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에 배군 아재가 2008년 작성했던 글


16, 17년전에 디시 2대갤에서 나오던 속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건 재밌긴해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worldwar2&no=27158&page=1

일본군 최정예(?)부대 오사카 사단.오사카 제4사단은 1888년에 창설되었다. 일본군 중 가장 오래된 사단중의 하나이다. 이 부대의 산하에는 4개의 연대가 있는데, 장비도 1류 수준이어서 일본군의 정예부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사단은 창설된 지gall.dcinside.com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worldwar2&no=22881&page=1

이탈리아군에 뒤지지 않는 일본군 오사카 사단의 진실과달카날 전투에 대한 영상을 보다가..1942년 9월 12-13일 헨더슨 필드를 두고 가와구치 여단 4,000명과 미 해병특공대와 낙하산 부대원으로 구성된 800명 메리트 에드슨 중령 대대와의 사투...에드슨 능선을gall.dcinside.com





얼마 전에 디씨에 보니 오사카 제 4 사단에 대한 글이 있더군요, 찬찬히 읽어보니 조금 잘못(?)알려진 정보도 있고, 또 참가하지도 않은 전투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간단히 수정 보충(?)해볼까 합니다.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상업도시의 기풍인지는 몰라도, 도시 출신으로 구성된 오사카 제 4 사단(일본군은 향토 연대주의였기에 지방군구에서 사단병을 자체 조달했죠) 은 전투에 약하고 또 구 일본육군 답지 않게(...) 약삭빨라서 몸을 사렸다, 뭐 이런 내용이 많이 보입니다. 뭐, 실제로도 일본 속요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다시 또 졌는가 8 연대(오사카), 그러면 훈장은 9 연대(교토) 」



그래서 관심이 동해(?) 찾아봤는데 대략 이런 내용들이 검색되더군요.


「...........(전략) 1939년 7월, 노몬한에서 소일간의 격돌이 중대 위기에 빠져 이성을 잃은 관동군이 소만국경에 주둔중이던 센다이/오사카 양 사단에 긴급 동원하령을 내리고 출동을 명했을 때였다. 야습의 센다이 사단으로 유명한(*러일전쟁시 궁장령 전투에서 세계 최초의 사단 단위 야습을 감행해 성공시킨 부대죠 -ㅅ-; ) 보병 제 2 사단은 즉시 용감하게 출발, 하이라얼까지 도보행군 4일만에 현지에 도착했다. 또한 제 2 사단의 선발부대인 시바타 제 16 연대는 도착 즉시 전투에 참가해 용전 분투했는데 비해 오사카 제 4 사단은 출동하령 이후에도 장병들이 어떻게든 잔류부대에 남으려고 이런저런 잔꽤를 부리며 우왕좌왕(...) 격노한 연대장이 의무실에 직접 나가 군의관의 진단을 지켜보았을 정도였다.


이후에도 겨우 출동부대를 편성해 출발했지만 주둔지에서 하이라얼까지의 행군을 오사카 사단은 무려 1주간을 필요로 했고 게다가 낙오병이 속출했다. 이후 현지에 겨우 선견대가 도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소일 정전협정이 성립되었을 직후였따. 그때부터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 나니와(오사카 지방의 옛 이름)의 건아들은 전투에 참가해 무훈을 세우지 못한 것을 애석해 했고 낙오한 장병들도 갑자기 힘이 넘쳐(...) 잇달아 원대에 복귀했다. 또 귀대하는 군용열차에서는 가장 위세가 좋았다고 소리가 난 그야말로 노망난 사단이었다.


 


...................(중략).............


 

이러한 사단에 의구심을 품은 참모본부에선 태평양 전쟁이 개전된 이후도 이 사단을 최전선에 투입하길 꺼려해 결국 대본영 직할의 남방군 예비라는 명목으로 상해 부근에서 대기시켰다.



1942년 4월, 필리핀 전선에 상륙 이래 고전하던 보병 제 16 사단과 보병 제 65 여단에 대한 증파병력으로 제 5 사단, 18 사단, 21사단 등 정예 갑종사단(상비사단)에서 선발된 보병연대와 함께 제 4 사단도 파견된다는 명령이 하령되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4 사단 장병들은 이번이야말로 인생의 끝이라며 풀죽은 모습을 보였고 부대는 힘없이 상해에서 필리핀 전선으로 향했지만 대전 초기 바탄반도 제 2 차 공략에는 일본군도 강력한 포병단과 항공부대를 준비해 본격적인 입체공격을 실시했기 때문에 오사카 사단은 군 주력의 일익이 되어 벌벌 떨면서도 약체인 미국+필리핀군이 백기를 내걸어 항복한 덕분에 또다시 정전성립.



최초의 승전에 기쁨에 들뜬 오사카 사단의 장병들은 마치 자신들이 바탄을 점령한 것 같은 우렁찬 승리의 함성을 울렸고 고향 오사카에서도 호외가 나오는 큰 경사가 되었다. (후략)」




.........우왕 굳!! 이렇게만 보면 이렇게나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로 부대를 꾸리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근데....과연 전전 일본군이 정말로 저랬을까요? 아무리 오사카라곤 해도 말이죠(...) 자, 그래서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오사카 제 4 사단의 전신인 구 육군보병 제 8 연대는 사실 패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정강부대였습니다. 결론만 먼저 말하면 다시 또 졌는가 제 8 연대 - 라는 속요도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ㅅ-;




메이지 유신 후, 그때까지 각 번이 독자적으로 보유하던 각 군대(번병)는 메이지 신정부, 즉 일본군으로 재편성되어 사단의 전신인「진대」로 개편되게 됩니다. 그중 오사카에 진대가 설치된 것은 메이지 4년 8월의 일로 ,그 속요로 유명한 보병 제 8 연대(이하 8연대)는 메이지 7년 5월 14일에 편성을 완결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오사카 진대 외 다른 진대에는 주로 구 사무라이 계층인 사족 출신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만 오사카 진대에서는 타 진대에 비해 사족 출신자가 적었고 평민 출신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오사카가 지난 오사카 여름/겨울의 진 이래 도쿠가와 막부의 직할 관할로 유력 번이 아니었던 것과, 또한 이미 에도시대부터 대도시로 도시민들이 많았던 것이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이 제 8연대는 메이지 7년에「사가의 난」에 출동했고 메이지 10년에 일어난 서남전쟁에도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8연대는 큐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전공을 세워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용전극투의 칙어」를 받을 정도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참고로 천황의 칙어가 연대에 하사된 것은, 지금까지도 일본 육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기에 이후 쇼와시대 들어 각 군사령관이 각 부대에 자주 수여한 표창장보다 훨씬 더 가치의 높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즈음해「다시 또 졌는지 8 연대」의 속요가 민간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연대의 장교를 시작으로 하사관/병들은 그 속요의 나쁜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맹훈련을 거듭해 육군대연습때도 항상 수위를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연대사에도 남아 있고, 그 후 제 2 차 대전 패전에 이르기까지의 사단사를 봐도 사단 단위로 전투에 졌다는 기록은 없더군요(...) -ㅅ-;




저 위에 링크된 글에 좀 의문이 나서 노몬한과 대륙전선...그리고 필리핀전 이야기도 좀 찾아봤는데 역시 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았습니다.


1938년부터 39년 사이 제 4 사단장을 역임한 사와다 시게루(沢田 茂) 중장은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을「전혀 근거가 없는 풍설」이라고 부정했다고 하며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노몬한으로 동원령을 하령받았을 때는 우리 사단은 센다이 사단보다 넓은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에 집합에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또한 이후의 어떤 전투에서도 제 4 사단은 항상 용감했다. 」




그리고 중국대륙에서의 서주회전 이야기.....이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1938년 3월 15일부터 5월 19일까지 발생한 서주회전에 참가한 일본군은 주로 북지방면군이었는데, 이 북지방면군은 5사단과 10사단이 주력으로 서주회전에서 이종인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군과 싸웠습니다.


즉, 오사카 제 4 사단은 서주회전에 참가한 일본군(북지방면군) 전투서열에 아예 들어있지도 않았던 부대였던 겁니다;;;; -ㅅ-;


제 4 사단이 중국전선에 투입된 것은 1940년 7월의 일로, 한수작전과 예남작전, 강북작전(이상은 일본측 공간전사인 전사총서에 기록된 일본측 작전명칭입니다) 등에 참가했고 중국전선에서는 마지막으로 1941년 9월에 벌어진 제 1 차 장사작전에 투입되었죠. 저 위에 링크된 글에서 나오는 장사작전에서의 제 4 사단의 추태(?)도 사실과 다릅니다. - 참고로 저 글에서 소개된 장사회전 당시 장사전구의 중국군 지휘관도 설악이 아닌 소제갈량이란 별명이 붙어있던 백숭희였죠;;; -


제1 차 장사작전(1941/9)은 장사 방면의 중국군을 포위/격멸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곧 다가올 남방작전에 대한 병력 전용으로 당초의 계획보다 작전규모가 점점 축소되어 결과적으로는 노구교사건 이래 대륙에서 일본군이 지겹도록(...) 벌인 예방적 성격(중국군의 공세를 억제하기 위해 출격해 중국군 전력을 격파, 기존 점령지역의 안전과 적의 전의 상실을 도모하는)의 작전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에 대본영이나 지나파견군에서는 중지론도 나왔지만 제 11 군의 아난 중장은 더이상의 병력 삭감 전에 중국군에 대해 타격을 주지 않으면 자신의 작전지구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결국 작전을 결행했지요.


41년 9월 당시 아난 중장의 제 11 군은 호북성 한구를 주둔지로 삼고 중국 중앙부에 주둔중이었는데, 제 11군의 병력은 6개 사단 + 1개 여단이라는 상당한 대병력이었습니다. 지나파견군의 계획은 대륙에서 공세에 나설 여력이 있던 41년 9월 경, 남방으로 병력 전용이 이루어지기 전에 제 11 군을 투입해 장사를 빼앗으려고 시도했지만 일단 보류했는데 현지군 사령관 아난 중장의 강력한 오퍼에 의해 결국 작전을 결행했고 이게 바로 제 1 차 장사작전입니다.


제1차 장사작전은 일본군 7개사단과 혼성여단 1개가 투입된 전투로 약 2개월에 걸친 전투입니다. 중국측(설악이 아닌!! 백숭희 장군 지휘하의 제9 전구군이 주력)은 장사 함락의 위기에 이르러 일시 장사를 방폐하고 초토화(...) 작전을 벌여 장사 시가 전체를 모두 다 태워 버렸습니다(...) 하지만 장개석은 일본 제 11군이 장사 공략에 나선 틈을 노려 상운 장군의 제 6 전구군에 의창 탈환을 명령했습니다. 당시 의창은 일본군 제 13 사단의 관할지역이었지만 의창의 수비대는 경상자나 비전투요원이 대다수로 확실히 일본군은 방심을 찔렀던 것이었지요. -ㅅ-; 이를 찌른 중국 제 6 전구군은 일부가 의창 시내에 돌입하는데까지 성공했지만 일본 육군항공대의 지원 공습과 제 13 사단 주력의 반전 공격을 받아 결국 후퇴했습니다..


이처럼 배후가 찔린 상태에서도 아난 중장의 일본 제 11 군은 장사 공략을 계속, 41년 9월 27일에 장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전술했다시피 중국 제 6 전구군의 의창 공격 등 지형적으로도, 보급도 고전에 빠졌다고 판단해 전투를 중지하고 장사로부터 철수했습니다. 이 시점이면 아난의 제 11 군도 공세 한계점이었고 백숭희의 제 9 전구군도 한계점이었기에 철수시에는 양군 모두 전투가 없이 비교적 조용히(?) 철수와 중국군의 장사 재입성이 이뤄졌다고 합니다.(참고로 중국측은 자신들이 대승했다고 선전했습니다;;;)


.........사족을 좀 더 붙이자면, 아난의 제 11 군이 더 큰 타격을 입고 작전도 실패한건 오히려 제 2 차 장사작전이라고 봐야죠;;; - 이 제 2 차 장사작전 때는 오사카 제 4 사단은 대본영 직할로 떨어져나간 상태 - 제 1 차 장사작전에 실패한(!) 아난 중장은 2차 작전을 계획해 5만의 병력을 동원해 다시 장사를 공격했습니다만 중국군은 이미 이 전구에 50만(...) 을 모아놓고 있었죠, 10:1의 병력차이인데 어쩌겠습니까(...) 일본군은 다시 장사 시내의 절반을 점령하는데에 그치고 장사에서 철퇴, 장사작전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1/2 차에 걸친 장사작전에서 일본측 피해는 전사총서에 의하면 일본군 전사자 1,670명, 부상자 5,184명, 행방불명 14명이었습니다. 중국측 피해는 전사자/부상자 합계 92,040명. -ㅅ-;



하여간 다시 오사카 제 4 사단 이야기로 되돌아가볼작시면, 제 4 사단은 제 1 차 장사작전 이후 대본영 직할로 떨어져나와 남방작전에 대비해 부대의 집결과 재편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때 일본 갑종사단의 전통적인 4 단위 편제에서 3단위 사단으로 개편되어 1개 보병연대가 하나 감소, 시노야마 보병 제 70 연대는 제 25 사단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남방 작전에 투입되어 필리핀 전선에서의 전투기록을 봐도, 오사카 제 4 사단은 결코「벌벌 떨면서」싸우지 않았습니다. 특히 1942년 4월 5일의 사마트 산 공방전에서는 미/필리핀 연합군의 격렬한 포격을 받으면서도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고지로 오직 총검으로만 돌격(...), 우익대와 좌익대의 협공에 의해 고지를 점령하고 미국/필리핀군 제 21 사단장 이하 700명을 포로로 잡은 기록도 있거든요. -ㅅ-;


또한 제 4 사단은 바탄반도 제 2 차 공략전에서도 용전분투해 무훈을 세웠는데 도시민 출신의 합리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력은 별로 저하하지 않았었지요. 이후 42년 5월 5일에는 코레히도르 요새로 향하는 4 사단의 제 1 진을 출항지까지 격려하러 온 혼마 사령관도 4사단 부대원들에 대한 훈시에서「바탄 반도 공략전 이래, 귀대의 재삼의 분전에는 감사하고 있다.」- 라고 4사단의 무훈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레히도르 요새 공략전에서도 제 4 사단은 열심히 싸워 이 요새를 13시간만에 항복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죠. -ㅅ-;




뭐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구 일본육군은 향토 연대주의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즉 일반 사병들은 항상 고향을 의식해 그 체면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일본의 풍토에서 만약 비겁한 행위를 하거나, 포로가 된다면 부모....아니 일족이 마을이나 고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을 당시 일본군의 일반 사병들은 극도로 두려워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금치훈장을 받을 정도의 무훈을 세우면 일족 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명예로까지 여겨졌습니다. 때문에.........이러한 이유에서 주로 도시지역 주민으로 징병된 군단은 그렇지 않은 군단에 비해 향토 의식이 약하며,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병이 된 것은 아닌가라고 전전 일본의 징병제를 다룬 책들에선 여럿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단 그랬다 해서 오사카 사단이 약했다는 증거 또한 없습니다 -



........뭐 제가 생각하기엔 패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투가 있다고 하면, 서남전쟁 이외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아 보입니다. 전국시대 시마즈 가문의 세키가하라 단독돌파(...)로 유명한 사츠마 무사가 시퍼런 칼날을 세운 채 체스토~~!! 하며 돌격하는 걸 보면 상인이나 도시민 출신의 사병들이 뒷걸음질 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요 -ㅅ-; 당시 큐슈 고쿠라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 14 연대, 즉 노기 마레스케가 인솔하는 부대조차 군기를 빼앗길 정도였으니까요....그러므로 오사카의 출신만이「약하다」라고 비난받는 것도 조금 어폐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다시 또 졌는지 8 연대」의 속요가 생겨났던 시기는 아마도 서남전쟁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것도 결정적인 확증은 없다며 마무리!!!!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