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배군, 2017 (원 출처인 이글루스는 폭파되었다...)
쇼와 13년(1938년) 1월, 제 2 연함항공대 작전참모로 활약하고 중국 전선에서 귀환한 겐다 미노루 소좌는 곧바로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의 비행대장으로 착임하는데 전투기, 공격기를 총 지휘하는 비행대장 외에도 겸 항공 전술교관을 겸임합니다. 그리하여 바빠진(...) 겐다 소좌는 해군대학교 학생 시절부터 주창한 "전함 무용론 및 항공주병주의" 의 이론을 실제 체험한 중일전쟁에서의 경험을 더해 가다듬었습니다.
이미 이 시대 쯤이면 실적 충만하고 윗선에서도 귀여움 받는(...) 겐다는 항공 뿐만 아니라 해군의 떠오르는 별.....자신이 비행대장으로 있는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의 항공전술 교관도 겸직했지만 얼마 안 가 해군 포술학교, 수뢰 학교 등 해군 내의 각종 실시학교의 강사로도 초빙되게 됩니다.
하지만, 당연히 전함 무용론을 주창하는 겐다가 수상 함정 탑재 병기의 고등 실시학교인 포술/수뢰학교와 잘 맞을 리가 없죠-_-;;;
이들 학교에서의 강의는 필연적으로 겐다 소좌 자신의 항공 위주의 용병 사상을 전개 한 덕분에(...) 이에 반대하는 강사와도 논쟁, 학생들과도 대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렇게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같은 해인 1938년 1 월 17 일, 차기 제식 전투기인 "해군 12시 함상전투기 계획 요구서에 대한 민관 합동 연구회" 가 요코스카시 옷파마(追浜)에 있던 해군 항공기술창(*이하 공기창) 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참석 멤버는 해군 항공본부에서는 기술부장 와다 미사오(和田 操) 소장 이하의 관계자들이, 공기창 측에서는 공기창장 마에하라 켄지(前原謙治) 중장 이하의 관계자. 그리고 시작기 제작에 참여할 미쓰비시, 나카지마 양 회사의 기술자 포함 총 30여명 이상의 많은 인원으로 해군항공대 전투기 파일럿을 대표해서는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비행대장 겐다 미노루 소좌, 해군 항공기술창 비행 실험부 육상반장 겸 전투기 주무 시바타 타케오 소좌가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연구회의 주역은 뭐니뭐니해도 제 2 연합항공대 참모로 중국 전선에서 활약하고 며칠 전에 귀국한 겐다 미노루 소좌였습니다.
겐다 소령은 아직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생생한 실전의 경험(....이라고는 해도 겐다는 항공작전 참모로 그 자신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및 참모로써 해군 전체의 항공 작전을 지도하였던 사례 및 그 반성점에 대해 열정적으로 웅변,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훈에서 향후 새로운 전투기에 대한 요구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안건 임을 강조하였는데 문제는 이에 근거하다 보니 그 요구 성능은 더더욱 올라가 버려 해군이 (항상)요구하던 전투기에 대한 작전요구 성능 완화에 일말의(...) 희망의 빛을 품고 있었던 민간 회사 측 기술자들을 더욱 우울하게 했습니다(...)
바로 두달 전인 1937년 12월 1일 항모 카가 비행대장에서 공기창 기술 실험부로 부임했던 역시 같은 실전 경험자 시바타 소좌도 이 연구회에 참가하고는 있었지만, 첫 연구회는 겐다 소좌의 화려한 웅변에 이끌려 대부분 겐다 의견에 동조하는 양상으로 변해 갑니다.
시바타 소좌는 이 일을 씁쓸해하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 해군이 신예기에 요구한 성능은 언제나 높았지만, 실제 시작기나 양산기가 그 성능을 넘었던 적은 없다. 결국 작전 요구성능이란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부터 적응해야지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이것도 저것도 해달라는 강요는 결코 실제적이 아니다"
공기창 비행실험부 시바타 타케오 소좌
" 겐다 소좌는 속력-항속력-마력과 함께....... 아니 그 이상으로 공중전 성능의 본질적 향상을 자꾸만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 일본의 전투기 특성에서 보면 이제 공중전 성능은 특히 강조하지 않아도 문제는 없다. 오히려 문제란 적기를 만나 그것을 포착 하는데 필요한 항속력과 속력......... 특히 항속력에 있는 것이 아닐까? "
허나, 시바타는 이 날 공개적인 자리에서 반박은 하지 않았습니다. 각론은 다르지만 모처럼 겐다 소좌에 의해 만들어진 해군 신예 전투기의 필요성에 대한 총론 제기에는 그 자신도 충분히 동감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도 좀 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938년 4월 13 일, 같은 공기창 회의실에서 열린 2차 회의는 '12시 함상전투기 계획 설명 심의회' 로 개최되었습니다. 참석자는 전 회와 거의 같았지만 경쟁 2개사 중 나카지마 비행기가 엔진을 제외하고는 시작 제작 계획에서 사퇴했기 때문에 민간 참석자들은 미쓰비시의 네 명으로 줄었고, 나카지마의 사퇴에 의해 심의는 미쓰비시가 제시한 안으로 압축되게 됩니다.
회의는 전투기의 미쓰비시 측 설계 주무인 호리코시 지로 기사 의 설계 내용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여 각종 질의 응답으로 넘어갔고, 이 질의 응답이 일단락 된 후 심의회는 종료.............되는 분위기였으나 그때! 갑자기 호리코시 기사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호리코시 지로 기사와 12시함상전투기 설계팀 동료들. 좌측 둘은 사진이 짤렷;;;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군이 계획 요구서에 요청한 고속-격투성능-항속력 모두를 균일하게 채우는 것은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곤란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의 순서에 대해 해군 측 관계자 여러분 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시바타 소좌의 바로 맞은 편 자리에 있던 호리코시 기사가 용기있게 한 발언은 그 자체로 기술자들의 고뇌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호리코시 기사의 질문에 가장 먼저 답변한 해군측 인물 역시 겐다 미노루 소좌였습니다. 겐다 소좌는 전과 마찬가지로 중국 대륙에서의 실전 양상과 그것을 기반한 전훈을 강하게 강조, 좌중의 관심을 충분히 끈 후(...) 결론을 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투기. 특히나 단좌-단발 전투기에 있어서는 적 전투기보다 뛰어난 공중전 성능을 최우선으로 요구합니다. 따라서 속력과 항속력이 다소 줄어든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겐다 소좌의 의견에 요코스카 항공대는 물론 항공본부, 기술창 측 위원을 비롯해 대부분의 참석자가 동조하는 분위기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의 있음! " 이라는 소리와 함께 일어선 이가 바로 공기창 기술 실험부 시바타 타케오 소좌였습니다. 시바타 소좌는 다음과 같이 겐다 소좌의 의견에 대한 반론을 말했습니다.
" 겐다 군은 공중전 성능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도 일본의 전투기 격투 성능은 외국 전투기에 비해 충분하게 강한 정도라 굳이 그것을 또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 그런데도 공중전 성능을 강요하면, 호리코시 기사가 말한 대로 이번 계획에 포함 된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
" 전훈에서도 알 수 있듯 적 전투기에 의한 우리 공격기의 피해는 예상보다 컷습니다. 이를 엄호하기 위해 일부가 주장하는 쌍발 복좌 또는 다좌 전투기는 항속 성능에 대한 요구는 충족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공중전 성능으로는 적 단좌 전투기에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단좌-단발 전투기가 옳습니다. "
" 따라서, 본 시작기에 대해 항속력은 절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속도로 도망가는 적기를 붙잡아 어떻게든 격투전으로 반입 시키려면 1 노트라도 빠른 것이 좋기에 속도도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
" 아무리 기량 발군, 공격 정신이 왕성한 조종사라고 해도 그 비행기에 주어진 성능 이상을 짜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속도와 항속력 특히 항속력을 우선으로 하고, 기체의 공중전 성능은 탑승원의 훈련을 통해 열세를 커버 할 수 있을 정도로 진행하면 됩니다 "
이러한 시바타 소좌의 말은 당연히 겐다 소좌의 주장과는 정 반대에 있는 것이라 이번에는 겐다 소좌가 다소 흥분한 기색으로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반론했습니다.
" 지금 시바타 군의 발언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속도와 항속력을 중시한 나머지 전투기 본연의 임무인 공중전 성능을 저하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항공대장으로서도 절대로 승복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
" 시바타 군은 항모 비행대의 실전 경험으로 (모함 항공대의)함폭/함공대 직접 공격시의 피해를 지나치게 염두에 두고 말하는데. 그러한(항속거리 및 공격대 직엄부대의)것은 작전의 문제(*)입니다. "
(* 주 : 당시 제 2 연합항공대의 항공작전 참모였던 겐다는 초기 항모 공격대가 직엄 없이 대피해를 내자 점령지 내륙에 설영대를 투입해 긴급 활주로 가설을 하고 재빨리 전투기 부대를 배치함. 이 후 제공권 장악이 먼저라는 항공격멸전 개념으로 중계기지에서 출격한 전투기대가 적 전투기대를 구축하거나 공격대를 엄호하는 등으로 운용 )
" 전투기의 이야기로만 한정하자면 다른 사례로 우리의 95식 수정은 하상함대를 내습한 적 호크 3형(*)을 압도, 이를 격추하였습니다. 이처럼 항공작전의 다양한 사례에서 관측되는 전훈은, 결국 전투기의 본질이란 일 대 일 격투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성능입니다."
(* 주 : 호크 3형 - 커티스 BF2C 고스호크 함상 전투기로 미 해군 제식 함상 전투기 중국에는 커티스 호크 III라는 이름으로 수출.)
(*주 : 당시 일본 해군의 95식 수정은 중국공군의 호크 III에 최대 속도서 35노트 이상 열세, 항속거리도 짧았고 결정적으로 플로트까지 단 수상기(...) 라는 물건이었는데 하상함대 방공전에서 발군의 대활약으로 중국군 전투기대 외 폭격부대도 저지해버림;;;)
소좌 시절의 겐다
사진은 1938년 11월 주영 일본대사관 주재 해군무관으로 파견 직전 찍은 것으로 추정
겐다는 의외로 이때부터 40년 9월까지 런던에 장기 체류합니다. 이 시기 BOB의 현장에 있었던 점은 흔히 간과되고 있죠(...)
..........라며 겐다 소령은 특유의 지론을 확장하여 마무리했고. 마지막엔 의자가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 될 정도의 기세로(...) 쿵! 하면 좌석에 앉았지요. 이러한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모든 참석자는 논쟁의 장래를 지켜보게 되는데....
그러자 다시 시바타 소좌가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나도 공중전 성능이 약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전투기들은 지금도 외국기에 비해 공중전 성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 줄이고, 강한 정도에 그치고 그 만큼을 속도와 항속력 향상에 돌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시바타 소좌에 발언 대해 겐다 소좌는 재빨리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응수합니다;;;;
" 아군기의 공중전 성능이 너무 강하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강한 정도에 그친다는 둥의 발언은 매우 애매한 표현입니다. 시바타, 귀관은 무엇을 가지고 그 판단의 기준을 잡은 것인가 "
" 나 또한 속도와 항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것을 포함한 모든 균형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은 역시 공중전 성능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요코스카 항공대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
여기서 개인적 사담인데, 저도 처음에는 시바타 소좌의 주장이 더 올바른 방향성이 아니었는가.......라고 생각했었지만 이 중요한 논쟁에 대해 복수의 서적으로 접해 본 뒤에는 누가 더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누군가가 의사 결정권을 가진 상급자가 월등히 높은 관점에서 판단을 내려 줄 수밖에 없지만, 겐다 소좌나 시바타 소좌 모두 당시 전투기에 관해서는 가장 전문가였고 게다가 개성도 자신감도 넘치는 두 사람을 설득 할 수 있는 전투기 조종의 선배가 항공과, 아니 해군 사관 중에는 없었습니다(...)
원래 이 겐다 소좌와 시바타 소좌 간의 논쟁은, 지난 1월 17 일의 첫 민관 합동연구회 종료 직후 나란히 걷고 있었던 겐다와 시바타 사이에서 나온 이야기였는데........... 둘 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다 보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그 날의 연구회 이야기에서 전투기의 공중전 성능 관련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대화였으나... 겐다 소좌가 "공중전 성능을 향상시키려면 기체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익면하중을 조금이라도 작게 해야 한다" 고 말하자 시바타 소좌는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반드시 익면하중 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다른 요소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있다" 고 반론하면서 대화의 주제는 점차 확대되고....게다가 감정적이 되어 갔습니다.
" 이 봐 시바, 너의 논리라면 같은 비행기로 대전한다면 내가 네놈보다 무게가 가벼우니까 공중전에 더 강하다는 이야기가 되잖아"
" 무슨 소리냐 겐, 그 정도의 무게 차이라면 실전을 경험한 내가 이길 수 있다. 언제라도. "
" 항공전은 강습전, 요격전, 방공전 등 여러 경우가 생긴다. 너는 지나치게 (자신이 경험 한 실전에만 근거하여)근시안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투기와 전투기가 맟붙었을 때 종국적으로는 격투 성능의 우위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
여담인데 뭐 사진들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 겐다는 시바타보다 십킬로 이상 체중이 가벼웠다죠(...)
여튼 소좌라곤 하여도 둘 다 아직 나이 서른을 조금 넘긴 혈기 왕성한 청년들.... 이때의 논쟁이 4월 13일의 심의회까지 꼬리를 이어 치열한 논쟁의 전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에필로그
1938년 3월 상순, 겐다 소좌는 모교인 에다지마의 해군병학교를 방문해 중국 중부의 항공전의 이야기를 전교생에 강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겐다 소좌 전선의 항공 부대의 장병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지를 말했습니다
" 항공대는 위로부터는 사령관 아래는 일개 정비병까지 항공작전의 추이가 전국 전반을 지배하는 가장 큰 요소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임무 수행에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이 전 항공부대에 일관되게 흐르고, 또한 철저히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해군 항공부대는 대전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
그런데, 이 말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당시 해군병학교 교두(부교감) 가쿠다 가쿠지 대좌는 이어 다음과 같이 훈시했습니다.
" 지금의 이야기는 너희들 학생의 평생을 통해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유념하지만 우리 해군은 비행기가 없어도 전투한다. 항공부대의 협력은 바람직 하지만 그에 대해 의존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물론 당시 이러한 사상은 해군의 주류인 포술과와 수뢰과 등에서 상당한 뿌리 깊게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에 겐다 미노루는 전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항공부대의 협력이 단순히 있으면 바람직하다 - 라고 원하는 정도 자체가 문제였다. 고급 지휘관들이 제공권 획득 자체를 전투의 승패에 부차적인 요소라고 생각 한 결과는 태평양 전쟁의 경과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가쿠다 제독은 훗날 제 1 항공함대 사령관으로 마리아나 열도 공방전에 임하여 티니안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사람이다. 해군의 무인으로는 가장 존경받는 성격을 가지신 분으로 견적필전(見敵必戦) 마치 넬슨과도 같은 투장이셨다. 그 무인다운 최후 또한 훌륭하신 모습으로, 해군의 많은 투장 중에서도 야마구치 다몽 중장과 오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에 필적할 만한 공격 정신의 소유자셨다. 이러한 사람들이 좀 더 빨리 해군의 전략 전술에서 차지하고 계셨던 자신들의 위치를 인식하여 군비의 수정에 대해 노력하고 있었다면, 전쟁은 조금 다른 경과로 진행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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