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13일 이른 아침 제6중대는 3개의 공격목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대장 김교수 대위는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에 의거 중대를 진두지휘하면서 공격전을 전개하였다. 02시 55분에 제1 목표를 점령한 제6중대는 03시 20분에 제2 목표를, 04시 50분에는 제3 목표를 완전탈환하고 엄중한 경계에 돌입하였다.
20시 45분에 적은 총 6개 중대 병력으로 반격을 가해왔으나, 제6중대는 이를 격퇴하였다. 신속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한 중대장은 적의 재공격 저지에 전력을 경주하도록 중대원을 격려하였다. 당시 공격에 있어 기동성을 지니고 있던 적은 수류탄 투척이 가능한 지점까지 접근하여 피아간에 수류탄전이 전개되었으나, 21시 40분경 적은 개전 이래 초유의 대 포격과 더불어 물밀듯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끊임없이 쏘아대는 무수한 적의 포탄으로 인해 제6중대의 모든 진지는 완전파괴 되었고 유선통신망마저 두절되었다. 험악한 암석만으로 형성된 극히 불리한 지형조건에 설상가상으로 밤에는 비까지 내리는 최악의 상황에서 수십 배에 달하는 적을 맞은 제6중대는 접전 초기부터 처절한 육박전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수십 배에 달하는 대적의 내습속에서 김 대위는 침착하게 중대의 진두에서 작전지휘에 임하였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적의 포화는 그 강도가 더해갔고 적의 병력도 급속도로 증강되었다. 마침내 1개 연대 규모 이상의 적이 제6중대를 완전포위하게 되자 적의 최후공격이라 판단한 김 대위는 전 포병의 일제사격을 요청하였다. 대대적인 포격에도 불구하고 적은 화망(火網)을 뚫고 진지를 향해 돌진해왔다. 중대장을 비롯한 중대원은 수류탄전에 이어 육박전을 감행하였으나, 중앙이 돌파되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김 대위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원에게 동굴로 대피할 것을 명령하였다. 즉각적인 아군 전 포병의 진내사격이 제6중대 진지인 ‘가’고지를 강습하였고, 포격에 의해 유.무선이 두절되었다. 제6중대가 포진한 능선상에서는 피아간의 일대 혼전과 함께 전사상 유례가 드문 대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김 대위는 모든 중대원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한 치도 물러나지 말고 적을 무찌르도록 격려하며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몰려오는 적을 향해 몸소 수류탄을 투척하며 총검을 휘두르는 등 오직 진지 사수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적진으로부터 날아든 한 발의 총탄이 김 대위의 복부에 명중됨으로써 그는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중대장의 죽음은 모든 중대원의 적개심을 극도로 자극, 좌우에 위치한 인접부대가 이미 적에게 돌파 당한 위기 속에서도 7➰8시간 동안을 고군분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고군분투하던 중대원들도 06시 50분 적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이 전사하고, 단지 6명만이 생환하였다.
이처럼 김 대위는 작전계획에 의거 침착하고 대담한 진두지휘로써 파상적인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중대의 진지를 사수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김 대위를 비롯한 모든 중대원의 분전은 좌우 인접부대가 돌파당한 위기속에서도 7➰8시간 동안 교암산을 고수함으로써 각 연대 및 사단 등 아군의 안전한 철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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