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독재자' 후지모리 페루 전 대통령 사망
후지모리는 대통령이자 페루 내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수감자였다. 그는 형을 집행받고 사면받고 다시 징역을 살게되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비양심적이고 부패했으며 인기있는 라틴 아메리카에선 전혀 새로운 종류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국적부터 기묘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페루와 일본이라는 두개의 출생지를 갖고 있었다. 그가 페루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대통령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페루 여권 상으로 그는 1938년 리마에서 일본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97년 한 저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가 후지모리를 출생신고에서 출생지를 일본으로 기입했다고 한다.
그가 2000년에 일본으로 피신하고 페루 지도자자리에서 물러날 때 이를 근거로 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페루인들이 '엘 치노 (중국인)'이라고 불렀던 이의 지배기간은 10년이었다. 그의 부패와 비밀 정보 기관 책임자 발라디미로 몬테시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진 가운데 그는 연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거에서 3번 째 집권에 성공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드림
그의 몰락처럼 후지모리의 국가 지도자로의 출세 과정 또한 큰 이목을 이끌었다. 소수 민족 출신의 목화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서의 그에겐 출세의 길은 좁았다. 그러나 알베르토 후지모토는 대학입학에 성공하고 상당한 학술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는 농업 기술, 수학과 물리를 페루, 프랑스,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결국엔 학장과 페루 대학 총장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다.
1980년대 말 그는 정치무대에 섰다. 아웃사이더로서 그는 Camnio 90 정당에서 입후보를 하였고 널리 펴져있던 기득권 정치계층에 대한 좌절 덕택에 우파 자유주의 후보인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요사와 결선투표를 치르게 되었다.
후지모토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카리스마 보단 좌파가 바르가스요사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품있는 강연대의 교수는 남성미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남미의 카우디요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민주독재자로의 길
하지만 그의 활력 넘치는 태도와 짦고 간결한 문장들은 낮은 출신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의 모토 "정직함, 기술력, 노동"에서도 효과를 보았는데 성실한 신생 부자들이 말할 법한 매우 그럴싸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리마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를 실시하고 1992년 국민들 눈에 죄다 부패해보였던 의회를 해산시켰을 때 대다수가 그를 지지하였다.
1993년 그는 새로운 헌법으로 양당제에서 새로 선출된 그의 당원이 대다수인 일당제로 대체시켰다. 이런 '자발적 쿠데타'로 후지모리를 '민주독재자'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그것이 그를 몇년 뒤 그를 감옥으로 보내게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일플레이션과 테러리즘에서의 승리
페루 정치개혁과 함께 후지모리는 경제와 내전이라는 두가지 주된 문제에 착수하였다. 1990년대 페루는 심각한 경제문제, 하이퍼 인플레로 인한 국채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화폐개혁과 신자유주의적인 과감한 경제개혁인 '후지쇼크'로 그는 인플레를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놓았고 페루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기간을 보내게 하였다.
그는 1960년대 부터 활동한 마오주의 게릴라 그룹 'Sendero Luminoso'와 테러단체 'Tupac Amaru'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후지모리 하에서 군은 전략을 수정하였다. 혐력자로 의심되는 사람과 협력자를 학살하는 대신 그러한 보복은 대부분 반군에게 맡기고 테러리스트에 대한 보다 표적화된 공격을 하였다.
고통받는 농촌주민들 경우엔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끊기 위해 신뢰를 얻어내었다. 사면법으로 후지모리는 1997년 결국 두개의 테러단체를 무장해제 시키고 해산시키는데에 성공하였다.
도피 그리고 귀환
그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여전히 후지모리를 오늘날까지도 지지한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살인부대, 부패, 친인척의 경제적 특권, 인디오 여성들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초법적인 총살이라는 후지모리의 어두운 면은 눈감아 주고 있다. 2001년에 출범한 진상규명 위원회 덕분에 이 모든 것들이 기록되었다.
헌법상 2번만 연임이 가능함에도 그는 2000년 세번째 연임을 하였다. 그의 가장 논란이 되었던 세번째 재선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 위로 떠다니던 그의 부패혐의들이 명확해졌다. 비밀정보기관에서 어떻게 야당 의원들을 매수했는지 보여주는 후지모리의 오른 팔 몬테시노의 비디오들이 공개되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그의 조상들의 나라로의 도피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이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페루의 이웃국가 칠레에서 그의 정당의 2006년 선거전을 이끌려고 했으며 심지어 스스로 입후보를 할 생각도 하게되었다. 그러나 칠레는 페루 법원의 지명수배에 응하였고 후지모리를 구속하고 2007년 페루로 보냈다.
50년 이상의 징역형 선고
재판 시작 다음 날 법원은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불법 가택 수색으로 징역 6년을 선고하였다. 계속해서 판사는 그에게 주거 침입, 뇌물수수, 횡령, 처벌 방해시도, 인권유린 혐의도 이야기 하였다. 모두 합쳐서 징역 50년 이상을 선고하였지만 이는 결국 25년 형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69세의 후지모리의 건강상태는 이미 나빠져있었다. 몇년간 후지모리는 자신의 건강상의 이유로 가택연금으로 형을 살게 해달라는 무의미한 싸움을 하였다. 2012년 한 여론조사에선 59퍼센트가 후지모리의 사면에 찬성하였다.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한번 더 대통령을 하길 원한다.
2017년 후지모리는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게 된다. 그의 사면은 여론을 갈라놓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지모리의 딸 케이코가 이끌고 있는 후지모리의 정당과 쿠친스키와의 정치적 딜로 성사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8년 사면 취소 때도 엄청난 논란이 되었다. 후지모리는 리마의 외곽 바르바딜로에 교도소로 다시 돌아가야했다.
그 결과과 케이코와 그녀의 형제 켄지 후지모리는 국회에서 80세 이상의 죄수는 더 일찍 출소 시키도록 하는 법 재정을 추진하였다. 2023년 12월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결국 페루 헌재의 명령으로 85세의 나이에 출소하게 되었다. 7개월 뒤 케이코 후지모리는 그녀의 아버지가 2026년 다시 한번 대통령에 입후보를 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2024년 9월 12일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암 투병 후에 아버지는 하느님을 뵙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그의 딸 케이코 후지모리가 X의 게시글로 알렸다.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그는 페루에 살인과 학살이 아닌 부와 평화를 가져다 줬다는 것이다.
https://www.dw.com/de/der-demokrator-perus-ex-pr%C3%A4sident-fujimori-ist-tot/a-70195144
DerEr war Präsident und Perus prominentester Häftling. Er wurde verurteilt, begnadigt und wieder inhaftiert. Alberto Fujimori war skrupellos, korrupt und beliebt - und doch ein ganz untypischer Politiker für Lateinamerika.www.dw.comhttps://www.dw.com/de/der-demokrator-perus-ex-pr%C3%A4sident-fujimori-ist-tot/a-70195144
저 양반은 일본으로 런 잘 했으면 걍 거기서 살 것이지 뭐하러 페루로 또 기어들어와가지고
그래도 나름 정치 ㅅㅌㅊ로 해서 페루 국내에 지지자들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지지기반 믿고 도박해본 거겠지
권력욕이란...
ㄹㅇ암투병 하는 와중에도 대통령 재선을 하겠다고 하면서 결국 2026년은 커녕 출소한지 일년도 안되서 죽음. 권력욕에 눈이 먼 건 맞는 듯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정치란 건 마약과 같다'며 한탄한 것과 겹쳐보이네
이야 저 양반 죽었구나 너무 예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