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배군, 2017 (원 출처인 이글루스는 폭파되었다...)




의외겠지만 쇼와 10년(1935) 무렵까지 겐다 미노루(당시 대위)는 해군대학교에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겐다는 현장에서 뛰는 전투기 파일럿으로 대성하기 위해 해군대학교 따위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구 일본해군에서 해군대학교의 입학 시험은 일 년에 한 번 응시가 가능했고 자격은 현역 대위부터 가능했습니다. 당시 대위의 일반 정년은 5년으로 오 년 간 총 다섯 번 응시할 수 있었는데 만약 소좌로 진급되면 딱 한번, 진급 한 당해 년도만 가능한 구조였습니다.


1930년 12월 대위로 진급 한 겐다 대위는 이미 대위 5년차였지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해군 대학교 시험에 응시 한 적이 없었습니다. 즉 애초에 해대에 갈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었지요.




아마도, 겐다가 현역전투조종사 시절 열심히 타고 다녔을 나카지마 90식 함전



그러던 어느 날, 요코스카 항공대의 부장 오니시 다키지로 대좌가 분대장 겐다 미노루 대위를 불러 해군대학교에 들어가도록 설득합니다. 물론 오니시 자신도 해군대학교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아시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오니시는 대위 시절 이미 해군 대학교의 입교 필기 시험을 합격해 둔 상태였지만, 정작 구술 시험 며칠 전 음주 상태에서 게이샤를 두들겨 팬 사건이 있어(...) 소행 불량으로 이후 시험은 응시 불가.....결국 해군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력을 가진 남자였죠;;


여튼, 이 오니시 대좌는 겐다 대위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겐다 임마, 네놈이 잘도 연구회 등을 열심히 해서 노력하는거 잘 알어.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 아깝지 않도록 해군의 항공 정책에 대해 (해군대학교에 가서)수정해야 할 일이 앞으로도 많이 있을거야. 엉? 그러니까 가라. 해군대학교. 」



「 현 시대 항공기의 발전은 하루 하루가 다릅니다. 현장의 이 감각을 모른 채로 연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탁상 공론. 저는 그것을 현장에서 하나 하나 해결하면서 연구하고 싶습니다만. 」



「 그래 맞어. 하지만 문제를 해결해도 항공은 진보하지 않는 것이다. 뭔소리냐면 네놈이 말한대로 전투기만 타고 있다면 현장의 문제는 해결이 되겠지. 하지만 항공 정책의 지도 등은 할 수 없어 」


「 왜죠? 」



「 ..하. 이녀석. 진정 고효율의 군비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럴라면 어리석은 것 같아도 일단 네놈 같은 녀석들이 해군대학교에 들어가 미래에 합당한 포스트에 올라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



사실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았긴 해도(;;;) 이렇게 개성 강한 인물들이 확고한 자기 주장을 가지고 높은 포스트에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이 일본 해군의 매력(;;) 인데요. 여튼, 위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득 오니시는 겐다를 매우 귀여하고 있었고(...) 나름 밀어줄라고 아낌없는 조언을 주었습니다.


결국 겐다 대위도 존경하는 상관인 오니시 대좌의 여러 차례에 걸친 설득 끝에 이를 납득, 해군대학교 시험에 응시하기로 했고 바로 합격해1935년 10 월 31 일 해군대학교 갑종학생 35기로 입교했습니다. 겐다의 나이 31세 때의 일이었죠.


입학 반 년 후인 1936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해군대학교의 전략 강사는 갑종학생들에게「 대미 작전 수행에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해군의 군비 방식에 대해 논하라 」는 취지의 대책 과제를 내 줍니다(...)


이 대책 과제를 생각하고 있던 사이, 겐다는 당시 해군 군비에 대한 더 중대한 의문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겐다 대위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 일본 해군은 전함 중심주의가 해군 전략 전술 사상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소위 거함 거포주의다. 이 사상은 청일전쟁, 미서전쟁 등의 해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러일전쟁과 제 1 차 세계 대전의 여러 해전을 통해 부동의 해군 전략 사상이 되었다. 이러한 거함 거포주의는 적의 함선을 격침하여 적의 전투력을 소멸시킨다는 것으로, 군함 만을 대상으로 한 전투를 상정한다면 절대 방어력이 약한 소형 함정을 다수 건조하는 것 보다는 방어력이 강한 전함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그 근거이다.


이러한 전함에 탑재되는 대구경 함포는 적의 전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 수상 함정에 대해서는 필살의 위력을 발휘한다. 또한 거함 자체는 방어력도 강력하기 때문에 해전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동종의 수상함이 아닌 항공기와 잠수함 등 전혀 질을 달리 한 전력을 가진 상태에는 맞지 않는다. 대구경 함포는 항공기나 잠수함을 공격하기에는 매우 비 효율적, 비 경제적인 무기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 해군이 항공기와 잠수함으로 해군 전력을 구성한 경우 일본 해군의 두통거리인 미 해군의 주력 전함 열 다섯 척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여 행동할 것인가. 공격해야 할 목표가 없는 것이 아닌가. 공격 할 목표가 없다는 것은 일본의 전함 대신 일본군 항공기와 잠수함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전함은 단지 일본 해군의 항공기와 잠수함을 공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되지 않을까??」


이러한 겐다 미노루 대위의 구상을 좌우한 것은 오니시 다키지로 대좌가 말한「고효율의 군비」였습니다. 그래서 겐다 대위는 위의 구상을 가다듬어 해군대학교 「 대미 작전 수행에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해군 군비 방식에 대해 논하라 」는 대책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결론이 붙는 논문을 작성해 제출합니다(...)


「.......(이하중략).....결론적으로, 우리 해군 군비의 핵심은 향후 기지 항공부대와 항공모함 등 항공 군비에 두고 잠수함 부대를 보충해 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해군 군비를 전면 재구성 한다. 또한 이들 각 부대의 전력 발휘에 필요한 구축함, 순양함 등의 보조 함정은 필요 최소 한도로 보유하고 전함, 고속전함 등의 현행 주력함들은 스크랩하거나 계류하여 부두를 대체 할 것. 」



.........그리고, 대망의 작업 과제 연구회가 열렸고 겐다 대위가 예상한 대로 해군대학교는 파란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학생들의 논문은 대개 현재 해군의 군사 기술 상식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겐다 대위의 논문은 해군의 주류였던 포술, 수뢰과의 존재 의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반응도 매우 격한 것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심지어는 겐다의 아군이라고 볼 수 있는 항공과 진영에서도 반대가 나와 「 ........다 좋은데 겐다 군의 방안은 도대체 몇 년 후를 목표로 하고 있나. 오십년 후인가 아니면 백년 후인가?」 라는 의견에 더해....「 겐다 소좌 ( 1936년 11 월 진급)는 비행기만 타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거 아닌가? 」라고 비꼬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겐다 소좌는 판정관을 배석한 도상 연습을 제안하고 해군대학교에서는 초미의 관심 아래 실제 해대 학생들을 각군 지휘관과 참모로 삼은 도상 연습과 병기(兵棋)연습을 시행합니다.



그리고..........도상 및 병기연습 결과 해군 항공대가 올린 전과는 상정 이상의 훌륭한 것으로 도출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도상의 연습은 연습일 뿐이라는 반대파의 의견에 겐다 소좌는



「 도상 연습과 병기 연습의 심판 표준은 전투 기술의 성적을 기초로 제작 된 것이다. 이러한 연습의 성과를 전혀 도외시 한다면 무엇을 위해 매일 매일 전략을 연구하고 도상 연습 훈련을 하는 것인가? 」



.........등등의 주장을 가지고 고군 분투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반 항공주의자들의 논지는 역시 도상 연습에서 도출 된 결과인「 항공 격멸전은 상쇄의 결과」 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항공기는 향후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연습의 결과는 피아 항공부대는 대개 서로를 주로 공격하여 양자 모두 폐(斃)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따라서 최후의 결전은 남아 있는 양 군 수상 부대에 의해 좌우된다라는 논지로, 이것은 해군대학교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군령부와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품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도상 연습에서 미-일 양군의 항공부대는 서로 상쇄 전멸하였고 남은 수상 부대의 결전에서도 숫자가 결과를 보여주듯 일본 해군이 전멸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회를 관람하러 온 오니시 대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과연, 이번에도 항공부대는 미일 상쇄했다. 그러나 만약 일본이 작전에 투입 한 항공 병력의 두 배로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연습 각군 지휘관 및 참모, 그리고 참여 사관 제군들의 생각은? 」




이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한 사람은 없었다며 마무리.










아래글은 겐다 미노루가 본 오니시 다카지로




겐다 미노루의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에 대한 첫 인상은 「 오래, 천천히 걷는 사람이다 」 라고 합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가을, 일본우편의 기선 히타치마루는 일본을 출항해 페낭과 콜롬보를 거쳐 리버풀 항로를 따라 영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콜롬보 기항을 마지막으로 인도양 방면에서 자취를 감춘 히타치마루는 실종되었는데 이는 사실 독일의 통상파괴용 가장 순양함 SMS울프에 공격당해 격침 된 것이었습니다.


여하간, 격침 정보가 아직 확실하지 않았을 때 당시 인도양에 파견된 일본 해군 특무함대 사령부의 파일럿 오니시 다키지로 중위에게 상선 히타치마루 수색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아마도 당시 오니시 중위가 탑승했을 로식 갑형 수상기.


오니시 중위는 기선 지쿠젠마루에 수상기를 싣고 수색으로 향했고 파일럿인 오니시 중위가 직접 조종하는 로식 갑형 수상기는 수색 해면 인근에서 비행을 개시해 히타치마루에 대한 수색을 계속 하지만 엔진 트러블로 오니시기는 인도양의 이름 모를 무인 암초 부근에 불시착..아니 착수했습니다.

저속의 수상기였기 때문에 기체가 대파되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건 이 넓은 전시의 인도양에는 다른 배의 모습도 거의 안보이고(....) 문제는 불시 착수한 수상기 주위에는 벌써부터 닝겐(...)의 냄새를 맡은 사나운 상어 떼가 돌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오니시 중위는 얼마 뒤 지쿠젠마루에 의해 구출 되었지만 그 태연하게 기다리던 모습에 선원들이 감탄했다고 합니다 ㅋ 이 때의 유명한 사건에 대해 훗날 부하였던 겐다 미노루 당시 대위가「 대좌, 망망대해에서 불시착이라니 우리 수역도 아니고 구조가 안 오면........무서우셨죠 ? 」 라고 물었지만 오니시 대좌의 답은 「 아니,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뭐 어쩌겠어 그냥 기다리는거지. 」


예전부터 오니시 대좌라는 남자는 아주 배짱이 좋고 호방한 사람이라고는 듣고 있었지만, 과연 소문에 틀림이 없는 남자라고 겐다 대위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중일전쟁 개전 초반이던 1938년 1월, 막 진급한 겐다 소좌는 중국 대륙의 최전선에서 본토로 귀환해 요코스카 해군항공대 비행대장으로 보직받아 이를 축하해주고자 온 당시 해군 항공본부 교육부장이었던 오니시 다키지로 대좌와 요코스카의 요리집 '어승' 에서 오랜만에 대작을 했습니다.

이 날의 화제는 뭐니뭐니 해도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오니시 대좌 이야기였는데(...) 왜 전선에서 돌아온 겐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육부장인 오니시 이야기였냐면...


중일전쟁 초기의 작전, 그러니까 전년도인 37 년 8월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오니시 대좌는 전선 시찰을 위해 제주도로 전진 배치된 키사라즈 항공대를 방문했고 얼마 후 부대는 이리사 토시이에 대위(入佐俊家 / 해병 52기)를 지휘관으로 하는 해군 비장의 도약 폭격대에 의한 남경 공습에 투입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오니시 대좌는 이리사 대위가 지휘하는 남경 공습부대의 2번기에 직접 동승해 전투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지휘관인 이리사 대위는 당시 해군에서도 이름난 중공(쌍발폭격기) 파일럿이었고 제 15 해군항공대 비행대장 , 가스미가우라 해군항공대 비행대장 겸 강사, 가노야 해군항공대 비행대장을 연이어 역임한 이름난 지휘관이기도 했습니다.

해군이 호랑이 새끼처럼 키워 온 96식 육공대에 의한 남경 공습 직후, 귀로에 폭격부대는 중국공군의 커티스 호크 III 전투기에의 요격을 받게 됩니다. 고속의 96식 육공에 대해 절대의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 해군은 이 공습부대에 호위전투기를 붙이지 않았는데(...) 하여간 폭격기 한 대 한 대....연이어 격추되고 마지막에 남은 기체는 이리사 대위의 지휘관기와 오니시 대좌가 탑승한 2번기만 간신히 살아남아 겨우 호크 III를 뿌리치고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화를 이야기한 겐다 대위가 「 그런 순간이라면 과연 부장님이시라도 필시 기분이 나쁘셨겠죠;; 저는 당시 황포강을 구축함으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육지 쪽 대안에서 소총 사격을 받았습니다. 적탄 아래를 빠져 나간 첫 경험이었는데 솔찍히 옆구리가 쿡쿡 쑤시는 것 같이 무서운 기분이었어요. 」라고 말하자 오니시 대좌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겐다 임마, 너도 난처했겠지만 그래도 무서운 것을 느낄 여유가 있었잖냐. 그 때 나와 이리사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어 단지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라고 생각하게 되니 오히려 전혀 무서워지지 않더군 」


이것이 오니 대좌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겐다 소좌는


「 이 남자의 도량과 됨됨이는 나 따위가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겠어. 대단한 사람이다. 」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선진 몰라도 이 후에도 겐다 미노루는 종전까지 십년 이상 오니 중장과(...) 여러 모로 접촉하며 지도를 받았지만. 이 사람이 뭔가 두려운 표정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하죠. 심지어는 전쟁 중 어떠한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도 빠른 걸음으로 걷지 조차 않고, 당황하여 빠른 말로 안절부절하며 부하들에게 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고 마무리~






아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오니시 다카지로는 바로 그 카미카제 특별 공격대를 창시하여 공격을 명령하였고 종전후 할복자살한 인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