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미육군의 동원과 그 여파

(U.S. Army Mobilization During the Korean War and Its Aftermath)


Colonel Mark A. Olinger, U.S. Army



미 육군 Mark A. Olinger 대령은 현재 버지니아 주 포트 벨보아에 있는 국방 에너지 지원 센터의 작전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중동 국방 에너지 지원 센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미국, 파나마, 대한민국, 중동 및 독일에서 여러 지휘 및 참모직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전투 복무에는 아라비아 만에서 Operation Earnest Well/Prime Chance 동안 528 지원 대대(공수)의 중대 사령관이 포함됩니다. 파나마에서 Just Cause 작전 중 미국 특수작전사령부-남부/합동 특수작전 태스크포스 병참 부국장(J-4); Desert Shield 및 Desert Storm 작전 중 528 지원 대대 (공수)의 지원 작전 장교입니다. 이라크 자유 작전 동안 그는 142군단 지원대대 사령관을 역임했고, 이후 제1기갑사단 병참참모부(G-4) 참모총장을 역임했습니다.


Olinger 대령의 군사 교육에는 미 육군 보병 장교 기본 과정, 미 육군 병참 장교 고급 과정, 미 해병대 상륙전 과정(비거주자), 작전 연구 시스템 분석 군사 응용 과정, 미 육군 지휘 및 참모 대학 및 국립 전쟁 대학. 그는 포모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폴리테크닉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 학위를, 국방대학교에서 국가 안보 전략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https://www.ausa.org/people/mark-olinger

AUSAColonel Mark A. Olinger, U.S. Army, is currently serving as Director of Operations for the Defense Energy Support Center at Fort Belvoir, Virginia. He was previously assigned as Commander, Defense Energy Support Center–Middle East. He has served in a number of command and staff positions in the United States, Panama, the Republic of Korea, the Middle East and Germany.www.ausa.org


작성자 이력/ 2008년 11월 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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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출처








1. 서문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육군의 전력은 67개 보병사단, 16개 기갑사단, 5개 공정사단, 1개 산악 사단과 여러 독립된 연대전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1945년 말부터 시작된 군비감축으로 인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도 안된 기간 동안 89개 사단은 16개 사단으로 감축되었다. 이 중에서 12개 사단은 해외 점령지 임무에 투입되었고 4개 사단은 미국 본토에 남아 있었다.


1947년 1월 말에는 해외 3개의 보병사단들이 추가로 임무해제 되었고 독일 주둔 제 3보병사단은 미국 본토로 철수하여 켄터키주 켐벨 기지에서 예비 사단으로 남고, 본토의 제 5보병사단은 해체되었다. 1947년 말까지 미육군에게는 12개 사단이 남아 있었다.


미육군은 전후 국제 정세 상황에 따라 부대 재배치를 계속 이어 왔다. 1947년 가을에는 이탈리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제 88보병사단 중 일부를 트리에스테 지역에 남겨두고 모두 철수시켰다. 1948년에는 한국에서 점령지 임무를 맡고 있었던 제 7보병사단을 일본으로 철수했다.


제 7보병사단이 일본에 주둔하면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 11공정사단은 포트 켐벨 기지로 이동하여 2개 연대 전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또한, 한국에서의 병력철수는 제 6보병사단의 해체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년 동안에 미육군의 정규 사단은 10개로 숫자가 줄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주둔했다. 52개 예비군 부대들과 주방위사단들이 다양한 수준으로 본토에 산재했다.


1950년 6월,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이 침공했을 때 미육군은 처음 몇 달 동안 긴급 처방을 해야만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남아 있던 군사 생산 시설을 재가동하고 전시 동원을 시작했다. 전시 동원을 시작한지 1년 반 안에 10개 사단은 20개 사단으로 2배 증가했다.






2. 미육군의 증강 - 1950년



1950년 6월, 미육군의 병력은 10개 전투 사단에 약 591,000명이었다. 이 중에서 360,000명은 본토에 주둔했고 231,000명은 해외 각지에 주둔했다. 해외 주둔 부대의 주 임무는 점령지 관리 임무였다. 유럽에는 약 80,000명이 독일에, 9,500명이 오스트리아에, 4,800명이 이탈리아에, 7,000명이 태평양 지역에, 7,500명이 알래스카에, 12,200명이 카리브해 지역에 주둔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여러 부대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었다. 해외 주둔 미군 병력 중 가장 큰 병력은 극동의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다. 모두 108,500명이 일본에서 점령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 주둔 미군은 4개의 보병사단, 9개의 대공포대대, 1개 보병연대였다. 제 1기병사단(혼슈 중부), 제 7보병사단(혼슈 북부 및 훗카이도), 제 24보병사단(큐슈), 제 25보병사단(혼슈 남부), 제 9대공포 그룹(오키나와)로 구성되었다. 이들 부대들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모두 부족한 상태였다.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휘하에 적어도 5개의 완편된 보병사단, 23개 대공포대대와 1개 연대전투단이 필요하다고 상부에 자주 건의했다.


미육군에서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부대를 예비 부대로 편성했다. 하와이의 제 5연대전투단을 제외하고 예비 부대는 미본토에 5개 사단과 몇몇 소규모 부대로 구성되었다. 1950년 6월 당시의 주요 예비 부대는 제 2기갑사단(텍사스주 캠프 후드, 오클라호마주 포크 실), 제 2보병사단(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제 3보병사단(조지아주 포트 베닝, 매사추세추주 포트 데븐), 제 82공정사단(북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레그), 제 11공정사단(켄터키주 포트 캠벨), 제 3기병연대(매릴랜드주 포트 메드), 제 14연대전투단(콜로라도주 포트 칼슨)과 몇몇 지원부대들이었다.


1950년 봄, 미국은 육군병력 수를 630,201명에서 610,900명으로 약 2만 명을 감축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10개 사단에서 1개 사단을 추가로 해체해야 했는데 대상은 일본 주둔 미군이었다.







3. 한국으로의 미군 전개


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한국 전쟁은 미육군의 속빈 강정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8군은 정규편제에서 한참 떨어진 채로 놓여있었다. 사단 병력에서 보면 정규 18,900명에 한참 못 미치는 13,000명 내외였다. 4개 보병사단 모두 정찰, 헌병, 의료, 예비대 등이 전혀 없었다. 각 보병연대는 1개 대대가 부족한 상태였고 전차대대는 1개 전차중대로 편성되었으며 대공포대대는 1개 포대 정도로만 존재했다. 그나마 전차중대들도 경전차인 M24로 장비했다. 이는 극동군 사령부가 일본의 도로와 다리가 중전차를 운용하기 부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6월 30일자로 한국에 대한 미군의 투입을 명령했다. 미 8군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의 건의로 맥아더는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지역에 주둔한 제 24보병사단 본진을 투입하기 앞서 특수임무대를 편성하여 선발대로 보내기로 했다. 그만큼 한국에서의 상황이 긴급했다.


공중 수송으로 인하여 특수임무대의 병력은 500명으로 제한했다. 이들은 2개 보병중대, 대전차팀, 1개 포대로 구성되었다. 제 24보병사단장인 딘 소장은 제 21보병연대 1대대장인 스미스 중령에게 특수임무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이 부대는 스미스 TF로 부르는데, 처음 계획된 포대는 4.2인치 박격포로 변경되었고, 75mm 무반동포 1개 소대와 2.36인치 바주카로 무장한 6개 대전차팀이 더해졌다.


스미스 TF는 7월 1일과 2일에 걸쳐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공중 이동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트럭 및 병력 일부는 미처 수송되지 못했다. 스미스 TF는 곧장 전선으로 이동하여 7월 4일 저녁 오산 북쪽 3마일 지점에 진지를 차렸다. 여기서 스미스 TF는 제 52야전포병대대의 일부 포대의 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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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TF 대원들. 오산 전투 직전의 모습이다.




다음날 아침 8시 무렵, 스미스 TF 진지 전방에 T34 전차의 엄호를 받으면서 다가오는 북한군 대열이 모습을 나타냈다.


숫적으로도 열세인 스미스 TF 부대원들은 전차나 그 어떤 효과적인 대전차 무기 없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교전했으나 중과부족으로 병력 손실이 늘어만 갔다. 다음 날 절반으로 줄어든 잔여 병력들만이 후퇴할 수 있었다.


스미스 TF가 무너지고 있는 동안 24사단장인 딘 소장은 오산-대전 방향의 주요 진격로에 34연대와 21연대(스미스 TF 소속 원부대)를 배치하여 북한군의 진격에 대비했다.


극동군 사령부는 큐슈 주둔 제 24보병사단을 한국으로 급파한 직후, 제 25보병사단과 제 1기병사단의 부족한 병력을 제 7보병사단으로부터 차출 받아 출동 준비를 했다. 이렇게 정비된 두 개 사단은 7월 말까지 한국으로 파견되었고, 제 7보병사단은 일본에 남아 병력 충원을 기다려야 했다.


극동군의 병력과 장비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미본토에 주둔하고 있던 각 부대들도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극동군에게 특히 부족한 것은 전차와 대공포였다. 부족한 부분은 미본토에서 차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한국에서의 급박한 전황으로 다른 대안을 고려해야 했다. 8월 15일, 미국과 한국 정부는 한국의 인적 자원을 미군이 활용할 수 있게 하는 협정을 맺었다.


KATUSA(Under the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프로그램으로 약 8,600명의 한국인들을 미군의 각 부대에 근무하게 하는 협정이었다. 그러나 카튜사 프로그램 시작 후 몇 달 만에 중지되었다. 한국군 병력의 손실이 늘어가고 한국군 부대들도 재편성이 필요했으며 다행히 미군의 부대 재편성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7월,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맥아더는 미본토에 주둔 중이던 제 2보병사단, 제 82공정사단과 함께 몇몇 부대들의 한국 파견을 상부에 요청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82공정사단은 차출 불가하고 대신 11공정사단 예하 187공정연대를 제안했다.


7월 7일, 미합참은 예비군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문제는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7월 9일, 국방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얻었다. 제 2보병사단은 한국 파견을 위해 부대 재편성에 즉시 착수했고, 7월 31일에 제 2보병사단의 선발대가 한국에 도착했으며 8월 말까지 모든 사단 병력이 도착하여 전투에 돌입했다. 제 2보병사단은 미본토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첫 부대로 기록되었다.


제 2보병사단이 전투에 투입되면서 그동안 가장 많은 손실을 입은 제 24보병사단을 뒤로 뺄 수 있었다. 워커 중장은 제 24보병사단 예하 34보병연대와 63야전포병대대를 해체하고, 하와이에서 도착한 제 5연대전투단(RCT)이 제 24보병사단의 임무를 대신했다. 제 24보병사단은 일본으로 돌아가 부대 재편성에 들어갔다.


1950년 8월,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에 일본에 남아 있었던 제 7보병사단을 동원하기로 하면서 예비대가 필요한 맥아더는 미 본토 주둔 제 3보병사단의 파견을 요청했다. 제 3보병사단은 미본토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정규사단이었다.


많은 논쟁 끝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요청을 수락했다. 제 3보병사단은 한국에서의 미군 요구에 의해 많은 병력과 장비들이 이미 다른 부대로 차출된 상태여서 미본토에 남은 병력이라곤 5,000명도 채 안되었다.


미육군은 약해진 제 3보병사단의 보강으로 2개 야전포병대대와 함께 푸에르토리코 연대로 불린 제 65보병연대를 제 3보병사단에 배치했다. 재편성을 마친 제 3보병사단은 9월 15일에 일본에 도착했다. 그러나 제 65보병연대는 푸에르토리코에서 한국으로 직접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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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보병사단 제 65 보병연대(일명:푸에르토리코 연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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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31-2월 2일에 걸쳐 서울 부근에서 중공군을 물리친 푸에르코리코 연대의 전쟁화. 대대병력 전원이 총검을 꽂고 백병전을 벌인 전투였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에 차출된 제 7보병사단은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하여 카튜사 프로그램을 통해 약 7,000명의 한국인을 훈련시켜 부대원으로 편입했다. 10월 말, 중공군의 개입이 확인되면서 예비대로 일본에 주둔한 제 3보병사단은 한국으로 투입되었다.


한국전 초반에 미육군은 한국에 약화된 6개 사단을 임시방편으로 배치했다. 점차 미군이 증강 배치되면서 맥아더는 소모전을 전멸전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확전이 되면서 병력보다는 화력에 의존하는 전략을 폈다. 비록 미군당국의 긴급한 처방으로 극동군 사령부의 인적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는 해결했으나 훈련된 병력의 부족은 계속되었다.


1951년 봄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7월 8일 끝나면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후 1953년 7월 정전협정까지 미육군은 한국에 6개 사단 배치에 큰 변화는 없었다. 제한전은 제한된 병력을 의미했다. 워싱턴과 맥아더 사이에 확전에 관하여 끊임없는 다툼이 있었는데, 여러 추측 중 하나는 맥아더의 위상과 관련한 것과 관련한 것이다.






4. 예비 부대 재건


1950년 여름, 미군의 예비 사단은 제 2보병사단과 제 82공정사단, 제 11공정사단 일부 정도였다. 서유럽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하루 빨리 적정한 수준의 예비 부대의 재건이 필요했다. 국방부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7월 14일, 존슨 국방장관은 1개 보병사단의 편성을 승인했다. 캘리포니아에 주둔한 1개 훈련 사단을 포트 베닝 기지로 옮겨서 전투 사단으로 재편성하기로 했다. 1951년 봄까지 편성을 마치기로 하는데, 그동안 미본토에 남은 유일한 전투 예비 사단은 제 82공정사단이 전부였다.


미군 당국은 한국과 유럽 주둔 미군을 동시에 증강하기 위해 전투 예비 사단을 6개까지 늘리기로 하면서 예비군 동원을 시작했다. 1950년 7월 6–19일에 트루먼은 육군 병력숫자를 630,000명에서 834,000명으로 늘리는데 서명했다. 8월 3일, 미 의회도 병력 제한에 관한 법안을 취소시키고 국방장관에게 위임했다. 7일 후, 육군 병력숫자를 1,081,000명까지 늘리는 계획을 세웠다. 11월 22일에는 그 숫자를 다시 1,263,00으로 늘리고, 중공군의 개입이 현실화 되면서 다시 1,552,000으로 늘렸다.



병력숫자를 늘리는 한편, 군수산업시설을 재가동하였다. 군수산업시설의 재가동은 다섯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 350만 명의 미군 지원

2) 물자 대체

3) 극동으로의 군수품 공급

4) 생산이 쉽지 않은 물자의 비축

5) 장래의 소요에 대비한 생산 설비구축


8월 10일, 트루먼은 4개 예비군 사단의 동원을 승인했다. 국방부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4곳의 훈련 기지를 제공하고 9월 초부터 제 28(펜실베이니아), 제 40(캘리포니아), 제 43(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제 45(오클라호마) 예비군 사단이 정식 연방군의 지휘아래 놓였다. 이들 사단의 중핵은 1개 전차대대와 1개 정찰중대였고 병력숫자는 8,000명에서 9,500명 사이에서 편성되었다.


1950년 가을 중공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자 트루먼은 국가적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의 소련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병력증강을 시작했다. 계획에 의하면 1952년 6월까지 18개 전투 사단을 편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전 동안 미군의 병력 운용방법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와는 달랐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쟁기간동안 내내 복무해야 했지만, 한국전에서는 1년 단위로 로테이션 하여 병사들의 소외감과 사기를 고려했다. 이러한 로테이션 방식을 수행하기 위해 더 많은 훈련장이 필요했다. 한국전쟁 동안 훈련 사단의 숫자가 무려 10개까지 확대되었다.


1947년 이래 서유럽에는 제 1보병사단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1949년 NATO가 설립되면서 트루먼은 유럽주둔 미군을 증강시키기로 합의했다. 1951년 3월부터 11월까지 제 2기갑사단, 제 4, 28, 43보병사단을 독일에 파견하여 미국의 의지를 NATO동맹국들에게 확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