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지도부와 독일 국민을 나눠 생각할 마음은 있었지만 연합군은 히틀러와 하수인들을 군부 지도자들과 프로이센 전통과 나눠 생각할 마음은 없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도 결국 프로이센 군국주의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는 전황이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해져서 독일 내부 저항 세력과의 교섭에 힘을 쏟을 필요도 없었다. 히틀러 반대 세력은 말만 요란했지 별로 한 일이 없었을 뿐더러 히틀러가 손에 넣은 영토도 내놓을 의향이 없어 보였으므로 더욱 마땅치 않았다.

  물가통제위원을 지냈고 앞에서 본 대로 1930년대 중반 이미 히틀러와 사이가 틀어진 카를 괴르델러를 중심으로 모인 민족주의 보수 진영의 일부 원로들은 분명히 그랬다. 괴르델러와 그의 생각에 대충 공삼하는 사람들, 특히 참모총장을 역임한 루트비히 베크, 이탈리아 주재 독일 대사를 지낸 울리히 폰 하셀, 프로이센 재무장관 요하네스 포피츠, 한때는 열성 나치 당원이었으며 정치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던 베를린 대학 교수 옌스 예센은 나치 정권의 야만성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들은 독일의 지위를 열강으로 되세우려 했고 독일이 중유럽과 동유럽을 계속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물러나면 총리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던 괴르델러는 1942년 초에 앞으로 전쟁이 끝나고 "양식 있는 정치 체제"가 들어설 경우 "앞으로 일이십 년 안에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 국가 연합"의 성립을 구상했다. 1943년 여름에는 독일의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는데도 못 말리는 낙관론자였던 괴르델러는 1914년의 동부 국경선을 회복하고(극에 달한 야만성으로 독일이 다시 손에 넣은 폴란드 회랑도 내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히틀러조차 병합하지 않은) 남부 티롤과 프로이센 땅이었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벨기에에 넘어간 외펜-말메디 지방과 함께 오스트리아, 주데텐란트를 보유하고 알자스-로렌을 놓고 프랑스와 협상하고, 독일의 주권 축소는 거부하고 전쟁배상금도 내놓지 않고 (소련을 제외한) 유럽과 경제 통합을 한다는 대외 정책 목표를 내걸었다.

출처: 히틀러 II, 이안 커쇼 저, 이희재 옮김, 교양인, 2010년, 813~8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