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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기 소련과 독일의 인적자원 격차 (채승병)소련은 어떻게 1941년에 그렇게 말아먹고도 종전까지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냐란 댓글에 대한 관련글안녕하십니까, 채승병입니다. 아래 서봉덕님의 두가지 질문에 한번에 다 답하려니깐 양이 무지무지 많군요.일단 소련의gall.dcinside.com안녕하십니까, 채승병입니다.
아래 서봉덕님의 두가지 질문에 한번에 다 답하려니깐 양이 무지무지 많군요.
일단 소련의 인적자원 문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습니다. 서봉덕님은 제 아무리 소련이어도 그만한 타격을 입고서 어찌 전쟁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1차대전 당시 독일 체제와 같이 사실은 미국 지원이 없으면 금방 이라도 붕괴가능한 체제였는데 간신히 유지된게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럼 소련의 인적자원을 독일과 비교해서 통계를 가지고 풀어나가죠.
먼저, 전쟁에서 국가가 가용한 인적자원을 동원하는데는 다음의 4단계가 있다고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1단계. 실업인구 및 취업 부적격 인구를 소집
2단계. 불요불급한 소비산업의 종사자들을 소집
3단계. 낮은 우선순위의 전시 산업 종사자들을 소집
4단계. 전시 필수산업 종사자들의 점차적인 소집
보시면 아시겠지만 1,2단계에만 그치고 해결되면 전시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문제는 3단계 이상으로 넘어가면 자칫 군수품 보급에 악영향을 끼칠 위험이 커지고, 그러다 4단계의 체제가 장기간 지속되어 파국으로 갈 위험이 농후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독소전의 각 단계에서 소련의 전투원 소집체제는 이중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를 따져볼까요?
처음 소련이 1941년 6월 전쟁에 돌입했을 당시 이미 소련은 2단계 동원체제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소련과 같이 완전고용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실업자가 많이 있을 턱이 없죠. 그러다가 1941년의 파멸적인 패배를 겪으며 1942년에 들어가서는 3단계 동원체제로 이행합니다. 그러다가 지속적인 손실을 겪으면서 1942년 말에는 4단계 동원체제로까지 넘어가는데 이때 소련에선 여성과 어린이들을 대거 군수산업으로 전환하여 산업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자세히 당시까지 소련의 피해를 추산해보면, 독일이 광대한 서부러시아를 장악하므로서 총 66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독일 점령지구로 넘어갔습니다. 거기에 1942년 12월까지 전투원 손실이 650만명 사망 또는 실종, 550만명 부상에 이르러 농업 종사인구는 대전 전의 3540만명에서 1510만명으로 떨어졌고, 공업 종사인구는 1100만명에서 720만명으로, 기타 산업 종사인구는 2020만명에서 1120만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렇다면 얼핏 생각하기에 과연 소련이 더이상 산업에 피해를 주지않고 무슨 수로 전투원 손실을 보충할 수 있었겠는가...는 말이 나오지만, 조금더 생각해봐야 할 요소는 새롭게 동원 적령인구로 편입되는 청소년 연령층의 분포입니다.
소련도 18세가 넘으면 병역에 동원되는데, 당시 신규 소집대상인 1920년 경의 남자 출생인구는 대략 연간 200만명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적백내전 이후 소련도 베이비붐을 겪었기 때문에 이후 출생률은 폭증하여 1920년대 중반엔 연간 남자 약 300만명 정도가 출생했습니다. (반면 농업집단화 등의 부작용으로 1930년대엔 다시 출생률이 감소하게 됨) 그래서 1941년 소련 남성 인구 비율은 20대 미만이 약 4300만명(45%), 20대 및 30대가 3150만명(33%), 40대 및 50대가 1470만명(15.4%), 60대 이상이 620만명(6.6%) 정도의 구성비를 보였습니다. 젊은층이 꽤 두터웠죠.
그리고 소련은 장기간의 의무병제를 통해 상당한 규모의 예비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 평시에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이미 1차대전과 적백내전기에 활약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구층도 매우 많았으며, 이들이 신규 동원 적령층와 함께 1941~42년 소련군의 주요 전투원 보충원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련군의 인력 보충 구조는 1941~42년의 파국적인 시기에는 30대 이상의 예비군 전력이 상당부분을 떠맡았고, 이후엔 새롭게 동원적령층에 포함되는 인구가 맡는 구조를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일은 이미 이러한 소련의 전투원 규모를 1941년도에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정보계통에서는 당시 독일이 19~45세의 동원 가능인구 1720만명 가운데 31%인 534만명의 동원체제를 가동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소련에 적용해 볼때, 소련의 15~50세 남성 연령층 4600만명을 고려하면 1426만명이 역시 동원가능 할 것으로 판단했죠. 거기에 그때까지 소련이 입은 450만명의 사상자와 350만명의 포로를 생각해도 여전히 소련군은 약 620만명이 투입가능하여 독일군 340만명에 비해 큰 우위에 서 있음을 인지합니다.
거기에 1942년 초에 다시 추산하니 당시로 소련은 동원 인구(16~50세)의 80%인 약 3800만명을 징집할 수 있는데, 이중 당시 활용되고 있던 인구는 전투원으로 700만명, 당시까지 사망 및 실종자 600만명, 후방임무 600~800만명의 인원을 제하더라도 여전히 2000만명 가까운 동원 가능 인구가 대기중이란 결론을 내립니다.
사실 독일이 더욱 놀란 것은 그런 단순한 인구 수뿐만이 아니라 소련이 유난히 젊은층이 두껍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의 인구는 초반 중장년층의 격심한 피해까지 겹쳐 20대 이하의 인구층이 전체의 50%에 달했는데 반해 독일은 20대 이하 인구층이 30%도 안되었으니 신규 동원인력에서 더욱 큰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험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 1944년 중반에 이르자소련은 그동안 사망 및 실종 850여만명, 포로 및 징용 750만명, 비적격 불구자 450만명 등 2000여만 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적령 인구 중 군수산업에 480만명, 건설 및 농업부문에 270만명 등 900만명을 산업부문에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투원 임무를 위해 1600만명을 확보해놓고 이중 1100만명 정도가 입대하여 약 600만명이 독소전에 투입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1945년에 이르면 동원 적령층인 1888~1927년생 남성인구 5040만명 중에 그때까지의 완전손실(사망, 실종, 포로, 징용) 및 부적격자 2800만명을 제외 하고서도 2200만명의 인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중 1200만명이 전투원 임무에, 나머지는 각종 산업부문에 배치될 수 있었습니다.
즉, 소련은 이미 1942년말 이후에는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층들이 지속적으로 동원 적령인구에 편입하면서, 안정적으로 1000~1200만명의 인력이 군무에 종사하고(이중 약 600만명이 독소전에 투입) 1000만명 정도의 남성인력이 군수 및 건설,농업 등 각종 산업분야에서 일하는 체제가 정착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000만명 수준의 산업인력은 모조리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로서 채워져 운영되었습니다. (그래도 각종 중공업 분야에는 적령기 남성인력 배치가 우선시되어 약 50% 정도가 이들 적령기 남성이었고, 반면 농업이나 경공업 분야는 거의 전부 여성, 어린이 등이 메꿨습니다.)
이러한 각 군무원 및 산업부문 인력구조의 안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1941-42년의 위기를 겪고난 이후 소련은 오히려 전선의 손실을 상회하는 수준의 인력 보충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련군은 1943년에 이르면 연간 완전손실 200만명 수준, 1944년에는 140만명 수준으로 점차 감소되었습니다. 매년 250만명 이상의 징집에 적합한 신규연령층이 들어오는 추세는 1930년대 출생률 감소기의 영향이 나타날 1950년 근방까지 유지가 가능했습니다.
그럼 그에 반해 독일은 어땠을까요? 독일은 당시 매년 동원 적령기로 편입하는 인구 자체가 소련의 30%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대략 약 70~80만명 수준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독일이 1945년까지 동원 적령인구 중 전투원으로 적합한 인력을 모조리 짜내봐도 가능한 인원이 누계 1100만명 정도였습니다. 이중에 독일도 소련과 맞상대할만한 산업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남성인구 약 1000만명 수준을 고려하면 여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미 독일도 43년까지 300만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 포로, 불구 등의 손실을 입어서 군무 종사인력을 500만명 수준에서 유지시키기가 힘들었고,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은 250만 규모를 유지시키기가 힘들었습니다.
거기에 1943년 무렵부터 산업생산의 효율화와 확대를 통해 증산 노력을 기울이자 산업부문의 인력수요가 더욱 증가하여 군에 보낼 인력들은 점점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매우 불충분한 구조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에 1944년 말 새로운 총동원체제 하에서 동원인력을 16~60세로 확대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요.
사실 통계수치로 독일과 소련을 비교하면, 독일이나 소련이나 남성인력을 쥐어짠 정도는 거의 비슷합니다. 양측이 동원 적령기 인력에 대해 실제 군무로 끌어들인 인력 비율이 거의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독일은 소련에 비해 전반적인 산업계에 여성 등의 인력을 끌어들이는데 매우 주저했기에 실제 남성층이 군무-산업 분담률이 소련보다도 과중했습니다. 소련이 전쟁지원 산업 유지에 1000만명의 적령 남성 노동자와 4000만명의 여성 및 노약자를 활용한데 반하여, 거꾸로 독일은 소련보다 양적으로 딸리는 산업구조나마 적령 남성인력을 1000만명 이상 필요로 했습니다. 이는 오히려 독일의 징병현실은 소련 이상으로 산업부문의 희생을 바탕으로 보충된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자, 이제는 이러한 통계를 바탕으로 "미국의 지원이 없던" 상황을 가정해 볼까요? 소련은 당시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부족한 부분을 충족하기 위해 약 500만명의 산업 인력의 추가 편성 또는 재배치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다면 소련은 동등한 군수품 생산을 위해 100만명 수준의 남성 인력을 군무 인력에서 빼내야 했다하고요. (나머지는 여성 인력을 끌어 썼을테니...)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소련도 군무 종사인력중 약 50% 수준만 이 독소전에 투입되던 상황인지라 어느 정도의 버퍼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쨌건 소련은 동부전선의 육군 병력규모를 500만명 이상으로 유지시킬 수 있었을 거라는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통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독일은 증가하던 소련의 양적인 산업생산 규모를 따라잡으려면 더욱 많은 인력의 군수산업으로의 전환이 요청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미 대전중 독일은 인력 부족으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여유설비도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던 터였지요. 설사 1943년 말 이후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해도 1943년 경의 독일의 인력배치 상황은 소집연령층 총 1400만명 가운데 현직 군무원 500만명을 제하고도 산업인력이 200만명 이상 모자랐으니, 미국이 없던 여력으로 군무원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물론 독일도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점령지로부터 수많은 강제노동 인력을 끌어왔긴 하지만, 독일은 소련에 비해 여기에서도 치명적인 문제를 더 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 아시다시피 독일의 군수품들은 소련의 그것에 비해 훨씬 복잡한 제품들이라 단순히 끌어온 저질 인력으로 완전 대체가 불가능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련은 훨씬 단순한 군수품 생산에 치중했기에 대다수 여성인력이 그자리를 메우고 들어갈 수 있었던데 반해 독일은 어차피 산업 자체의 체질을 바꾸고 여성인력의 활용범위를 대폭 늘이는 등의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한 산업인력의 군무원 대체 유연성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놀고있는 설비를 돌려 산업생산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는 100만명을 군무원에서 빼돌려야 했는데... 가뜩이나 허덕대는 전선 상황에 그랬다간 자살 행위겠고, 거꾸로 야전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 산업 부문에서 100만명을 군무원으로 돌렸다간 당장 들고 싸울 무기생산이 격감하고... 독일의 딜레마는 이렇듯 매우 심각했습니다.
결국 "미국이 없었더라도" 소련은 동부전선에 약 500만명의 일선 전투원들을 유지하면서 1950년까지 매년 약 250만명의 손실을 감당할수 있었던데 반해, 독일은 여전히 약 250~300만명의 일선 전투원 규모에 매년 약 70만명의 손실을 감당할 수 있었을 뿐이었을겁니다. 인원과 각종 전차, 야포 등 대다수 측면에서 몇배의 물량 우위를 소련이 누리는 상황에 이러한 소모전의 구도에서 독일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전선에서 그만큼 격렬하게 싸우면서 소련인만 죽어 나가고 소련 물자만 소모 되며, 소련의 숙련노동자 수급만 힘들던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 동안 독일은 자체 산업의 특성 때문에 소련보다도 더욱 상대적인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으며 역시 무지막지한 타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서봉덕님이 말씀하신 힌덴부르크 계획과 유사한 문제점들은 아주 좋은 지적이십니다만, 그러한 문제는 분명 소련보다 독일에게 먼저 닥쳤을겁니다.
독일의 산업구조, 인력 수급구조는 소련과의 물량대결에서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또 그건 결국 각 체제가 현실의 물량전에 적합하게 조직화 하는 능력의 차이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굳이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소련은 미국없이도 이길수 있었다"는 것이 왜 "미국의 지원이 의미가 없었다"와 동등하게 인식되어야 하는지가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미국의 Lend-Lease 프로그램은 나름대로 충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독일은 한 100만명쯤, 소련은 한 200만명쯤 더 죽고 나서야 전쟁이 끝을 맺었을테죠. 독소전 자체가 지독한 비극이지만, 차라리 그 선에서라도 끝이 났다는게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미국의 힘이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P.S. 옛날에 봤던 가물가물한 통계 뒤져가며 정리하려니 지독하게 힘들군요... 저도 이런 소모전(?) 계속 하다가는 뻗겠습니다. 웬만하면 토론장까지 가지 않고 적당히 끝났으면... ^^
문체에서 목소리가 들림 ㅋㅋㅋㅋ
ㄹㅇㅋㅋ
나도 계속 그 혀짧은 발음들이 들리네ㅋㅋㅋ - dc App
ㄹㅇㅋㅋ
그런데 저 계산은 독일본토인구와 독일에 점령되지 않은 소련영토만 계산한 거야 아니면 헝가리 루마니아 그 외 독일이 동원할 수 있는 여타 지역 인구까지 고려한 거야?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전쟁은 더 끌었을 것이란 말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대패없이 모스크바까지는 밀 수 있었을 것이란 가정을 해도 될 것 같은데 그 상태라면 나치 협력국가들이 독일편을 더 들 수 있음. 그리고 일본조차 독일이 거기까지 가면 시베리아에서 공격시작하려고 별렀거든. 능력하고는 별개로 그게 일본의 전략이어서 빈집털이하려고 만주에 쌓아둔 그 80만쯤 되는 병력이 개기면 승패는 몰라도 독일전선에 집중하려는 소련을 역량을 분산시키는 데는 충분했을 거다
독일 협력 국가들의 능력은 독일 대비로 더 형편없었음 글고 점령지 관리 개판이라서 현지 인원의 상당수가 저항세력이었으니까 그것까지 따지면 더 병신됨 또 좆본이 소련 공격했으면 중국 전선은 더 불안정해지고 미군이 더 빨리 밀었음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342260/wwii-mobilization-by-country/
응 택도 없어
저건 인적 문제임. 동부전선에 보내진 헝가리와 루마니아만 130만이다니까 독일이 모스크바를 먹었다면 다른 나라, 다른 점령지들의 분위기도 달라졌을 수 있음 비시프랑스는 완전히 독일협력국이 됐을 수도 있고 대륙타통작전은 일본의 역대급 삽질이라 그걸 시베리아에서 했다 해서 딱히? 그리고 본론은 소련문데지 일본이 망하는 문제와는 무관함
렌드리스의 다른 역할이 그걸 받은 나라들이 군수물자는 물론 식량과 민간생산에 투입할 인력을 군대에 보낼 수 있게 해준 것이었기 때문에 만약 소련이 렌드리스를 받지 못했다면 실제만큼 동원하지는 못했을 것 같음
그나마 독일이 소련에 대한 우위를 제대로 누리려면 1942년에 스탈린그라드를 완전 점령해서 돈강유역에 탄탄한 방어라인을 만들어 둬야 하는데 A, B집단군으로 분산되어서 지지부진한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보충인력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제대로 렌드리스가 탄력을 받지않은 1943년 이전에도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카프카스 유전 점령을 모조리 실패한 마당 독일군 역량을 너무 과신하는거 아님?
그리고 모스크바 먹었음? 못 먹었지? 그때도 이미 독일군 손실대비 보충인력난은 심각했어. 괜히 청색 작전을 시작할때 남부전선에 이탈리아와 루마니아, 헝가리군까지 동원했을까? 게다가 망각하는게 있는데 이미 1941년 4월 13일자로 소련 일본간 불가침 조약이 이루어졌고, 남방작전을 계획 중이었기 때문에 대본영에서는 시베리아 침공을 생각하지도 않음. 독소전 개전 직후에 시도를 한다고 해도 8월에야 침공이 가능했고 몇 달 후 동계전투를 할 수 있는 보급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임
독소전쪽은 니가 더 잘 알겠지 그런데 1941년의 소련-일본 불가침조약은 니 말이 틀림 군갤에서는 일본군이 할힌골에서 참교육당한 다음에 소련군만 보면 ㄷㄷ떨면서 중립조약(불가침조약이 아니라 중립조약임)을 맺었기 때문에 소련침공은 생각도 못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음 당시 일본에서도 두드러진 반미주의자였던 외무대신 마쓰오카가 외교정책을 손댄 이래 일본에서는 소련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독일과 보조를 마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았음.
그래서 소련에 대비해서 방공협정, 삼국동맹까지 독일과 맺었더니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독일에게 뒤통수를 맞은 일본이 결국 일소중립조약을 맺었지만, 이후 독소전이 벌어지면서 일본은 관동군을 크게 증강시킴, 그게 저 80만 운운하는 곳이고, 1941년말 일본 내각의 결정은 독일이 이대로 소련을 밀면 일본군도 시베리아를 공격하겠다는 것이었음. 그리고 소련도 그걸 알고 있었음. 조르게가 일본 내부사정을 전해줘서 굳이 반응하지는 않고 독소전에 집중했지만, 나중에 일본이 소련에게 미일전쟁의 중재를 요청할 때 틱틱대면서 니들 우리 통수치려했자나하며 불평함. 그래서 일본이 소련을 칠 엄두를 못 냈다는 밈은 사실이 아니다. 그건 그 전력을 곶감빼먹듯이 남방과 대륙타통작전에 소모한 다음 이야기
모스크바를 못 먹었다는 니 말은 렌드리스를 받은 역사지
하지만 채박사의 글도 내 글도 렌드리스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을 두고 하는 말임.
또한 독소전 초기의 렌드리스에 대해서인데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에서 러시아 전차의 약 절반과 더 무거운 유형의 대부분은 영국의 Matilda와 Valentine 모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상당수의 Churchill 전차가 제공되었습니다. 이 차량은 전쟁 내내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 공급품의 전략적 가치는 오랜 적이 공통의 적에 대항하여 동맹이 된다는 강력한 상징성으로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전후 출판물에서 영국의 하드웨어가 등장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데 신중했습니다.
https://www.geostrategy.org.uk/britains-world/te
https://www.geostrategy.org.uk/britains-world/telling-the-truth-how-britain-helped-the-soviets-win/
독소전
초기에도 렌드리스는 충분히 중요했음
영국의 지원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과 수치는 1946년 4월 16일 당시 총리였던 클레멘트 애틀리가 하원에서 한 연설 에서 제시되었는데, 여기에는 보낸 내용과 비용에 대한 자세한 내역이 뒷받침되었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으로 축소하면, 영국은 3억 800만 파운드의 군수품(전함, 구축함, 잠수함 비용은 제외)과 1억 2,000만 파운드의 기타 보급품, 식량, 원자재를 보냈는데, 오늘날 가치로 약 300억 파운드입니다. 여기에는 전차 5,000대와 항공기 7,000대가 포함되었고, 공공 자선 기부금은 약 530만 파운드(오늘날 가치로 약 4억 9,000만 파운드)의 의료품을 제공했습니다.
일소중립조약 = 불가침조약맞음 이건 내가 잘못 본 것. 하지만 일본이 소련을 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님. 독소불가침조약과 마찬가지. 소련도 마찬가지로 조약 연장불가통보 후 1년을 안 지키고 일본을 침공함
모스크바 전선에 제대로 투입된 영국제 전차 전력이 92대고 그 전량이 전투에 투입된 것도 아니기에 그걸로 모스크바 전투 판도를 바꿀만큼 큰 기여를 했다는건 매우 비약임. 1942년 주된 렌드리스 루트였던 북해루트를 항해하던 PQ선단의 피해가 커서 일시적으로 중지되던 상황도 알고 있어야겠지? 이란루트또한 1942년 9월 부터 미군 공병부대가 이란에 투입되어 도로 공사 및 시설 설비를 통해 제대로 된 보급루트가 완비되었다는 걸 감안해야함. 실질적으로 렌드리스 지원이 완벽하게 탄력을 받기 시작한건 1943년 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소련 역량으로 독일과 격전을 벌인게 맞음.
그리고 일본이 관동군 전력을 크게 확충하고 관동군 특별대연습을 시행했다만 결국 유의미한 시베리아 침공 준비도 아니었고, 일본군이 예상한 필요전력 150만에도 못 미침.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4031988&s_type=search_name&s_keyword=%ED%88%AC%ED%95%98%EC%B2%B4%ED%94%84&page=1
일본의 독소전 참여까지 상정하려면 40년에 있었던 인도차이나 침공도 없고, 금수조치로 일본내 연료 부족문제가 가시화 되는상황도 없어야 하고, 그로인한 남방작전 및 진주만 공습 계획 조차 없다는 가정하에 고려해야되는 거신데 한마디로 전혀 현실성 없는 망상일 따름. 괜히 그 대본영이 소수를 제외하고는 독소전 관여를 생각하지 않은게 아님
차라리 영국본토항공전이 망해서 영국이 바다사자 작전을 통해 점령당하고 독일이 서부에 배치한 전력까지 전부 동원해서 독소전에 투입되었다면 어땠을까가 더 현실성 있어보임. 그랬다면 너가 말한거처럼 소련이 렌드리스 받을 기회조차 없었겠지
기본 전투단위가 백만에 동원단위가 천만인 미친 동부전선
"그리고 굳이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소련은 미국없이도 이길수 있었다"는 것이 왜 "미국의 지원이 의미가 없었다"와 동등하게 인식되어야 하는지가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 이걸로 공격 많이 당했구나...
독일 산업역량이 ㅆㅊ 난 것과는 별개로, 렌드리스는 소련이 가장 크리티컬한 시기를 버티게 해줬다는 것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 소련군 병사들 수기를 찾아보면, 무려 1943년 7월(쿠르스크) 직전에 전선의 병사가 '밥이 안 와서 굶었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걸 알 수 있음. 무슨 의미냐 하면, (이미 1년전부터 렌드리스를 수령중임에도)소련의 농업 분야가 붕괴 직전이었단 것임. 우크라이나를 빼앗겼으니까. 렌드리스는 블라우-스탈린그라드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순간에 소련을 살려주었음. 소련 공군은 서방제 부품으로 수리되었고, 우란 작전 당시 기계화부대는 마틸다부터 처칠까지 별별 기괴한것들을 끌고다니며 미제 트럭과 지프차를 타고 기동했음.
블라우-스탈린그라드는 자강두천 단두대 매칭이었고, 전략 목표를 맞추냐 아니냐가 전쟁의 흐름을 바꿀 정도로 중요했음. 독일이 점령에 성공한 그로즈니는 독일의 석유 부족분을 거의 다 메꿀정도로 거대한 유전이었기 때문에, 이게 가동되기 시작하면 철길 옆에서만 기동하던 석탄 기마부대인 독일군이 진짜 기계화부대로 서서히 바뀌게 됨. 이래서 렌드리스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힘듬. 양적으로 보면 생각보다 적다 싶겠지만, 소련군이 이거 없이 1942 전역을 제대로 이끌 수 있느냐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
ㄴ 1942년에는 랜드리스 영향 극소한데 잘 나가다가 뭔 개소리?
나치가 저 지경이었는데 더 심각했던 건 소-중대 당 총기 보급률이 5-60%정도였던 일본제국
이 글 자체는 예전에도 올라왔던 글이고... 딱히 새로울 건 없음. 소련이 가진 저 인적자원도 결국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키고 전선으로 이동시키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음. 렌드리스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무전기라든가 여러 신뢰성 있는 장비들을 통해 실제 병력 운용에 있어서도 훨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게 해줬지. 쉽게 말해 독일군 주력을 섬멸하고 베를린 레이스가 가능하냐 아니면 교착상태에서 밀고 밀리다가 서로 병력 떨어져서 휴전하느냐의 차이라는 거지. 그래서 소련도 렌드리스 없이는 대규모 반격을 통해 독일 본토까지 밀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 했을 거라는 거.
중일전쟁에서도 중국이 일본보다 훨씬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느냐 하면 아니듯이, 소련도 마찬가지임. 렌드리스 없이는 일단 식량도 부족하고 의복도 부족하고 철도, 화차, 트럭, 각종 원자재, 석유 같은 에너지 자원에 이르기까지 뭐 하나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자원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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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Lend-Lease
(대공황
이후 소련정부의 의뢰로 미국회사들이 소련에 지어준 공장들이 군수용도로 전환된 것에 더해) 전쟁 중에 생산된 기관차는 446대뿐이었고 [ 40 ] 그중 1942년과 1945년 사이에 제작된 것은 92대뿐이었습니다. [ 41 ] 소련이 전쟁 중에 생산한 철도 장비의 92.7%는 대여차법으로 공급되었습니다. [ 36 ] 여기에는 기관차 1,911대와 철도 차량 11,225대가 포함됩니다. [ 42 ] 소련군의 물류 지원의 대부분은 수십만 대의 미제 트럭을 통해 제공되었고 1945년까지 적군의 트럭 전력의 약 3분의 1이 미제 였습니다.Dodge 3 ⁄ 4 톤 및 Studebaker 2 + 1 ⁄ 2 톤 과 같은 트럭은 동부 전선
의 양측에서 해당 등급에서 가장 뛰어난 트럭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공급한 전화 케이블, 알루미늄, 통조림 식량 및 의류도 필수적이었습니다. [ 43 ] 렌드 리스는 또한 상당량의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습니다.소련 공군은 18,200대의 항공기를 받았는데, 이는 소련의 전시 전투기 및 폭격기 생산량(1941년 중반~45년)의 약 30%에 해당했습니다. [ 36 ] 대부분의 전차 부대는 소련에서 제작한 모델이었지만 약 7,000대의 렌드리스 전차(5,000대 이상의 영국 전차 포함)가 적군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이는 전시 생산량의 8%였습니다. 대여법의 특히 중요한 측면은 식량 공급이었습니다. 이 침공으로 소련은 막대한 양의 농업 기반을 잃었습니다. 1941-42년 추축국의 초기 공세 동안 소련의 총 파종 면적
은 41.9% 감소했고 집단 농장과 국가 농장의 수는 40% 감소했습니다. 소련은 점령되기 전에 해당 지역에 있는 모든 동물을 이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짐마차와 농장 동물을 잃었고 추축군이 점령한 지역 중 소련은 (생략. 원문참조) 를 잃었습니다. 트랙터와 탈곡기 등 수만 대의 농업 기계가 파괴되거나 노획되었습니다. 농업 역시 노동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1,950만 명의 취업 가능 연령 남성이 농장을 떠나 군대와 산업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소련이 공세를 펼치면서 농업 문제도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추축국으로부터 해방된 지역은 황폐해졌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을 필요로 했습니다. 따라서 대여-임대차법은 엄청난 양의 식량과 농산물을 제공했습니다.
근데 진짜 궁금한건데, 렌드리스 없어도 1000만명쯤 더 쳐박으면 없던 정유탑이 생겨서 항공유를 뽑아낼 수 있고, 기관차와 유조차량들이 뚝딱뚝딱 조립되어서 철로를 달리며 사람과 기름을 나를 수 있고, 트럭들을 뽑아제껴서 보급과 수송을 할 수 있는거임? 원자재 공급도 어마어마한 양이고 그걸 생산 가능했을지도 의문이지만 배치-생산-공급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완성품들을 처음부터 생산해야하는건 그냥 인력으로 계산해선 안 될 것 같은데
ㅇㅇ 그 말 그대로 병력으로 동원가능한 인적 자원이 있다고 해서 독일에게 반격해서 베를린까지 밀 수 있다는 건 허상이지.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