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관료 사이의 정치 논쟁 중 가장 폭발적인 것의 하나는 흑인 미국 남성 병사와 백인 영국 여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전쟁의 과정에서 13만 명의 흑인 미군이 영국에 주둔했다. 그들은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군대의 한 부분에 불과했지만 마을 선술집, 언론, 의회 작전실 등에서 강도 높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42년 첫 번째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미국 군대는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흑인들은 미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실세가 되었다. 민1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공화당에서 민1주당으로 지지를 바꾼 북쪽 도시의 수천 명의 흑인 유권자에게 빚을 지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1942년 영국 사회는 압도적으로 백인이 많았는데,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제국적 우월함이 지배적이었다. 영국 군대는 인도와 서인도에서 동원된 연대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싸웠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싸우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 정부는 공히 연합 전쟁 노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국에 주둔한 흑인 미군 남성이 어떻게 백인 영국 여성과 관계할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론하면서 인종 대응책을 준비하였다.

백인 영국 여성이 흑인 미국 병사와 데이트할 때, 여성들은 미국과 영국의 남자다움을 비교했다. 흑인과 백인 미국 남성을 비교하면서 그들은 흑인이 좀더 예의바르고 교제하기 좋고 '이국적'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1943년에 일부 백인 영국 여성은 흑인 병사가 아빠인 아이들을 낳았다. 일부는 흑인 미국 남자 친구와 결혼을 선택하기도 했다. 위험한 경향으로 볼 수 있는 이런 일의 발생에 윈스턴 처칠 내각의 관료들은 놀랐다.

상층부의 논의는 1942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내각 논의에서 세 가지 가능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첫째는 미군이 흑인 병사를 영국에 보내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 둘째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흑인 병사를 영국의 특정 해안 기지에만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이 모든 것이 실패할 경우 흑인 남성 병사가 백인 영국 여성을 교제의 상대로 볼 필요가 없도록 미군이 많은 흑인 여성 병사나 적십자 자원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도 실현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면서 영미의 군사 동맹은 해변 마을에 잠복하면서, 또는 영국 밖을 지키고 잇는 10만 명의 미국 군인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 백인이 리버풀항에서 바다 노동자로 일했던 서인도 흑인 남성에 등을 돌렸던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해변 가의 격리가 인종적 적대성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수천의 흑인 여성을 영국으로 보내는 것을 거절했다.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유색인종의 진보를 위한 전국연합) 지도자는 그런 계획이 흑인 여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루스벨트 정부에 명확하게 전달했다. 흑인 여성은 병사가 되기 위해서 미국 군대에 지원했지, 성적 교제 대상이 되기 위해서 지원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영국인은 이 계획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백인 영국 남성이 흑인 미국 여성과 데이트를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단지 800명의 흑인 여성 군인이 영국에 파견되었고, 1945년 전까지는 6888중앙우편 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결국 백인 영국 여성이 흑인 병사와 데이트하는 것을 막으련느 시도는 지역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공식적, 비공식적인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부 관찰자의 눈에는 운동으로까지 확대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근처 기지에 주둔한 흑인 남성과 만났던 어떤 영국 여성은 성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경고를 받았다. 또한 흑인 병사와 데이트하는 여성은 '문란'하거나 영국에 반역하고 있는 것으로 취급당하기도 했다. 나아가 흑인 병사가 개입된 행동 규범 위반이 있을 때마다 언론은 인종을 명시하곤 했다. 게다가 흑인 병사와 데이트하도록 딸을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으로 지역 신문에 그려지곤 했다.


전쟁 초기에 흑인 미국 병사는 영국 신문과 국회의원들로부터 백인 병사보다 강1간과 같은 성범죄로 기소되거나 무거운 판결을 받을 것이라는 의심을 광범위하게 받고 있는 대상이었다. 1945년 흑인 병사는(대다수가 남성인 상황에서) 유럽에 주둔한 미국 군인의 8%만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유죄 입증된 모든 미국 군인의 21%를 대변했다. 범죄사실을 유형별로 나누어보면 불일치는 훨씬 더 놀랍다. 흑인 병사는 유죄 입증된 성범죄의 42%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영국 의회는 미국 파견군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영국 땅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 미국 병사를 처벌하는 권한을 미국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 중이라는 예외적 환경에서도 미국인들이 자신의 인종적, 성적 제도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많은 백인 미국인은 만약 전쟁 중 영국에서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사이의 성적 관계가 허락된다면 전쟁 이후 미국에서 인종 간 성적 분리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러나 정부나 언론의 설득은 별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43년 8월 시행된 대중 관찰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인 7명 중에 1명만이 흑인과 백인 사이의 결혼을 반대했다. 25%는 흑인에 대해서 좀 더 친근하게 여겼는데, 부분적으로는 흑인 미국 병사와의 만남 때문이라고 면접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즈음, 특히 백인 영국 여성과 흑인 병사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 젊은 백인 영국 여성이 흑인 병사와 지역 선술집에 가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미국 군대 지휘관들은 이런 논쟁에 수동적이지 않았다. 미군 유럽 지역 고위 지휘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흑과 백의 데이트를 용인했는데, 영국에서 미국인이 흑인 차별적 분리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미국 영국 간의 동맹을 해칠 수 있다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미국 장교들은 브리스톨이나 레스터의 백인과 흑인 병사의 갈등은, 흑인 군대가 많지 않은 지역 백인 여성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백인 병사의 정당한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는 혼혈 결혼을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자신의 지휘 아래 남성들이 영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권한을 이용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즈음에 적어도 6만 명의 영국 여성은 전쟁 신부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위해 미국 관료들에게 신청서를 냈다. 남편이 흑인인 경우에는 아주 적은 수만 받아들여졌다. 영국과 미국 중간층 관료들 사이에 흑인 병사와 백인 영국 여성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신사협정이 있었던 듯하다. 결혼을 하려는 흑인 병사는 재배치되거나 상사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여성은 미국 군대 장교나 영국 복지관에게 상담을 받았다.





출처: 바나나, 해변, 그리고 군사기지, 신시아 인로 저, 권인숙 옮김, 청년사, 2011년, 112~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