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납고에 달려오긴 했으나 적기를 추격할 비행기는 한 대도 없었다. 모두 '잠자리'뿐이다. '잠자리', 그것은 L-4형 및 L-5형 정찰기의 별명이다. 정찰과 연락 업무에나 쓰이는 기종으로 그 흔한 기관총 한 자루도 장착하지 않은 그야말로 잠자리처럼 나약한 경비행기다.


이근석 대령은 이름뿐인 공군의 현실을 뼈저리게 절감해야만 했다. 그는 전투기까지 갖춘 적의 공격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이 야크기를 이것 보라는 듯이 김포와 여의도를 거쳐 서울 상공으로 최초 출격시킨 것은 38선 전역을 기습 돌파당한 지 여섯 시간 뒤의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바로 그날의 오전 9시 무렵이다


적의 남침 통보를 받고 여의도 공군 비행단도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야크기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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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맺힌 각오로 비행단은 6.25 그날 오후부터 출격하기 시작했다. 문산 방면으로, 의정부 방면으로, 멀리는 춘천까지도 출격했다. 그런데 비행단은 정찰이나 연락 임무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놈들의 전차를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폭탄으로 공격하자! 며 전차공격을 열렬히 주장했다. 의정부가도와 문산가도를 줄지어 남하하는 적의 T-34형 전차에 대한 적개심의 외침이었다. 주지하는 것처럼 공산군의 기습 남침의 선봉장이며 공격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T-34 전차와 SU-76 자주포였다. 말할 것도 없이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중무장 병기였다.


이에 대해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켓포가 있긴 했지만 전차의 장갑을 박살 낼 만한 대전차 무기는 아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단 한 개의 대전차지뢰도 없었다. 전 전선에 걸쳐 국군이 홍수를 견디다 못한 둑처럼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 것도 전차와 자주포 때문이었다.



M1 57mm 대전차포

M9 2.36인치 로켓포


보라매들은 굳은 결심을 했다. 그렇게 해서 육군으로부터 30파운드짜리 폭탄 274개를 보급 받았다. T-6형에 8~10개씩을 장착하고, L-4, L-5형은 장착할 곳이 없어서 뒷좌석의 정찰원이 두개씩을 품에 안기로 했다. 30파운드짜리 폭탄 두 개면 60파운드로 상당한 무게였지만 오히려 더 싣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1950년 6월 27일부터의 일이다.


의정부와 문산 전선에서는 전후무후한 손으로 던지는 폭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차와 자주포를 발견하면 전속력으로 급강하하여 폭탄 두 개를 떨어뜨리고 다시 급상승해서 벗어나는 눈물겨운 폭격이었다. 목표물을 계기판으로 조준하는 것이 아니라 뒷좌석의 정찰원이 상반신을 내밀어, 전차와 자주포 위치를 눈짐작으로 겨냥해 손으로 직접 집어던지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출격마저 우리 공군에게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그야말로 비장한 출격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명중되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보라매들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직 전차를 부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이 비장한 출격을 감행해 나갔던 것이다.



구선진 중위는 단장실로 뛰어갔다. 6월 27일 현재 비행단장은 김정렬 공군참모장이 겸하고 있었다. 단장이던 이근석 대령이 6월 26일, 김영환 중령등 조종 장교 아홉 명과 함께 F-51 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 이다츠케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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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진 중위는 마침내 허락을 받고 출격했다. 목표는 의정부와 창동 상공, 적의 전차부대를 발견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좋았다.


여의도기지를 이륙해서 서울 광나루까지 한강을 따라 비행하다가 기수를 북으로 돌렸다. 그는 처음부터 저공비행으로 전진했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 가득히 늘어선 적의 전차 스무대 가량이 눈 아래로 들어왔다.


구선진 중위는 엔진 속도를 높이면서 다짜고짜 기수를 내리꽂았다. 고도 약 100미터, 직선거리로 약 100미터를 일직선으로 활공하듯 돌입해 갔다. 순간 전차 주변에서 무수한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공사격의 불꽃이었다.


기체를 향해 그려 내는 탄도의 역기류에 휘말려 L-4기는 무서운 진동을 일으켰다. 퍽퍽거리는 충격은 적탄이 비행기의 날개를 꿰뚫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뒷자리의 박상도 중사는 이미 폭탄을 한 개를 집어 들고 있었다. 그는 상반신을 창밖으로 내밀어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첫 번째 폭탄은 빗나가서 약 10미터 밖에서 폭발했다.


구선진 중위는 다시 고도를 잡아 기수를 되돌렸다. 적탄이 무더기로 스치면서 일으키는 진동은 여전했다. 구선진 중위는 다시 기수를 내리꽂았다. 제일 앞에선 전차가 눈앞에 가득히 부풀어 올랐다.


박상도 이등중사가 던진 두 번째 폭탄은 선두에 선 전차에 빨려들어 가듯이 떨어졌다. 대지를 울리는 한 발의 굉음과 함께 박상도 이등중사가 외쳤다. 전차의 뒤쪽 엔진 덮게에서 섬광이 번쩍인 것으로 보아 폭탄이 보기 좋게 명중한 것이다.


기지에 도착해 기체를 점검해 보니 L-4기는 모두 열일곱 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이근석 대령이 이끄는 F-51 전투기 열 대가 전선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구선진 중위가 마지막 출격을 감행한 지 일주일이 지난 7월 3일이었다.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군 청산면에서 태어난 이근석 준장(전사 이후 추서)은 어린 시절부터 하늘을 동경했다. 하늘을 마음껏 날아 보겠다는 꿈이 이루어져 그가 카미타니 소년항공학교에 입교한것은 1933년의 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나자마자 귀국한 그는 1948년 4월 1일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1949년 10월 1일 공군사관학교가 설립되면서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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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력도 느리고 아무런 무장도 갖추지 못한 경비행기로 전차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공군의 숙원사업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됐다. 미 극동사령부에서 F-51 전투기 열 대를 지원해준 것이다.


6월 28일 일본 이다츠케 기지에서 F-51 전투기 조종교육을 받고있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


그는 아홉 명의 전투 조종사를 이끌고 일본으로 넘어갔다. 태극 마크도 선명한 열 대의 전투기와 1950년 7월 2일 마침내 조국 상공으로 되돌아온 그는 쉴 사이도 없이 편대를 지휘하며 출격했다. 1950년 7월 4일 적은 이미 수원 남쪽의 평택 부근까지 밀고 내려왔다.


당시 지상전투는 아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세한 병력과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유엔군 산하 미군 제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대대가 평택과 오산 사이의 고갯길에 당도한것이 바로 이날이었지만 적을 과소평가한 탓으로 대전차 무기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북한군은 경부선을 따라 주공격 방향을 잡았다.


이근석 대령은 편대를 이끌고 경부선 도로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평택을 지나 오산이 가까워질 무렵 그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적들이 경부선 국도를 유유히 남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대에 공격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그의 전투기는 기수를 급강하했다. 비행기 날개와 몸체에 태극마크도 선명한 전투기로 적을 공격하기 시작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편대의 기총소사는 세 차례나 반복됐다. 네 갈래로 길바닥에 머리를 쳐박은 적의 보병부대는 부차적인 목표일 뿐 첫 번째 공격모표는 어디까지나 전차였다. 첫 번째 공습을 성공적으로 끝낸 편대를 이끌고 그는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전차를 찾아서 그는 수원을 지나 안양과 시릉이 바라보는 상공에 도착했다. 시흥 남쪽으로 약 2km 지점에 다다른 이근석 대령은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내밀었다. 20여 대가 넘는 적 전차부대가 한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뜨거운 피가 그의 온몸을 끓어오르게 했다. 순간 잠자리 정찰기를 몰고 수제 폭탄을 내던져야 했던 일주일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적의 자동 화력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소나기 같은 탄환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차 뿐이었다. 그는 선두에 선 적 전차를 조준기에 담았다. 전차부대의 움직임을 묶어놓기 위해서였다.


고도계 숫자가 1000 이하로 떨어졌다. 900에서 800 그리고 숫자가 750피트의 고도를 가리키는 순간 기관총 스위치를 힘껏 눌렀다. 그와 동시에 기수를 치켜올리면서 반전을 거듭하여 적탄을 피했다.


선두에 있던 전차에서 검은 연기가 퍼지더니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폭발 진동이 상공까지 울리는 듯했다. 제2번기의 억센 목소리가 리시버에 들려왔다. 이어 제3번기도 아슬아슬하게 저공까지 급강하하여 보기 좋게 전차를 명중시켰다. 편대는 차례대로 급강하를 거듭한 뒤, 계속해서 기총소사를 가했다. 그리고 네 번째 공격을 마치고 기수를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이근석 대령은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꼇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적탄이 기체의 엔진에 명중한 것이다. 순식간에 비행기에서 불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버튼만 누르면 좌석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는 비상탈출 장치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의 천재 라고 불리던 그였기에, 비행기의 구석구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기체를 휘감는 불길이 마치 자신의 일부가 타는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커다란 불덩이가 되어 창공을 반원형으로 수놓고 있는 그 화려하고 비장한 모습에 편대원들은 목멘 목소리로 외쳤으나 되돌아오는 리시버 속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엄숙하기만 했다.

"조국의 하늘을 부탁한다."


지상을 향하는 낙하지점에는 적의 전차가 있었다. 그렇게 하늘의 영웅 이근석 대령이 1950년 7월 4일 시흥 상공에서 산화하였다.



북괴 시발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