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항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비록 중국 본토와 동남아, 태평양의 점령지는 포기하더라도, 만주와 한반도, 타이완만큼은 어떻게든 쥐고 있으려고 온갖 책략을 구상하였다. 특히 마지막까지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한반도였다. 독일이 항복하고 소련의 참전이 초읽기에 들어간 1945년 5월 말에야 참모본부 일각에서는 "소련의 참전을 막으려면 과감하게 청일전쟁 이전으로 돌아가 만주와 한반도, 사할린 까지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나왔다. 하지만 묵살되었고 주변의 온갖 매도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일본 지도부는 패망이 코앞으로 다가온 7월 14일에도 스위스를 통한 교섭에서여전히 한반도와 타이완은 내놓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7월 18일에 외무성에서 제출한 "대소교섭안"에서는 타이완은 빠졌지만 한반도에 대한 영유권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연합국 진영이 일본과의 개별 협상은 없으며 오직 "무조건 항복"만이 있다고 여러차례 공식적으로 선언했음에도 일본 지도부는 이런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물론 몰랐을 리는 없다. 문제는 연합국 진영의 의지와 강한 결속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지도부는 미, 소가 비록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손을 잡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합종연횡일 뿐, 근본적인 모순과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결국 동맹은 균열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균열을 파고들 기회를 노렸다. 즉, 미소의 분열은 필연적이며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완전히 몰락시키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히틀러 역시 마지막까지 품었던 실날같은 희망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이 끝난 뒤 미소의 냉전이 실제로 현실화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미소의 갈등과 모순은 추축진영이 기대하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연구 없이 막연한 선입관과 편견으로 탁상공론적으로 접근하는 사고가 얼마나 무모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본 지도부는 연합국 진영이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왜 고집스럽게 식민지, 특히 한반도를 쥐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미 일본의 인구가 과잉상태라 식민지 없이는 자신들이 생존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에도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은 육군부에 전문을 보내어 "일본의 영토를 본토 4개 섬에만 국한시키겠다는 것은 과거 일본의 인구가 3천만명이었을 때로 돌아가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가 7천만명이니 우리가 생존하려면 반드시 조선과 타이완을 소유해야만 한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식민지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당시 대다수 일본 지도부의 사고 방식이었다.


그런데 5월 28일 트루먼과 회담한 후버 前 대통령은 일본과의 조기 종전을 주장하면서 일본 정부를 해체시키지 말 것과 한반도와 타이완을 일본의 영토로 인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일본이 내건 강화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얘기였다. 또한 후버는 스팀슨 전쟁장관에게도 일본을 철저하게 패배시킬 경우 극동에서 소련을 견제할 세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세력을 어느 정도 보존하여 극동의 새로운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의 제안은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사실 트루먼 입장에서는 후버의 제안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또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고수하여 전쟁을 질질 끌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여 끝내는 것이 자신들의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데에도 더욱 유리하였다.

그러나 3성 조정위원회 전략정책단의 단장인 조지 링컨 준장은 이미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미국이 일본 제국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점에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의 주장은 마셜 참모총장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트루먼과 스팀슨 전쟁장관은 이들의 주장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여기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7월 26일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 정부는 "중요지역을 여전히 영유하려고 획책하는" 일본의 요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또한 다른 연합국들도 포츠담 선언을 통하여 "일본의 영토는 카이로 선언과 같이 본토 4개섬과 연합국이 결정한 인접 소도서로 국한한다"라는 원칙을 재차 확인하였다. 이로서 한반도는 연합국과 일본의 협상 대상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일본은 소련의 만주 침공과 두발의 원자폭탄을 맞은 뒤 무조건 항복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남지 않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조지 링컨 준장은 38선을 그은 장본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의 해체이지, 일본으로부터 한반도를 빼앗아 자신들이 차지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한반도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단지 연합국들이 공동으로 신탁통치를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면 된다는 식의 막연한 구상만이 있었다. 트루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츠담 회담에서도 일본과 한반도를 분리시키겠다고 결정했지만 그 다음의 계획은 없었다. 따라서 막상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한 뒤 미국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관동군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자 트루먼 행정부는 부랴부랴 한반도에서 세력권을 나눌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8월 11일 밤 마셜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은 링컨 준장은 벽에 걸린 지도가 눈에 들어왔고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38선에 연필로 선을 주욱 그었다. 그렇게 38선은 결정되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병주고 약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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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일수도 있었다? - 일본의 화평교섭과 연합국의 대응2015년 여름 일본에서 항복 70주년을 기념하여 개봉한 하라다 마사토 감독의 《일본패망 하루전(日本のいち...m.blog.naver.com



후버 전대통령이랑 케넌 같이 일본이 너무 약해지면 소련 견제 못하니 일본 요구대로 한반도는 일본에게 주라는 의견이 미국 내에도 있었음.

그러나 링컨 준장은 이미 카이로 선언에 약속된거 뒤엎는건 불가하다 주장. 트루먼과 스팀슨도 링컨의 의견 받아들임.

그런데 링컨 준장은 념글처럼 39선 긋자는 가드너 의견 무시하고 38선 한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