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차대전 종전 이후 대부분은 마지노선을 '실패작' 치부했지만, 전후 프랑스군의 첫 공병총감 루이 포르탱 장군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전반적인 전략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40년 당시 마지노선은 개별 교전사례들을 보면 나름대로 괜찮게 활약했다고 보았고, 요새선의 전후 재건을 지지했다.


1946년, 200여명 규모의 조사팀이 마지노선의 각 요새들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크고 작은 손상을 입어 복구가 필수적이란 보고가 올라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요새들이 적은 투자로 수리 가능하고, 남아도는 무기들을 투입하면 원상복구도 가능할 거란 긍정적인 분석도 올라왔다.


1948년 말이면 '수습 가능하다'고 판정된 마지노선의 전투 블럭의 포탑 66%가 재생되었고, 요새 탄약고의 50%가 기능이 복구되었으며, 대부분의 요새들에선 디젤 발전기가 수리되어 다시 작동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퇴역한 포르탱 장군을 이어 로베르 드로마르 장군이 총감에 취임했다. 그 역시 마지노선 재생계획의 지지자였다.


재생된 요새선이 막아낼 가상적은 더 이상 독일군이 아니었다. 새로운 적은 (1949년에 동독이 될) 독일 동부에 주둔 중인 소련군이었다. 1920년대의 마지노선이 상정한 적은 경전차, 장갑차 등의 지원을 받는 보병집단이었다면, 이제는 중전와 기계화보병의 물결을 막아내야 했다.


1940년대 말~1950년대의 프랑스군 참모장교들은 영미 연합군의 '세번째 지원'이 유사시에 발생할 것이라고는 믿었으나, 이들의 신속성에 대해선 조용히 걱정했다. 서방 연합군이 중부 유럽에서 동원할 즉응전력은 13개 사단 정도. 이에 비해 소련군은 30개 사단을 가졌고, 45-70개까지도 금방 육로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미군은 대서양을 건너와야만 했다.


프랑스군의 걱정은 근거없지 않았다. 1949년 미 국방부 연구는 소련군이 바이에른에 주둔한 미군을 꺾고 라인강을 건널시, 이후에 적을 저지할 자연방어선의 부재를 지적하며,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본토 대부분을 포기하고 브르타뉴 반도에 재집결하는 안을 제시했다. (당연하게도, 1949년의 프랑스군에게 이 제안은 공유되지 않았다.)


드로마르의 제안은 군부에서 드골의 정치적 라이벌로 꼽힌 앙드레 라파르그 소장의 지지를 받았다. 라파르그는 비싸게 지어둔 요새 토치카들에서 본전은 뽑자고 주장하며, 마지노선 전부가 아닌, 전략적으로 선정한 제일 상태 좋은 요새들에만 한해서, 재건을 진행하자고 주장했다.


라파르그의 비전대로 새로 재건된 마지노선은 무적의 방어선도, 사실 '선'도 아니게 될 것이었다. 그는 재생된 요새들을 'mole', '방파제'라고 명명한 군집들로 묶어두자고 제안했다. 새로운 용어는 이 재생요새들은 그 자체로만으로 완전한 방어체계가 아닌, 야전부대들이 집결할 구심점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단 것을 상징적으로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라파르그는 인적자원의 투입 최소화를 강조했다. 일례로, 전장을 원격으로 감시하는 CCTV를 각 요새에 설치하는 것이 제안되었다. 만일 현실화되었다면, 당시 막 개발된 참이던 폐쇄회로 카메라가 역대 최대급으로 투입된 프로젝트가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 제안을 승낙하고, 'Comite Technique des Fortifications', 요새기술위원회를 발족했다. 1951년, CTF의 예산 규모는 약 20억 프랑으로 책정되었다. (현재 돈가치로 약 4600억원)


CTF에게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구조물 수리가 아닌 무장 마련이었다. 기존 마지노선 요새의 무장 중 가장 흔한건 Mle.33 75mm 곡사포였는데, 2차대전 때 독일군이 빼내간걸 차치하고도 1950년이면 이미 노후장비였다. 프랑스군의 계획은 이들을 잠깐은 재사용하되, 궁극적으로 요새포를 전부 미군 M2A1 105mm 곡사포로 갈아치우는 거였다. 이미 전후 프랑스군에서 사용되는 이 포는 어딜 보든 전간기의 75mm 포보다 우월했고 포탄재고도 엄청났으며 철갑탄도 운용할 수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전차포였다. 1930년대엔 호치키스 AC34 20mm 포 따위도 각 요새에 장비되어 있었는데, 1호 전차 장갑판도 간신히 뚫는 물건이었다. 이런걸 버리고도, 기존의 주력 대전차포는 Mle.1934 47mm 대전차포였는데 이것도 T-34 상대로도 애매하고 차후 개발될 소련 전차들 대상으론 당연히 이빨도 안 먹힐 물건이었다.


문제는 신형 대전차포가 개발되어 봤자, 이걸 기존의 대전차포 포곽 안에다 구겨넣어야 되고, 반지하식으로 설계된 포탑들의 경우엔 아예 기존의 포가 들어갔던 자리에 꼭 맞아야 한단 것이었다. CTF는 원격으로 사격하는 바주카들을 포탑에 끼워넣는 '루비네 시스템'을 구상했다. 후방으로 분출된 가스는 관을 통해 외부 덕트로 배출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마지노선 재생계획이 좌초된 데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전후 재건과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는 4공화국은 돈이 쪼들렸고,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 바주카 시스템의 경우 새로 설계해서 도입하느라 돈이 든다는 것도 발목을 잡았다.


결정적으로 1954년 10월 재무장한 서독이 NATO에 초대되었다. 이제 대소련 전선이 독일로 보이자, 프랑스 내부에 비싼 돈을 들여가며 고정요새들을 만드는 건 비효율적일뿐더러 방위조약을 맺은 동맹국들에 대해 외교적으로도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54년부터 57년까지, CTF의 예산은 매년 25%씩 감축되었다.


대전차 바주카들이 처음으로 취소되었고, CCTV들이 그다음에 취소되었다. 다음으론 미국제 105mm들을 집어넣는단 계획도 취소되며, 기존의 무장을 수습해 그대로 재생한 극소수의 요새들만이 남았다.


1960년 2월 13일 오전 7시 4분, 프랑스는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젠 프랑스 본토가 침공당한다면 핵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되었다. 1960년 6월 20일,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의 작업 중단을 지시했고, 10월 17일엔 mole 컨셉, 즉 요새 고정점들을 구심으로 방어작계를 설계하는 것도 폐기되었다. 1962년, CTF는 해체되었다.


마지노선의 일부에 대한 다른 제안으론, 먼저 1962년에 NATO가 제안한 탄약고 안이 있다. 이는 3차대전 발발시 바르샤바 조약군이 서독 본토 대부분을 쑥대밭으로 만들거란 예측에 기반해서, 서독이 마지노선에서 상태가 좋은 편이었던 Soetrich, Molvange 반지하 요새들을 탄약고로 사용해 전력 일부를 온존시킨단 계획이었다. 약간씩 제안되던 이 사용법은 1966년 프랑스가 NATO를 탈퇴하며 끝났다.


마지막 '재생' 시도는 1985년, 마지노선 일부분을 핵전쟁시 민간 쉘터로 사용하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긍정적으로 검토되었으나 1989년까지 실제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유럽의 긴장이 대폭 내려가며 그대로 묻혔다.


이외에 소수 사례로는 마지노선의 Hochwald 요새 등이 프랑스 공군의 방공 레이더사이트로 전용된 등이 있다. Ouvrage Hochwald는 공군의 Base Aerienne 901이 되었고, 공군이 '튼튼한' 방공지휘소를 원했기에 꽤 잘 활용되었다. 901기지는 1980년대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현대화 개장을 거쳐 프랑스 북동부 권역의 중앙 방공지휘소로 1994년까지 운용되었다. 기존의 기관총구, 포구들엔 이제 케이블들이 복잡하게 배선되었고, 웃긴 사례론 전자장치 냉각에 필요한 에어컨 설비도 기관총구를 통해 무수히 마련되었다.


기지는 냉전 후에도 프랑스 공군의 사이트로 운용되었고, ARES 레이더도 설치되었다. 하지만 '전선'이 동독에서 발트 3국으로 멀어지며 중요성이 갈수록 떨어졌고, 인트라넷과 데이터링크의 발달로 기지 내의 요새화된 통신시설이 덜 중요해졌다. 21세기끼지 살아남은 기지는 2015년 7월 20일에 문을 닫았다. 프랑스군이 마지막까지 운용한 마지노선 요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