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갤에 써둔 글인데, 혹시 관심 있는 사람 있을까봐 복붙해 옴. 파란 글씨는 요약이고, 그 밑에 상세한 내용 있음.

- 2월 혁명 시기의 러시아군은 05년 혁명 때처럼 시위 진압을 싫어함. 그래서 2월 25일까지는 온건 진압했는데 25일 밤에 황제가 즉시 진압을 요구해 26일부터 총성이 폭발함. 이 명령에 분노한 병사들이 26일 밤에 혁명을 결의하고 27일에 일부 부대가 혁명에 참가.

- 의외로 러시아군은 군의 정치화를 어떻게든 막으려 함. 이유는 다민족 - 다문화 - 유사 신분제 국가여서 자칫 잘못하다간 군이 수백 조각으로 쪼개질 수 있어서. 그래서 2월 혁명 이후부터 이뤄진 군의 정치화는 군의 분열을 가속화함. 장교들은 정말 다양한 파벌로 나뉘었음.

- 2월 혁명으로 극심한 충격과 혼란을 겪었지만, 장교들은 정치 중립을 지켜 임시 정부에 순명하고 명령을 따름. 심지어 일부는 소비에트와도 협력함.

- 그렇지만, 명령 1호로 대표되는 병사 권리 증진 및 사형제 폐지 조치에는 격렬하게 반대함. 그래서 군과 임시 정부 간의 갈등이 대폭 심화됨. 결국에는 대다수 장교들이 대세를 따르기로 마음 먹어서 명령 1호가 관철되지만, 불만은 누적됨.

- 군의 민주화를 놓고 러시아군은 보수 · 진보로 나뉘어 분열함. 놀랍게도 일부 고위 장성들 중에도 민주화 지지자가 존재함. '보수파'에 해당하는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다수 부대가 중립을 지켰음. 진보파들은 쿠데타 진압을 시도하고 쿠데타 가담자들을 처벌해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려고 함.

- 1917년 6월 케렌스키 공세를 준비할 때는 장교, 병사, 노동자들이 모두 불만을 참고 공세를 준비함. 어떻게든 러시아가 전쟁에서 져서는 안된다는 게 이들 모두가 공감하던 대의. 그러나, 공세가 실패하고 나서부터 장교단의 우경화, 정치화가 심화되고 병사,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함.

- 우경화된 장교단은 장교의 권위 회복, 사형제 재시행을 요구했고 이에 케렌스키가 굴복해 사형제가 재시행되고 장교의 권위가 강화됨. 이렇게 되니까 또, 병사들이 좌경화함.

- 2월 혁명 이후에 수립된 병사 위원회는 100만 이상의 탈영병과 정신나간 군 기강 해이를 야기한 집단. 그러나, 전쟁 기간 내내 만성적인 보급 부족, DP, 해병 문학 체험을 겪으면서 버틴 러시아 군인들의 울분이 터진 게 병사 위원회의 수립. 그래서 마냥 병사 위원회를 비난하기는 뭣함. 꼬우면, 장교들이 제대로 지휘해서 전쟁 이겼어야지, 왜 병사들을 탓함?

- 소비에트, 좌1파 정당과 접촉하던 장교들도 노동자 무장 혁명 운운하고, 혁명적 패배주의 어쩌고 하는 볼셰비키만은 안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장교단의 볼셰비키 비토론은 대단히 심했다.

- 러시아 장교단이 그런 볼셰비키보다 더 증오하던 자가 바로 케렌스키. 절망적인 수준의 인성과 헛짓, 장교단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인해 장교단 전체의 증오를 받았다. 이 와중에 멱살 잡고 어떻게든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와 코르닐로프의 군부가 서로 협력하게 만들려고 노력한 자가 바로 러시아 공화국 국방부 차관보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 그런데, 결국 양자는 충돌해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일어났다.

- 의외로 러시아 장교단은 10월 혁명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레닌이 얼마 못 갈거라 생각했다. 케렌스키가 쫓겨났다고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다. 장교단은 제헌 의회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결국 볼셰비키가 완전히 권력을 잡자 저항하기 시작했다. 참모총장이었던 알렉세예프가 러시아 남부로 비밀리에 이동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데니킨과 코르닐로프가 탈옥했다.

- 그런데, 체코 슬로바키아 군단이 봉기하기 전까지 반볼셰비키 장교들은 그 숫자가 적고 산발적으로 봉기하는 수준이었고 1918년 2월까지 볼셰비키 정권은 차근차근히 군을 장악해 나갔다. 3월, 체코 슬로바키아 군단이 봉기하자,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 내전이 터졌다.

- 전체 러시아군 장교 25만 명 중에서 40%가 백군, 30% 이상이 전역 또는 망명, 약 7만 5천명이 적군에 복무했다.


1. 2월 혁명기의 러시아군

1) 시위대 진압 문제와 병사 봉기

- 05년 혁명 시기와 마찬가지로 수도에 주둔 중이던 병력들은 시위대 진압에 큰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2월 23 ~ 25일까지는 진압군들이 강압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는 편이었다. 명령을 받았음에도 시위대와의 충돌을 꺼렸고, 현장 지휘관들도 빵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굶주리던 병사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시위 진압을 위해 나온 어떤 카자키 지휘관이 어느 소녀가 건내 준 꽃송이를 받아들어 제복 주머니에 꽂을 정도로 러시아의 "국민군"들은 "국민"들에게 위해를 가하고 싶지 않았다.


- 25일 밤, 황제가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하바로프에게 수도의 혼란을 즉각 끝낼 것을 요구했고, 하바로프는 다시 지휘관들에게 3번 경고하고 사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26일부터 부대의 고위 장교들이 사격을 강요해 시위대에 총격이 가해졌고 사격을 하지 않은 병사들에 대한 처벌 또한 이뤄졌다. 이로 인해 다수 부대의 사기가 하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블롭스키 4중대의 일부 병력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경찰들을 보고 격앙되어 경찰들을 상대로 사격을 가했다.


- 솔직히 눈 앞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쏘지 말라고 울부짖는 판인데 간부들이 쏘라고 윽박지르고, 못 쏘니까 간부가 쌍욕 박으면서 죽빵 쳐날리고 사격 못하는 병사 총 뺏어서 시위대에 조준 사격하는 꼬라지 보면 현대인들 보기에도 프레깅 마려웠을 것이다.


- 강경 진압으로 전환한 26일 밤부터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에 속한 대다수 부대의 병사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군의 허리인 부사관들까지 일부가 모여 사격 명령과 진압 대열 편성 명령에 거부할 것을 결의했다.


- 27일, 볼린스키 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반군이 26일에 사격을 지시하고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병사와 부사관들을 처벌한 라쉬케비치 대위에게 사격을 가했다. 놈은 겁쟁이처럼 도망치다 개처럼 죽었다.


-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에서 총 5개 부대만 반란에 가담했기에 충성파 군대로 충분히 진압이 가능했지만, 무기와 탄약이 부족했다. 게다가 각 부대의 장교들 중 일부가 근무지 이탈을 하기 시작했다.


- 충성파 군대가 머뭇거리는 사이, 5개 혁명군 부대는 시위대와 합류해 주요 관공서와 중요 시설을 점거하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2) 소비에트의 명령 1호

- 28일 밤, 일부 부대의 지지를 받아 기반이 생긴 두마의 로잔코는 병사들의 원대 복귀, 탈취 무기 반납, 장교의 부대 복귀, 군기 확립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두마에 요구했다. 이는 사태 진정을 위한 조치였으나, 병사들에게는 "복귀 - 무기 반납 - 체포 후 총살"이라는 시나리오로 보였다. 로잔코가 "반란"에 가담한 병사들을 체포해 죽일 거란 괴소문이 돌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다수의 병사들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회의를 장악하고 문서를 작성했다.


- 이 문서의 핵심은 병사 위원회의 구성이었으며 병사 위원회가 부대의 정치적 활동 및 병사의 시민권 보장, 병사 처우 개선을 요구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장교들의 급습을 막기 위해 부대의 무기 통제권도 장악했다.


2. 장교단의 정치적 분열

1) 정치화를 꺼린 러시아 군부

- 러시아군은 군의 정치화를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현대인들조차 서로를 MBTI로 구분지어 인격 모독적인 폭언을 퍼붓는데 다민족 - 다문화 - 유사 신분제 국가인 러시아에서 군의 정치화가 이뤄지는 순간, 러시아의 군인들은 수백 개 집단으로 쪼개질 게 뻔했다.


2) 분열 양상(왕당파 - 공화파. 두마 지지 - 소비에트 지지. 귀족군 - 국민군. 우파 정당 - 좌1파 정당)

(1) 왕당파 - 공화파

- 왕당파 지지 장성 : 데니킨, 브랑겔, 아킨티옙스키, 드로즈돕스키 등. 이들은 대놓고 제정 붕괴에 부정적 감정을 드러냈다.

★ 그러나, 데니킨과 브랑겔은 기회주의자여서 언제든 자기 입장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이었다. 아킨티옙스키, 드로즈돕스키는 왕당파 광신도에 가까운 편. 아킨티옙스키는 아예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해 두마와 소비에트를 엎으려 했다. 병력도, 물자도 없어서 포기했지만.


- 공화파 지지 장성? : 알렉세예프, 엥겔가르트.

스타브카에서 러시아군 전체를 책임지던 참모총장 알렉세예프는 원래는 혁명을 진압하려 했지만, 상황을 보고 조졌음을 알아채고 로쟌코의 차르 퇴위 계획에 동의했다. 그는 혁명기 내내 러시아 군부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 대다수의 러시아군 장성 :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어쨌건 페트로그라드에 순명.


- 대다수 장교 : 장교의 권위가 차르와 제정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왕당파가 아니더라도 제정 붕괴에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었다. 자유주의적인 장교들까지도 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혁명이 과격하게 변질될 것을 우려했다.


(2) 두마 - 소비에트

- 임시 정부 - 소비에트 이중 권력 체제에서 정치 성향과는 별도로 소비에트와 협력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 일부 장교들은 소비에트를, 일부는 두마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중립을 지켰다. 두마 지지파 중 일부는 2월 말에 두마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 임시 정부가 출범한 뒤, 다수의 장교들이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장교 대표단에 모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개혁을 요구했다.


(3) 귀족군과 국민군

- 차르가 퇴위한 뒤, 사상적으로 자기 자신을 국가나 차르의 현신이라 생각하며 귀족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귀족 군인들은 제정 붕괴와 임시 정부 출범을 두려워했지만, 자신들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민의 군대로 인식하는 이들은 유사 신분제 정권인 제정이 붕괴했으니 자기 실력으로 무능한 귀족 장교들을 제끼고 영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들에게 혁명은 일종의 기회였다.


(4) 우파 정당 - 좌1파 정당

- 대다수 장교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러시아군의 두뇌인 참모 아카데미 출신 장교들도 고위 장교들은 10월당과 입헌민주당 같은 우파 정당들을 지지했다. 이들은 "임시 정부를 지지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참군인"이란 이미지를 만들어 우파 정치인들의 호감을 사려 했다. 이는 확실히 정치인들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였다.


- 일부 참모 아카데미 출신 장교, 참모 본부의 일부 장교들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주장에 공감했다. 여기서 몇몇은 아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행동을 같이했다. 이 시기의 사회혁명당은 우파들이 나름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멘셰비키도 다수의 좌1파들이 귀국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장교들 입장에서 좌1파 정당 내부의 우파들이 내세운 "방어주의" 노선은 공감할 수 있는 요소였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배해서는 안된다는 방어주의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논리였던 것이다.


- 러시아군 내부의 개혁파인 청년 투르크당은 사회주의 세력과 접촉하고 소비에트와도 협력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극좌 정당(사회혁명당 좌1파), 노동자들의 무장 혁명을 주장하는 볼셰비키는 너무 위험하다고 기피했다.


- 소수 장교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공화주의 장교 연합"을 결성했다.


(5) 혁명을 바라보는 장교들의 입장

- 혁명 초기에는 모두 충격과 공포, 혼란과 참담함을 느꼈지만, 점차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차르 퇴위와 제정 해체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기에 저항할만한 명분이 없었고, 군부의 수장인 알렉세예프가 차르 퇴위를 주도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임시 정부가 차르를 대체해 장교들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기반이 되어 주었기에 현실적으로도 임시 정부는 필요한 존재였다.


- 다수의 장교들은 혁명으로 전쟁 수행력이 개선되고 임시 정부가 제정보다 일을 더 잘 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으며 장교 - 병사 - 노동자의 연대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임시 정부가 군의 기강과 질서를 회복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대중과 병사들을 설득시켜줄 거라 생각해서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거나 설득할 때, 임시 정부의 권위에 호소하곤 했다.


- 장교들을 골수 차르 지지 세력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거의 3년 동안의 패전에 지친 러시아의 장교단에게 차르정은 대체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1917년 2월의 러시아 장교들은 굳이 차르정을 전복할 필요를 못 느꼈고 정권에 충성했지만, 새로운 정권이 차르정보다 더 낫고, 전쟁 수행을 더 잘한다면 그들에게 충성할 수도 있었다.


3. 혁명 직후, 임시 정부에서 내린 명령 1호에 대한 장교들의 입장

- 거의 대부분의 장교들이 장교들의 권한을 위축시키면서 병사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사형제까지 폐지한 임시 정부의 명령 1호와 병사 권리 선언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 명령 1호와 더불어 고위 장교 150명을 짜른다는 명령을 내렸기에 장교들의 반응은 더욱 나빠졌다. 명령 1호, 병사 권리 선언을 발표한 구치코프와 이를 용인한 케렌스키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나빠졌다.


1) 병사 위원회와 명령 1호에 대한 입장

(1) 적대파

- 데니킨, 브랑겔, 구르코 등 보수파와 대다수의 러시아군 장교


(2) 타협파

- 알렉세예프 : 명령 1호에 극도로 부정적이어서 장성들을 모아 병사 권리 선언을 거부하자는 결의를 할 정도였지만, 임시 정부와의 관계가 파탄나는 것을 막기 위해 병사 위원회에 장교들을 파견한다거나 임시 정부의 대표를 스타브카에 보내달라고 한다던가 하는 조치를 취했다.


(3) 통제 성공 + 협력파

- 브루실로프 : 차르 퇴위 이후에 두마 의장 로쟌코와 사이가 틀어진 알렉세예프가 로잔코 제낄려고 사령관들 소집해 지지 확보하려 할 때, "전선 사령관이 전선 비우게 되어 있나?" 면서 알렉세예프의 요구를 거부한 참군인. 물론, 다수의 장성과 전선 사령관들이 알렉세예프의 요청을 냉담하게 대하긴 했지만, 러시아군 최고의 전공을 세운 브루실로프의 전언은 꽤나 무게감 있는 것이었다. 그는 병사 위원회를 통제하는데 성공했으며, 그러면서도 병사 위원회의 요구 사항들을 적극 수용하여 사병들의 협조와 충성심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사형제 폐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4) 제압파

- 코르닐로프 : 병사 위원회를 극도로 혐오했고, 기회를 보아 병사 위원회를 거의 제압해 사기 진작용으로만 써먹었다.


(5) 군 민주화 지지파

- 스타브카의 군수 담당 루콤스키 등 소수의 장교. 브루실로프도 어느 정도는 군 민주화 지지파로 볼 수 있다.


(6) 대다수의 러시아군 장교들이 보여준 태도

- 병사 위원회와 명령 1호에 극도로 부정적이었지만, 대세를 따랐다. 코르닐로프처럼 장교들이 주도권을 잡은 부대에서는 나름대로 권위를 유지했지만, 다수의 부대에서는 계속해서 특권을 제한당하고 병사들에게 모욕을 당해도 참는 편이었다.


- 병사들에게 자신이 혁명을 찬성한다는 점과 자신들의 명령이 사적 지시가 아니라 임시 정부의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란 점을 계속 강조했다. 병사들도 어쨌건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해서는 안된다는 진리에는 동의했기에 이 점을 이용해 훈련과 규율 유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월 혁명 이후 ~ 케렌스키 공세 이전의 장교 - 병사 관계는 지시하고 받드는 관계라기 보다는 협조를 구하고 딜을 거는 관계에 가까웠다.


4. 병사 위원회

1) 폭거

- 원래 병사 위원회는 병사의 시민권 보장, 병사 처우 개선을 위한 조직으로 시작했지만, 전세와 보급 상태가 더욱 나빠지고 위원회 구성원들이 급진화되면서 뒤틀려지기 시작했다.


- 'WOULD YOU KINDLY~' 로 시작하는 병사 위원회의 "제안"은 장교들에게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였고, 장교들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잘데기 없는 통제와 규칙을 만들고 장교의 권총 소지를 금지시키는 부대가 많았다. 이들은 훈련이 하기 싫어서 별에 별 구실을 만들어 훈련을 거부했다.


- 장교들의 이동, 전화는 모두 감시 대상이었지만, 병사들은 마음대로 근무지 이탈을 하고 혁명가들을 부대 내로 들였다. 병사들은 소대장 길들이기의 범위를 영관급 장교로까지 확대해서 장교들에게 모욕을 가했다.


- 군기가 작살나서 명령 1호가 발표된 뒤부터 탈영이 급증해 1917년 동안 100만 단위의 탈영병이 발생했고, 이들은 러시아의 대지와 인민을 유린했다. 탈영병들의 방화, 약탈, 강간, 살인이 만연했다. 그래서 7월에 사형제 재시행 등의 조치가 시행된 뒤에 코르닐로프가 병사 위원회를 제압하고 탈영병들을 잡아 조졌을 때는 이 조치를 지지하는 이들도 꽤 많았다.


2) 병사 위원회에 대한 오해

- 대체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1917년 러시아군을 말아먹는 적폐로 인식되는 편. 이게 군대인가? 싶은 수준의 짓만 골라서 저지르는 걸 보면 욕이 나옴.


- 그렇지만, 애초에 러시아군이 정상적이었으면 나오지도 않았을 기관. 많은 알못들이 병사 위원회의 폭거를 제시하며 이를 비난하지만, 이는 가해자들의 피해자 공격 및 유체 이탈 화법에 가깝다. 일상적으로 DP와 해병문학을 체험하는데다 만성적인 보급 부족 상태에 빠진 채로 3년 동안 전쟁하면서 버틴 군인들한테 인내를 더 요구하는 건 솔직히 양심 터진 소리.


- 브레스트 요새에서 마스크도 없이 가스탄 쳐맞고 피부가 녹아내리는 상황에서 자폭 돌격해서 독일군에게 루스카 좀비 트라우마 심은 게 러시아군인데, 병사 위원회 · 사형제 폐지 · 병사 권리 선언 3단 콤보로 기강 박살났다고 보는 건 솔직히 결과론. 명령 1호는 방아쇠를 당긴 거지, 총알은 이미 러시아군 장교들이 잔뜩 채워뒀음. 아니 누가 병사들 소모품으로 다루라고 했음? 누가 병사들 줘패고 일과 시간에 술 빨라고 강요함? 누가 대퇴각하고 몇백만씩 갈아 쳐넣으라고 지시했음? 허구헌 날 패배하라고 협박함? 지들이 무능해서 전세 못 바꾼 주제에 왜 병사 탓함? 사령부 명령 무시하고 지멋대로 수만의 군대를 움직이고, 기관총 앞에서 멋지게 고개를 쳐들고 착검 돌격하라고 지껄이던 파벨 대공 같은 등신들 몇 놈만 짤랐어도 이 지경은 안 갔겠다.


- 즉, 병사 위원회는 장기적으로 표트르 대제 시기부터 쌓인 러시아 군인들의 울분과 원한이 모인 집합체. 진짜 기가 차는 짓도 많이 했지만, 병사 인권 보장과 관련해서는 공이 있고 장교단과 협력을 이룬 부대들도 꽤 있었다.


5. 6월 공세 : 끔찍한 실패와 장교단의 우경화

- 6월 공세는 반대도 많았지만, 장교들이나 노동자들이나 병사들이나 6월 공세까지는 불만을 참자는 입장이어서 공세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병사들은 장교들의 애국적 연설과 명령을 받아들였다. 병사 위원회들도 대부분이 공세에 동의했다.


- 그러나,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공세 실패 이후, 탈영이 급증했다. 물자난은 계속되었으며 도시에서는 공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병사와 농민,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 다수의 장교들은 공세 실패가 좌1파, 특히 볼셰비키 때문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장교단의 정치화가 가속되어 장교 동맹이 결성되었며 장교들이 임시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장교 동맹과 코르닐로프의 압박에 케렌스키가 굴복해 군 내부에서의 정치 활동 금지, 장교의 권위 회복, 사형제 재시행을 허용했다.


※ 사형제 재시행의 효과

- 장교들은 확실히 기존보다 나아졌다고 평했다. 장교들의 권위도 회복되고 명령을 내리기도 수월해졌다는 것. 그런데, 이 조치로 인해 병사들의 불만이 늘어나 병사 집단의 좌경화가 촉진되었다.


6. 코르닐로프 쿠데타

- 다수의 장성과 지휘관들이 코르닐로프를 지지했지만, 모스크바 군관구처럼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막으려 한 곳도 있었으며 상당수의 부대가 쿠데타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코르닐로프 쿠데타는 러시아의 장교단이 극우적인 본색을 드러냈다기 보다는 러시아 장교단이 분열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베르호브스키처럼 지휘부 - 장교 - 병사 위원회가 서로 협력하는 민주화를 통해 군이 변화해야 하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진보 세력들도 존재했으며, 코르닐로프처럼 러시아를 패배하게 만드려는 사회주의자들을 축출해야 한다고 믿는 보수파들도 있었던 것이다.


- 다만, 코르닐로프 쿠데타로 인해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장교들을 완전한 반동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장교들의 권위도 약화되었다.


- 군의 진보 세력들은 쿠데타 가담자들과 선을 긋고 이들을 처벌하는데 앞장섰다. 이들은 쿠데타와 군의 민주화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 했다.


7. 10월 혁명

- 러시아의 장교들은 레닌보다 케렌스키를 훨씬 더 심하게 혐오했다.

- 러시아의 장교단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만 겨우 장악한 레닌 정권이 얼마 못 갈 거라 생각했고, 제헌 의회에 희망을 걸었다.

- 제헌 의회의 결과를 접한 장교들은 볼셰비키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3월 체코 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가 있기 전까지, 1917년 11월 말 ~ 1918년 2월까지의 백군 세력은 소규모에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봉기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체슬 군단이 봉기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러시아군의 대다수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 일부 연구에 따르면, 10월 혁명 시기에 러시아군에 소속된 25만의 장교 중에서 40%가 백군에, 30% 이상이 전역하거나 망명, 나머지에 해당하는 약 7만 5천명이 적군에 복무했다고 한다. 즉, 브루실로프가 언급했듯이 일부 장교들은 정부가 바뀌었어도 러시아란 나라는 존재했기 때문에 조국에 봉사했던 것.


8. 참고 문헌

- 새로운 러시아 역사

- 1917년 혁명기 러시아 장교들의 위기와 대응

- 제정러시아군 범죄통계와 병사들의 태도, 1905년-1914년

- 코르닐로프의 좌절된 쿠데타 : 음모, 오해, 배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