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전쟁 전략이 바뀌다
당 태종은 647년 2월 고구려 원정 재개를 논의하였다. 이 논의에서 기존의 대고구려 전략을 재검토하였다. 기존 전략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속전속결로 일거에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수의 침공과 이번의 침공에서 증명되었듯이, 북아시아 유목민 집단과 달리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망을 펼치는 고구려는 쉽사리 단기간에 승부를 낼 상대가 아니었다. 그에 따라 새로우 채택한 것이 장기 소모전 방략이었다. 즉 대규모 병력 동원 대신 소규모로 육로나 해로로 고구려를 기습 공격하고, 고구려군이 반격하면 철군하는 치고 빠지는 식의 소모전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수년간 되풀이 하면 제대로 봄철에 씨를 ㅜㅃ리거나 가을철에 추수할 수 없게 되어 고구려는 곤경에 처하게 마련이다. 물론 당 측도 군사비가 많이 들겠지만, 당시 당의 인구와 생산력은 고구려에 비해 월등하므로 장기 소모전은 고구려를 심히 피폐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럴 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계획에 의거해 당은 647년 5월 이적이 3천의 병사와 영주도독부의 병력을 동원해 남소성 등 소자하 유역 일대에 기습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저항하는 고구려의 군민을 공격하고 성의 외곽에 불을 지른 뒤 신속히 후퇴하였다. 7월에는 해군 1만을 동원해 요동반도의 남쪽 해안지대로 침입하자, 고구려군이 대항하여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으나 격파되었다. 당군은 계속 나아가 요동반도 남단의 석성을 공략하였고, 이어 적리성을 공격한 뒤 퇴각하였다. 이듬해 648년 4월에는 당의 해군이 압록강 하구로 진입하여 1백여 리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을 공격하였다. 박작성의 고구려군은 돌연 나타난 적군을 맞이하여 성문을 열고 나아가 용감히 싸웠으나 패배하자 성 안으로 후퇴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전년에 이어 당군이 요동반도 남단 해안지대를 유린하고 이제는 압록강 하류 유역까지 군사작전을 감행하였다. 박작성이 함락되면 당군이 요동과 평양을 잇는 부분에 큰 쐐기를 박는 꼴이니 고구려로선 참을 수 없는 사태이다. 당군이 박작성을 포위하자 고구려 중앙에서 안시성과 오골성에서 차출한 병력 3만을 보내어 박작성의 방어를 지원하게 하였다. 양군의 일차 충돌에서 당군이 우세하였다고 하나, 당군은 더 지체하다가 포위되는 날이면 전멸할 수 있으므로 서둘러 철수하였다. 하지만 당군이 박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의 작전으로 고구려의 군사적 손실을 강요하고 민심을 크게 동요하게 하였으니 당의 전략은 큰 성과를 올린 셈이다.
물론 당으로서도 잦은 군대 투입에 따른 장기 소모전으로 재정적, 군사적 부담이 컸지만 상대적으로 고구려에 비해 손실이 적었다. 고구려의 인구는 668년 멸망 당시 약 69만 7천 호라고 전한다. 이와 가까운 시기인 신룡 원년(705) 당의 호수를 615만 6천여 호라 전한다. 양국의 구체적 상황이 다르므로 이 숫자를 평면적으로 대비하는 것은 정확한 비교라고 하기 어렵지만 대체적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의 호구 수에는 당군의 주요 전력인 피복속 유목민 집단 등 기미주의 호구는 포함되지 않았다.
출처: 삼국통일전쟁사, 노태돈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년, 113~115쪽
백제 침공 전 당나라가 고구려 서부 국경을 공격한 양동작전으로 고구려의 정세 파악 실패
당은 백제공략전에 앞서 658년과 659년 고구려 서부 국경에 공격전을 감행하였다. 즉 658년 정명진, 설인귀 등을 장수로 삼아 고구려의 적봉진을 공략하였으며, 659년 11월에 계필하력과 설인귀가 요동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미 대백제공략전 계획이 확립된 상황에서 일련의 당군의 작전은 고구려로 하여금 방어력을 서부 국경에 집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대백제전이 벌어졌을 때 고구려가 이에 개입하여 파병할 수없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서 일종의 양동작전이라 할 수 있다.
(중략)
한편 660년 11월 1일 고구려가 임진강변의 신라의 중진인 칠중성을 공격했다. 신라-당군의 백제 공략전에 대한 뒤늦은 대응이었다. 아마도 당이 지난 2년간 요동 방면에서 행한 군사작전 때문에 당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 정세 파악에 치중하다가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무튼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칠중성이 함락되었다. 신라는 제대로 응원군을 보내지 못하였다. 이대 워낙 백제 부흥군 진압에 주력을 투입한 상황이라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도 더는 남으로 밀어붙이지 못하였다. 당의 동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 책, 148~161쪽
위의 내용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고구려가 이미 수-당 통일 중국 국가와 반세기 넘게 전쟁 하느라 국력 소모가 심해서 의지가 있다 해도 그럴 만한 여력이 있었을까 싶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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