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잉여분의 식량이 있다는 이런 주장은 마오쩌둥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6개월 전인 1월 28일에 그는 최고위원회에서 식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했었다. 그는 "먹을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데 어찌 할 것인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적게 먹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 동양식으로 보자면 그것은 건강에 좋다. 서양인들의 음식에는 지방이 많아 더 먹을 수록 지방 섭취만 늘어난다. 고기를 먹는 서양인들은 경멸할 만하다." "나는 덜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많이 먹고 위만 커져서 만화에 등장하는 외국 자본주의자들처럼 되면 어찌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언어 도단은 올챙이배를 가진마오쩌둥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굶주린 농민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2월에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식량이 부족하지만 인민들이 덜 먹으면 된다." 6개월 후에 그는 이렇게 말을 바꾸었다. "식량이 너무 많다." 이런 상호 모순되는 말 바꾸기의 목적은 하나였다. 즉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식량을 수탈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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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반복적으로 농민들과 마을의 관리들이 곡물을 숨긴다고 비난했다. 그가 한 번은 1959년 2월 27일에 최고위 인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생산 팀들이 자기네들끼리 분배하기 위해서 식량을 감추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식량을 지하의 비밀 저장고에 감추고는 경비원과 보초까지 세웠다." 다음날 그는 다시 농민들이 "낮에는 홍당무 잎을 먹고 밤에는 쌀밥을 먹은다"고 주장했다. 그는 농민들이 식량이 없는 것처럼 가장할 뿐 사실은 식량을 가지고서 몰래 소비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측근들에게는 농민을 경멸하는 속내를 드러냈다. "농민들은 식량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공산주의자 기질이 전혀 없다! 농민은 결국 농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만 행동할 뿐이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감출 식량마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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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4월에 마오쩌둥의 모범적 지역인 허난 성이 다가오는 겨울에는 300억 세제곱미터의 토석을 운반할 것을 약속하자 그는 "3만 명의 사람들이 죽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성들 중의 하나인 안후이 성은 200억 세제곱미터의 토석을 운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2만 명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마오쩌둥은 말했다. 간쑤 성의 고위 관리들이 이런 사업에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희생되는 것"을 호소하자 마오쩌둥은 그들을 규탄했을 뿐만 아니라 "우파적인 반동분자들"이라고 처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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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또 "중국을 돼지들의 나라로 바꾸어 돼지 분뇨와 대지고기가 넘쳐나게 하여, 고기를 수출하고 철강재를 수입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돼지들에게 먹일 사료를 어떻게 조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마오쩌둥의 통치 기간 중 1957년부터 1961년 사이에 양돈 농가의 돼지 사육 두수는 48% 이상이나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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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벌인 많은 연극들 중의 하나에서 그는 1958년 11월 6일("그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싶어도 그들은 휴식을 마다한다"고 말하면서) 농민들이 휴식시간을 거절했다고 최초로 주장하고는 너그러운 척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최적의 하루 일과를 다음과 같이 체계화 했다. "내년 1월 1일부터는 이렇게 변경할 것이오. 8시간의 수면, 4시간의 식사와 휴식, 2시간의 학습[즉 사상교육] 즉 '84-4-2-10'을 보장할 것이오..." 여기서 10은 노동시간을 의미랬다. 그는 마찬가지로 관대한 어조로 며칠의 휴일을 인정했다. 남자들에게는 한 달에 "적어도" 이틀의 휴일을 주고 여자들에게는(그가 당초에 생각했던 사흘에서 올려서) 닷새의 휴일을 허용했다. 


 사실 이런 자그마한 양보는 부분적으로는 전염병이 돈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무엇보다도 노동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마오저둥을 놀라게 한 보고는 베이징 부근에서 장티푸스가 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민들이 매일 노동할 수 있도록 "질병을 최대한 감소시킬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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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공사 간부들의 다른 임무는 농민들이 자신들이 거둔 농작물을 "훔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무서운 처벌이 만연했다. 일부 사람들은 생매장되었으며, 일부는 밧줄로 목이 졸려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코를 베이는 경우도 있었다. 한 마을에서는 약간의 음식물을 훔쳤다는 이유로 붙잡혀 생매장 당하고 있던 4명의 어린이들이 부모들의 필사적인 애원 덕분에 흙이 허리에 찼을 때에야 가까스로 구조된 경우도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한 어린이가 설익은 음식물을 훔치려고 했다는 죄로 네 손가락이 잘렸다. 또다른 마을에서는 음식물을 훔치려고 했던 두 어린이의 귀를 전깃줄로 꿰뚫은 다음, 그들을 벽에 매달아놓은 일도 있었다. 이 시기에 전국에서 제출된 모든 보고서에는 이런 잔혹 행위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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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심한 기근이 계속되는 동안 일부 사람들은 인육을 먹었다. 마오쩌둥 사후에 안후이 성의 펑양 현에 대한 한 연구(곧 억압되었다)에서는 1960년 봄에만 63건의 인육을 먹은 사건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중에는 한 부부가 8살 난 아들을 목졸라 죽인 후 먹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펑양 현이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민의 3분의 1이 아사한 간쑤 성의 한 현에서는 인육을 먹는 일이 흔했다. 부인과 누이동생, 그리고 자식들 모두가 죽은 한 마을의 간부는 훗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을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육을 먹었습니다. 저기 인민공사 사무실 밖에서 햇볕을 쬐면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죠? 저 사람들 중의 일부도 인육을 먹었습니다. 하도 굶주리다보니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참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군대가 지키고 있는 국가의 양곡 창고에는 많은 식량이 있었다. 일부 식량은 변질되어 방치되었다. 한 폴란드 학생은 1959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중국 남동 지방에서 "수 톤의 썩고 있는" 과일을 목겨했다. 그런데도 상부에서는 "인민들이 굶어죽더라도 양곡 창고의 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출처: 마오 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장융 외 1명 저, 황의방 역, 2006년, 까치, 561~576p




진심 지금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 다시 살아돌아오면 살 수는 있을려나? 핑핑이가 약간 비슷하게 행동은 한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