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군, 2006년 작성
다나카 신이치 육군 참모본부 작전과장
일본육군은 전간기 (1차 대전시의)영국을 모델로 한 총동원을 동경했지만 사실 그 필요는 없었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이것은 인접국, 또는 전장이 해외라는 섬나라의 태생적 한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일본은 사실 원래 징병제가 필요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였거든요. 게다가 일본의 징병제는 국민개병제라고는 해도 평시는 갑종만이 소집되는 체제이며, 그 합격 비율도 매년 변동되는 기형적인 체제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현역병 전원이 정예병으로 훈련되었다고도 보기 어려운)
흔히 징병제의 완성도는 성년 남자의 총수에 대한, 훈련이 끝난 예비역 병사의 비율로 나타내어 집니다. 이 훈련율에 대해 제 1차 대전 전의 독일/프랑스 양국은 최소 6할 이상을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935년까지도 2할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 2할은 영국 등 지원제 국가와도 큰 차이가 없는 수치입니다.
어찌본다면 전간기 내내 일본은 대국 중에서는 미국과 더불어 가장 병영국가와는 먼-_-존재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쇼와기 들어 육군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신진 참모 장교들은 일본의 태생적 한계, 또는 국가기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단지 총동원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중일전쟁의 시작과 제 2차 대전이 유럽에서 개시된 상태까지도 완전 전시체제라고는 말하기 힘든 상태........구체적으론 그 훈련 비율의 향상조치를 전혀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기묘하지만 독일도 총동원을 실시하지 않았던건 마찬가지였는데, 독일 또한 1943년까지는 준전시체제였습니다...^^; 한편 프랑스와 소련은 조기에 완전한 총동원을 실시했지요.
당시 구 일본육군은 근위사단을 제외한 1~10번대의 현역사단을 중심으로 평시 20개사단 체제였는데( 사실은 우가키 군축으로 3개 축소 - > 17개 사단) 태평양전쟁 개전 시점까지 순차적으로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설 사단을 제외하면 49개 사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편제의 변경(주로 화력 증강)으로 1개사단의 구성은 보병 3개 연대를 기준으로 정원은 이전보다 3000명 감소하고 있었지요. (이전까지는 4개 연대 체제)
신설사단은 쉽게말하면 예비 사단으로서(1936년 병제 변경) 장비가 구식인데다가 거의 내지(본토)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 "부재중 사단"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넘버는 100번대) 물론 일부는 대륙에 보내졌고 또 대륙 전선 외의 경비부대로 혼성여단도 만들어졌습니다만 여전히 미흡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예를 보아도 독일과 프랑스가 제 1차 대전에서 개전후 단 15일만에 80개 사단을 동원했다는 총동원의 박력을 느끼긴 힘듭니다. 더군다나 당시 시점에서 독.불의 인구는 1941년 시점의 일본의 절반 정도였는데도 말이죠.
결국 이때문에 계획된 관동군 특별대연습, 통칭 관특련은 타나카 신이치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장의 주도로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1941년 7월 2일의 대본영 최고회의에서 결정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이 연습의 목적은 당연히 동원 하령에 의한 병력의 소집 충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부 시행절차의 검토로 들어가자 문제가 속출했습니다.....예비역의 소집은 소집영장에 의한다는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기밀의 보관 유지 때문에 임시 소집영장이 발부되는 등 말이죠........ 어쨌건 관료(참모)들 스스로의 법률위반(...)이었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곧 구제 조치를 찾아낸점은 뭐 할 말-_-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때문에 오히려 당시 절박했던 일본의 사정은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을지도요...ㅡ,.ㅡ
동원은 1941년 7월 7일(100호 동원)부터 시작되어 재만주 병력을 25만명에서 85만명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행해졌습니다. 이 동원은 7월 16일의 102호 동원으로 중지된 이후는 남방에의 동원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관동군 특별대연습은 매우 기괴한 해프닝(...)만으로 끝나고 만 것이죠.
그럼 이 동원연습(당시 참모본부는 실제 동원이라는것은 적에게 위협을 주는 것이 목적이므로 연습보다도 실제 동원 후 공세 직전까지의 능력을 보여주는것 만으로 좋다고 판단했습니다.)으로 타나카 신이치 작전부장은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요? 그는 혹시 41년 6월 22일의 독소전 개시를 염두에 둔 것일까요?......그럼 동맹국에게의 협력? 그러나.......문제는 당시에도 일소 중립 조약은 발효하고 있었습니-_-다.
군사적인 측면으로 봐도 재만주 85만명의 일본육군으로 100만 극동 소련군에게 적극적인 공세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만약 참모본부의 계획대로 이후 100만명을 더 증원하는것도 이후 일본군의 사정을 봐서도 뭐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물론 예산은 필요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어중간했지요. 만약 동원을 이유로 극동 소련군이 공세로 나오면 일본군도 간단하게는 패배하지 않았겠지만( 당시 예비가 소련에는 없었음) 국지전에서 소련의 보병·전차 협동에 의한 지역 지배력 및 진지 구축법을 높이 평가한 참모본부 내의 판단은 여전히 부정적이었습니다. ( 핫토리나 세지마 등의 주장)
그런 고로, 당시 참모본부 내에서도 이 동원이 감당하기 힘든지 아닌지에 대해 재검토 논의가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당시 참모본부 최대의 당면과제는 예정 전장에 최대의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는데...소련의 인구는 일본의 3배.....게다가 벌써 부분 동원을 실시한 단계에서만도 일본육군 총병력의 5배인 900만명 300개 사단을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다면 독소전이 시작되어 소련군 다수가 우랄 이서로 빠져나간다고 감안해도, 일본이 최소 50개 사단 150만명정도를 동원하지 않으면 승산은 없었습니다. 독소전 개전 이후도 소련이 극동을 위해 남겨둔 사단은 최소 30개 사단이라고 판단, 15개 사단은 서송된다고 전망한 것 같지만 이것 또한 판단능력 결여와 시베리아 철도 경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실제로도 소련군은 극동군을 30개 사단에서 더 감소시키지 않고 더욱 증가시켰습니다. 당연히 소련도 이 병력으로는 쉽게 공세하러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태평양전쟁 전 기간동안 만주에서 양군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원래 향토 연대주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둔지에서의 병력 배치를 논해도 별로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바로사 작전 발동 직후에는 스탈린도 본격적인 총동원을 하령, 각 군관부별 관할구역에서 예비 사단이 대량으로 편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소련과 일본은 그 자체의 규모가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동원된 병력에 적절한 장비와 훈련, 편제를 갗추는것도 중요하지요. 흔히 간과되는 면이 있습니다만 스탈린이 지배하는 나라의 공업력-_-은, 제정시와는 완전히 달랐기에 독소전 개시후 1년간........거의 원조도 없는 가운데 자력으로 550개 사단을 편성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덜덜덜)
실제로도 소련은 옴스크 이동으로 37개 사단을 배치해 극동에 30개 사단은 상시 즉응할 수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게다가 제 2차 대전의 전 기간동안에도 이정도의 병력은 항상 시베리아에 있었지요. 물론 이것은 총동원 실시 결과 예비 사단의 집결지가 이쪽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총동원이라는것은 평시부터 닦아온 기반이 중요하며 사실상 거의 모든 남자 전원을 일상적으로 훈련시키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지리 환경은 그런 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지요. 균형 예산(일본 육군은 왠지 루덴도르프의 총력전론을 신봉했습니다)을 전제로 한다면 동원력의 부족을 정면장비(구 일본육군에서 말하는 기갑 및 항공병기)로 보충해야 하며 이것은 기갑사단의 편성이나 항공병력을 중점으로 군의 체질을 바꾸어야 합니다만 생산능력과 소비량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경제 경시의 타나카 작전부장에게는 그것이 무리였습니다. 또한 당시 육군 전횡의 풍조 아래에선 정치가들의 어드바이스조차 얻을 수 없었겠지요.
타나카 신이치(1893-1976)
1915년 육사 졸업(25기)
1923년 육대 졸업(35기)
1928년 보병 소좌로 진급
1928~30 소련.폴란드(리가, 모스크바) 주재무관
1931년 보병 중좌로 진급, 관동군 참모
1932년 베를린 파견 참모본부 무관
1935년 보병 대좌로 진급, 군무국 병무과장
1936년 군무국 군사과장
1938년 육군소장으로 진급, 주몽군참모장
1939년 참모본부 제 1 부장
1940년 육군중장으로 진급
1941년 남방군 총사령부로 전출
1942년 제 18 사단장
1943년 미얀마방면군 참모장
1945년 프놈펜 부근에서 비행기 추락 중상
1945년 8월 24일 귀국·입원
1945년 11월 예비역 편입
결과적으로 이렇게 고찰해보면 관동군 특별대연습은 타나카 신이치 작전부장이 뚜렷한 전략 목적(외교 목적)과 작전에 대한 구상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소전만을 보고 소련이 공격해 오지 않을것을 예측,(사실 이것 자체는 올발랐습니다.) 단지 즐긴(...) 작전의 현장 연습이라는것이 됩니다. 여담이지만 타나카 신이치 부장은 극동군사재판에서 참모본부 작전부장이란 직책은 위에서 내려운 명령에 의해 계획을 만들 뿐(...)이라고 변명해 모든 혐의를 무토 군무 국장에게 씌운 비열한이기도 하죠. ㅡ,.
구 제국 육군은 정치에 대한 작전의 우월을 주창했지만 작전이 정치적 효과(=외교적 효과, 예를 들어 중립국마저 일본에 적대하게 된다)를 불러 작전을 아무리 세워도 필패가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선 전혀 고려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관특련은 오히려 이것을 두려워해 어중간한 유희에 불과한 계획에 혼자 설친것에 지나지 않았지요.
당시 육군 참모본부에는 작전통, 또는 작전벌(閥)이라는것이 존재해 타나카-핫토리-츠치의 라인업아래 육군 전체가 끌려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라인업이 정말 진지하게 작전에 임했는지라는 점이죠.......사실 츠치-세지마가 짠 말레이 작전을 제외하곤 육군은 견실한 작전이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게 개인적 감상입니다. 전에 " 참모본부 작전과 " 에서도 소개했지만 실제 당시 참모본부내에선 무려 북진론........-_-; 독소전으로 시베리아 방면의 소련군 병력이 유럽으로 서송되면 대소 공세의 찬스가 있다고 주장한 참모도 있었습니다. (타카야마 노부타케) 그러나, 당시의 일정상 공세 준비 종료가 8월이라는 것은 최악......ㅡ,.ㅡ; 그게 아니라면 동계를 극복할 작전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고요. (물론 당연히 없었습니다)
이후 타나카는 1942년 12월......총리 관저에서 사토 육군성 군무 국장과 논쟁중 분을 참지못해(...) 무려 토죠에게 「바보새끼」 (...) 란 욕지거리를 토해내 이후 남방군(버마)으로 전임당했습니다. 버마로 쫓겨나고 나서도 그 강경자세는 변함없어 랭군 철퇴에 끝까지 반대.......결사 항전을 주장했지만 기무라 군사령관은 타나카가 다른곳에 시찰나가 있는 동안에 몰래 군사령부를 철퇴시켰습니다.ㅎㅎㅎ 이렇게 무책임하고 난폭한 인물이 사실상 육군 통수부의 톱에 있었던 것이었지요.
출처
M78.com
imperialarmy.hp.infoseek.co.jp
배군 이 새끼는 하도 불펌번역해서 자기가 쓴 글인양 행세한 게 많아서 아마 지도 뭐가 자기 글이고 뭐가 불펌번역인지 기억 못할 듯
보통 그 아재가 아예 번역문으로만 작성한건 번역글란에 넷상 정보랑 자신이 읽었던 서적 바탕으로 작성한 글은 군사글에 올렸던걸로 기억함. 그나마 그 때 밀글들 작성되던 것중에 출처 링크나 서적명 달기라도 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니
배군이 출처붙인건 일본 원문저자가 배군 블로그 박제하고 공개고로시를 한 이후고 그 이전은 그없
앗... ㅋㅋㅋㅋㅋ
위키피디아 관특연의 일본어판과 영어판을 비교했었는데, 희한하게도 영어판이 더 양도 많고 자세하더군요.
영어판은 서구측 연구와 일본측 연구가 잘 어우러져서 그럼. 그 문서 저자하고 정보를 공유해주던 사이라서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