차 고당전쟁] 6. 고구려의 '이일대로'
· [2차 고당전쟁] 7. 선택과 집중
후유증: 당고종의 우울
당고종에게 있어 2차 고당전쟁은 당태종의 그늘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이자, 치세의 황금기를 보증할 숙원 사업이었다고 평가됩니다.[8-1] 일찍이 당고종은 655년 황후를 무측천으로 교체하면서 장손무기 등 치세 초기를 주도하던 재상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8-2] 그러나 아직 문벌 세력이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지요.[8-3] 또한 당나라의 군사적 위상도 당태종 시대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습니다.[8-4] 당고종은 이러한 정국의 불안 요소를 극복하고자 2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한 것으로 여겨지며,[8-5] 침공군에 임아상·소정방·정명진·소사업 등 당고종 시대에 본격적으로 중용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한 것[8-6]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당고종은 특별히 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을 지어 상연하며 고구려 원정에 천하평정[八紘同軌]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부여하였습니다.[8-7] 또 1차 침공 당시와는 달리 정국 주도자들의 입장이 통일되어 (지방관의 상소 1건을 제외하면) 전쟁 반대 주장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8-8] 황제의 친정이 논의되는 등[8-9] 당고종이 치세를 통틀어 유일하게 군사 부문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의지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8-10] 이러한 사실들은 2차 고당전쟁이 당고종이 야심차게 추진한 거국적인 사업이었음을 시사합니다.[8-11]
그런데 이처럼 커다란 의미가 담긴 고구려 침공은 전편에서 살펴보았듯 대실패로 종결되었습니다.[8-12] 이러한 결과는 당고종에게 막대한 부담과 좌절감을 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8-13] 패전 이후 당나라의 조정은 불안정 상태에 빠졌고, 신하들은 정쟁에 돌입하여 재상 3명이 1년 단위로 연달아 몰락했지요.[8-14] 이러한 동요 정국은 664년 당고종이 무후의 ‘수렴청정’을 허용하여[8-15] 정치적 책임을 분담하기로 결심한 뒤에야 차츰 안정되었습니다.[8-16]
후유증: 당나라의 피폐
한편 정치 부문뿐 아니라 군사 부문에도 전쟁의 여파가 작용하였습니다. 앞서 당나라는 이미 고구려 원정 도중 철륵의 반란으로 인해 3개 도행군을 회군시킨 바 있습니다. 이를 통해 편성된 토벌군은 662년 3월경 천산(天山)에서 철륵의 항복을 받아내었지만[8-17] 이내 약탈을 벌였고, 철륵은 항복을 취소하고 북상하였지요.[8-18] 장군 양지(楊志)가 철륵을 추격했으나 패해 돌아왔고, 철륵도행군대총관 정인태(鄭仁泰)가 재차 추적을 벌였으나 철륵을 찾기는커녕 식량 고갈과 기상 악화로 14,000기의 경기병 중 단 800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8-19]
정인태군의 피해는 처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8-20] 이후 당나라는 유화책으로 선회하였고, 철륵도안무사(鐵勒道安撫使)로 임명된 계필하력은 철륵에서 주동자라며 내놓은 200여 명을 처형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습니다.[8-21] 반란의 지도자였던 회흘부의 추장 비속독(比粟毒)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회흘을 다스리며 당나라로부터 도독으로 인정받게 되지요.[8-22]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정인태의 작전 실패는 다음과 같이 평가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661년에 동원된 당군은 고구려와 철륵 모두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당나라는 한동안 전쟁의 후유증을 겪게 되었습니다.[8-25] 실제로 당고종은 662년 7월 이전에 백제 고지에 주둔한 당군의 철군을 허용하는 조서를 내렸지요.[8-26] 또 662년 12월에는 하북 지방 사람들이 전쟁으로 피폐해졌다는 이유로 봉선 및 낙양 행차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8-27] 심지어 663년 8월에는 당고종이 직접 요동 전쟁의 참상을 성찰하고, 동방 원정을 대비한 건함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습니다.[8-28]
후유증: 당군의 수세
전투에 동원되는 당군의 규모도 축소되었습니다.[8-29] 예컨대 662년 7월 웅진도행군총관으로 임명된 손인사(孫仁師)는 단 7천 명의 군사를 배정받았고,[8-30] 이듬해인 663년 7월경에야 실제로 병력를 받아 출병할 수 있었습니다.[8-31] 또 662년 12월 구자(龜玆, 쿠차)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풍해도총관(風海道總管) 소해정(蘇海政)의 병력 역시 수천 명에 불과했고, 당나라는 서돌궐의 계왕절가한(繼往絶可汗)과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을 참전시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야 했습니다.[8-32]
물론 당시 서돌궐은 기미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들 역시 당나라의 군사적 자원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662년 소해정과 합류한 계왕절가한은 평소 원한이 있던 흥석망가한의 세력을 병합하고자 흥석망가한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였습니다.[8-33] 그러자 소해정은 흥석망가한을 유인하여 죽여 버렸고, 이에 궁월부(弓月部) 등 서돌궐의 여러 부락이 이반하였지요.[8-34] 이들이 토번군을 불러 당군을 치려 하자 소해정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토번에게 군수품을 뇌물로 주어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8-35] 당나라가 이처럼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계왕절가한까지 곧 사망하자, 서돌궐은 서서히 토번에 귀부하며 당나라의 변경을 노략질하기 시작하였습니다.[8-36]
이처럼 토번의 세력이 서역을 넘어 서돌궐에까지 미치는 상황이었지만, 패전의 여파에 빠져 있던 당나라는 소극적인 대처로만 일관하였습니다.[8-37] 당고종은 토번의 지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던 토욕혼의 구원 요청을 계속 거절하였으며,[8-38] 663년에 토욕혼의 가한이 당나라로 도망쳐 온 뒤에도 변경 방어만 강화했을 뿐 토번의 토욕혼 병합을 막지는 못했습니다.[8-39] 결국 665년부터는 토번이 매년 당의 변경을 침입하기에 이릅니다.[8-40]
고구려의 공세
이러한 상황은 동방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서』·『북사』·『주서』·『수서』 등 5세기 이후를 다룬 중국의 사서에서 고구려의 영토는 하나같이 동서 2,000리·남북 1,000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에서는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3,100리·남북 2,000리로 크게 증대되어 나타납니다.[8-41] 이때 당나라의 1리는 수나라의 1리보다 5%가량 깁니다.[8-42] 따라서 도량형의 차이로는 1,000리 이상의 영토 변화를 설명하기 힘듭니다.
또한 고구려의 서쪽 경계도 『위서』·『북사』·『주서』 등에서는 요동으로 인식되었으나, 『구당서』·『신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에서는 요수를 건너 영주(榮州)에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8-43] 이와 함께 『통전』과 『태평환우기』에서도 고구려 강역의 변천을 서술하며 ‘수대(隋代)를 지나며 점점 커져 동서 6,000리에 이르렀다[至隋漸大, 東西六千里]’라고 언급하였지요.[8-44] 이렇게 다수의 사료에서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7세기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로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게 됩니다.[8-45]
그렇다면 고구려는 662년 이후 다시 요서로 진출하여 과거 구축하였던 적봉진 등의 군사 시설을 복구하고, 이 지역의 유목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8-46] 실제로 당나라는 이후 3차 고당전쟁 이전까지 거란족이나 해족 등을 동원하지 못한 반면,[8-47] 고구려는 거란병을 군사적 자원으로 운용하였습니다.[8-48] 이처럼 고구려가 3차 고당전쟁 직전까지도 요서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보면, 구당서 이후 사서들은 멸망 당시의 고구려 강역을 반영하여 고구려의 서쪽 경계를 영주로 표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8-49]
(참고용 지도. 당나라의 1리는 약 560m이므로, 3,100리는 1,736km이고 2,000리는 1,120km입니다.)
이때 『삼국지』·『후한서』·『주서』 등 당나라 이전을 다룬 사서들에서는 보이지 않던[8-50] 고구려의 가한신(可汗神) 숭배 기록이 유독 『구당서』[8-51]와 『신당서』[8-52]에만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당시 고구려는 세력권 내 이종족들의 신앙을 포용하여 국력 결집을 도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8-53] 이러한 고구려 사회의 변화는 고구려가 가한신을 섬기는 요서의 유목민들을 아우른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8-54]
백제부흥군의 붕괴
물론 위 같은 고구려의 팽창은 남부 전선에 얼마간 소홀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8-55] 고구려는 경제의 중심지인 평양 일대에서 장기간 전쟁을 치렀으므로, 661년의 수확기를 놓치고 농업 기반 시설이 파괴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8-56] 이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 방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기 어려웠고, 663년 왜군과 연합해 덕물도 근방에서 손인사가 이끄는 당군을 저지하려 시도한 것[8-57]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백제 고지에 상륙한 손인사군은 기존의 당군 및 신라군과 합세해 백강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요.[8-58] 이후 고구려는 지수신과 부여풍의 망명을 받아주는 정도의 대응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8-59]
이러한 백제부흥군의 실패는 확실히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에 호재로 작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8-60]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당고종은 백강 전투가 벌어진 다음 달인 663년 8월에 동방 원정을 파하겠다는 조서를 내렸지요.[8-61] 이 때문에 당나라는 현실적으로 고구려 원정을 재개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제기됩니다.[8-62] 그런데 664년 7월에 이루어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돌사성(突沙城) 공격[8-63] 등 당고종의 고구려 정복 추구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하는 사료도 존재합니다. 이에 당나라의 원정 중단을 일시적·임시적인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8-64]
예컨대 664년 10월 유인궤가 당고종에게 올린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양국의 타협책: 태산봉선
동아시아 세계에서 봉선은 통치자가 천명을 받았음을 표현하는 의례일 뿐 아니라, 천하를 통일하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음을 천지에 알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8-68] 실제로 당고종은 태산 봉선에서 천하가 태평하고 국내외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화목하다고 선언하였지요.[8-69] 그런데 이 봉선에는 고구려 역시 태자 복남(福男)을 보내 참여했습니다.[8-70] 그렇다면 고구려는 당나라의 봉선 공표에 호응하여 대당 온건책을 채택하였으며, 당나라 중심의 세계 질서에 합류하여 조공 책봉 관계를 회복함으로써[8-71] 전란의 종식을 도모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행보는 전쟁 후유증과 국제적 고립,[8-72] 남방 전선의 압박 증가[8-73] 등 대내외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출구 전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당나라는 천하통일을 표방하기 위해 주변국들의 봉선 참가를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8-74] 예컨대 왜국의 경우, 당나라는 왜국 조정이 사신의 지위 문제로 사절단의 입경을 거부하자 사신의 지위를 높여 재차 파견하는 등[8-75] 일정한 저자세를 취하며 상대국의 봉선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 볼 때, 당나라는 고구려에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먼저 관계 개선을 제안했을 공산이 큽니다.[8-76]
고구려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봉선에 참가하여 화친을 확정지으려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8-77] 특히 복남은 665년 10월에 당고종을 알현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고구려에 대한 무력도발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여 소기의 성과를 얻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8-78] 이렇게 봉선을 통해 전쟁으로 실추된 당고종의 위신을 정립[8-79]해 주는 한편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나아가 조공 책봉 관계까지 회복한다면 향후 당나라가 고구려를 재침공할 명분은 사라지는 것이었지요.
전선에 위치해 있던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대당관계의 전기를 크게 반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8-80] 결과를 떠나 훌륭한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태자 복남이 봉선을 위해 출발할 당시까지만 해도 청사진은 곧 이루어질 듯했고, 고구려는 실제로 외교적 노력을 통해 원만한 전후 처리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8-81]
연개소문의 유언이 지켜졌더라면,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8-1]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92쪽.
[8-2]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24-25쪽.
[8-3]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75-76쪽.
[8-4] 서영교, 「『新唐書』 日本傳에 보이는 唐高宗 令出兵援新羅 璽書의 背景」, 『역사학보』 237, 2-3쪽.
[8-5]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14쪽.
[8-6]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84쪽.
[8-7]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88-89쪽.
[8-8]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74쪽.
[8-9]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8-10]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87쪽.
[8-11]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4쪽.
[8-12]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6쪽.
[8-13]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03쪽.
[8-14]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00쪽.
[8-15] 『資治通鑑』 卷201, 麟德 元年(664) 12月, “自是上每視事, 則后垂簾於後, 政無大小皆與聞之.”
[8-16]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15쪽.
[8-17] 『舊唐書』 卷83 薛仁貴傳.
[8-18] 『資治通鑑』 卷200, 高宗 龍朔 2年 3月 조.
[8-19] 『資治通鑑』 卷200, 高宗 龍朔 2年 3月, “仁泰將輕騎萬四千, 倍道赴之, 遂逾大磧, 至仙萼河, 不見虜, 糧盡而還. 值大雪, 士卒饑凍, 棄捐甲兵, 殺馬食之, 馬盡, 人自相食, 比入塞, 餘兵才八百人.”
[8-20]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사학』 57, 2014, 338쪽.
[8-21] 이성제, 「7세기 東突厥系 蕃將과 蕃兵의 활동 : 麗唐戰爭 시기 활동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5, 2013, 203쪽.
[8-22]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사학』 57, 2014, 339쪽.
[8-23]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5쪽.
[8-24] 『資治通鑑』 卷201, 龍朔 3年 8月 戊申(27), “上以海東累歲用兵, 百姓困於徵調, 士卒戰溺死者甚眾, 詔罷三十六州所造船, 遣司元太常伯竇德玄等分詣十道, 問人疾苦, 黜陟官吏.”
[8-25]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9쪽.
[8-26] 『資治通鑑』 卷200, 高宗 龍朔 2年 7月 조.
[8-27]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2年 12月, “詔以方討高麗·百濟, 河北之民, 勞於征役, 其封泰山·幸東都並停.”
[8-28] 서영교, 「고구려의 最後와 彗星」, 『진단학보』 138, 2022, 51-52쪽.
[8-29]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8쪽.
[8-30] 『新唐書』 卷3, 本紀3 高宗 龍朔 2年 7月;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百濟.
[8-31] 김영관, 「就利山會盟과 唐의 百濟 故土 支配 政策」, 『先史와 古代』 38, 2009, 68쪽; 김영관, 「百濟 滅亡後 扶餘隆의 行蹟과 活動에 대한 再考察」, 『百濟學報』 7, 2012, 86~89쪽;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6쪽.
[8-32]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2年 12月 조.
[8-33]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8쪽.
[8-34]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2年 12月 조.
[8-35] 정병준, 「吐蕃의 吐谷渾 倂合과 大非川 戰鬪 : 唐朝의 韓半島 政策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218, 2013, 319쪽.
[8-36]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8쪽.
[8-37]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9쪽.
[8-38]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3年 5月 조.
[8-39] 정병준, 「吐蕃의 吐谷渾 倂合과 大非川 戰鬪 : 唐朝의 韓半島 政策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218, 2013, 320쪽.
[8-40] 정병준, 「吐蕃의 吐谷渾 倂合과 大非川 戰鬪 : 唐朝의 韓半島 政策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218, 2013, 323쪽.
[8-41] 이인철, 「7세기 고구려 군사활동의 주요 변수」, 『신라문화』 24, 2004, 215쪽;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57쪽.
[8-42] 김상보, 나영아, 「고대 한국의 도량형 고찰」, 『동아시아 식생활학회지』 4(1), 1994, 7쪽.
[8-43]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57-158쪽.
[8-44] 『通典』 卷186, 邊防2 東夷 下; 『太平寰宇記』 卷173, 四夷2 東夷2 高勾驪國.
[8-45]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60쪽.
[8-46]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75-176쪽;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61쪽.
[8-47] 김지영, 「7세기 중반 거란의 동향 변화와 고구려-660년 거란의 이반을 기점으로-」, 『만주연구』 12, 2011, 89쪽.
[8-48] 『新唐書』 卷110, 列傳35 泉男生傳,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與契丹·靺鞨兵內附, 遣子獻誠訴諸朝.”
[8-49]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78쪽.
[8-50]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10쪽.
[8-51] 『舊唐書』 卷高199, 列傳149 東夷 高麗, “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8-52]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8-53]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11쪽.
[8-54]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10-211쪽.
[8-55]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62쪽.
[8-56]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8쪽.
[8-57]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6쪽.
[8-58]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百濟.
[8-59] 김지영, 『7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189쪽.
[8-60]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8-61] 김진한, 「보장왕대 고구려의 대당관계 변화와 그 배경」, 『고구려발해연구』 39, 2011, 117쪽.
[8-62] 정원주, 「男生의 失脚 배경과 그의 行步」, 『한국고대사연구』 75, 2014, 315-317쪽;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84쪽;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8-63]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4年 7月
[8-64] 김영관, 「就利山會盟과 唐의 百濟 故土 支配 政策」, 『선사와 고대』 38, 2009, 73쪽; 김진한, 「보장왕대 고구려의 대당관계 변화와 그 배경」, 『고구려발해연구』 39, 2011, 117쪽.
[8-65]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8-66]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52쪽.
[8-67] 이민수, 「7세기 중화적 천하질서에 대한 가장 강렬한 저항 - 동북아역사재단(임기환 지음), 『고구려와 수 · 당 70년 전쟁』 -」, 『군사』 126, 2023, 221쪽.
[8-68]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79쪽.
[8-69] 『冊府元龜』 卷36, 帝王部37 封禪2, 乾封 元年, “属國家無事, 天下太平, 華夷乂安, 遠近輯睦, 所以躬亲展礼, 褒赞先勋.”
[8-70] 『資治通鑑』 卷201, 高宗 麟德 2年 8月 조.
[8-71] 이성제, 「唐 高宗의 泰山 封禪과 高句麗의 對應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220쪽.
[8-72]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8쪽.
[8-73] 김지영, 『7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207쪽.
[8-74] 이성제, 「唐 高宗의 泰山 封禪과 高句麗의 對應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210-211쪽.
[8-75] 이성제, 「唐 高宗의 泰山 封禪과 高句麗의 對應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213쪽.
[8-76] 이민수, 「7세기 중화적 천하질서에 대한 가장 강렬한 저항 - 동북아역사재단(임기환 지음), 『고구려와 수 · 당 70년 전쟁』 -」, 『군사』 126, 2023, 221쪽.
[8-77]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84쪽.
[8-78]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76쪽.
[8-79]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8-80]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222쪽.
[8-81]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78쪽.
워매 참고문헌이 본문 내용의 절반이네, 정주행하기 전에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