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0일은 날짜변경선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 ‘당직자를 제외한 승조원은 모두 비행갑판으로 집합하라’는 함내 방송이 있었다. 집합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필자는 샤워나 할까 하고 어정거리다 갑판으로 나갔다. 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는 민간인이지만, 함에 편승한 이상 함내 규율을 적극적으로 준수하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신념이다.
비행갑판의 격납고 셔터에는 ‘날짜변경선 통과 행사’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집합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되었다. 아하, 용왕제로구나!
오래 전 범선 시대, 오로지 바람의 힘에만 의지하여 항해하던 시절, 어느 범선 하나가 잘못하여 적도 해역의 무풍대(無風帶)로 들어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 필경 기아와 병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꼼짝없이 죽게 된 뱃사람들은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님에게 ‘제발 바람을 일으켜 줄 것’을 간청한 데서 ‘적도제’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힘 좋은 기관을 가동해 항해하는 오늘날에는 굳이 용왕님을 애타게 찾을 필요가 없다. 하와이는 북반구에 있어 림팩함대는 적도를 가로지르지 않고도 하와이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함상 유희를 마련한 것은 오랜 항해의 삭막함을 달래주기 위함이렷다. 하와이까지 가는데 적도를 지날 일은 없으니 누군가가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용왕제를 올리자고 건의했을 것이다.
곧 “용왕님 납신다!”는 멘트가 있었다. 잠시 후 금빛 색종이로 ‘임금 왕(王)’자를 오려붙인 관을 쓰고 흰색 어의(御衣)를 입은 용왕이 양팔을 사통팔달로 휘저으며 등장했다. 사방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어서 김규철(金圭喆) 주임원사가 “유세차! 태평양 바다를 관장하시는 용왕님이시여!”로 시작하는 안전항해와 대양해군을 염원하는 제문 낭독을 끝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벤트가 펼쳐졌다. 용왕을 보좌하는 신하가 차례차례 ‘죄인’을 불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맨 먼저 불려나온 죄인은 양만춘함의 최고 지휘권자인 ‘윤함장’이었다. “죄인은 입항중이면 별다른 일도 없이 현문을 들락거려 당직자로 하여금 ‘함장 승함!’ 혹은 ‘함장 하함!’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방송케 하였으니, 그 죄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 죄가 가볍다고 할 수 없을 것인즉, 당장 곤장으로 다스리는 게 타당한 줄로 아뢰오.” 검사의 기소장 낭독이었다. “허허, 거 고얀지고! 당장 곤장을 치도록 하라!” 용왕의 지시에 죄인은 당장 널빤지 위에 엎디어 뉘어지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팬티 바람에 온몸을 형형색색으로 칠한 형리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널따란 목제 노(櫓)를 들고 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윤함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자 변호인이 나섰다.
“용왕님, 그건 아주 잘못된 기소입니다. 함장이라는 직책은 함 운용은 물론이고, 외국항 기항중에는 해군 외교를 담당하여야 하는 등, 모든 것을 지휘·관장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현문을 자주 출입한 것이지 당직자를 골탕먹이려고 그런 것은 아닌 줄로 아뢰오.”
“어허!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저 벌금 200달러를 선고하심이 지당하신 줄 아뢰오.”
“으흠!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
다음에는 슈퍼 링스 항공대 파견대장 유중령과 ‘소설가’인 필자가 호명됐다. ‘아이고 왜 나를 부르는가.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낸다고 야단치려나’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은 출동한 이래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은 즉, 당장 목을 치심이 가한 줄 아뢰오.”
검사의 논고는 시퍼랬다. 그러자 날이 시퍼런 칼을 든 망나니가 두 죄인의 목덜미를 겨냥하고 칼춤을 춘다. 다행히 이번에도 변호인이 나섰다.
“용왕님, 그게 아니옵니다. 죄인은 비록 무위도식하고 있는 듯하나 항공대장은 훈련이 시작되면 적 잠수함 디핑작전에 엄청난 무공을 세울 것이며, 소설가 또한 이번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 해군의 명예와 위상을 떨치게 할 명작을 집필하기로 되어 있은 즉, 다만 밥을 많이 먹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다스리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줄로 아뢰오.”
“음, 듣고 보니 그 또한 옳은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저 각각 100달러씩의 벌금으로 죄를 탕감함이 옳다고 아뢰오.”
“거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렇게 죄를 뒤집어쓴 죄인이 기관장·부장·작전관·보수관·갑판장 등 2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살기 위해 내놓은 벌금이 꽤 많이 징수(?)되었다. 필자도 목을 붙이고 있기 위해 100달러를 내놓았다. 그 돈은 승조원들의 복지사업비로 적립된다고 했다.
죄인 문초가 끝나자 여흥이 펼쳐졌다. 어디서 구했는지 여자용 원피스며 치마 차림에 입술에 연지까지 찍어바른 예쁘장한 미인들이 출전했다. ‘미스 양만춘함 선발대회’가 열린 것이다. 배꼽을 쥐어야 할 만큼 색정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선발대회였다. 남성들만 우글거려 삭막한 분위기가 싹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태평양의 한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https://shindonga.donga.com/society/article/all/13/101852/1
신동아신동아shindonga.donga.com신동아, 2002년 9월호 - 해양작가 천금성의 2002 RIMPAC 참관기 내용 중
https://brunch.co.kr/@taengg22/58 - 2012년 해군 용왕제에 대한글
https://worldofwarships.asia/ko/news/history/naval-history-in-photos-crossing-the-line/
양키들이 적도제에서 장교를 담그는 방법 ㅋㅋㅋ
그놈의 적도제는 진짴ㅋㅋㅋㅋㅋ - dc App
용왕은 누구였을까
보통 말빨되는 수병이 용왕역할을 하는거 같음
개꿀잼 카타르시스 ㅆㅅㅌㅊ였겠네 ㅋㅋㅋㅋㅋㅋㅋ
벌금 200달러 개웃기넼ㅋㅋㅋㅋㅋ
같은 양만춘함을 타셨던 분이셨네 우리배에 이런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 dc App
지금은 작고한 해양소설 작가 천금성씨가 2002년 림팩훈련때 승함해서 작성하신 글 내용임 ㅋㅋㅋ
본문에 윤함장이라고 언급된 사람은 이후 해사교장 및 여러 보직으로 근무하다가 소장으로 존역한 윤공용 제독
ㅇㅎ 감사합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