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에고가 너무 강했던 나머지 태평양 전쟁 초반 필리핀 전역, 1950년 겨울 한반도에서 스타일을 구긴 건 흠 맞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양반이 유능했던 건 맞음.

1. 임관 전

서텍사스 유년군사학교(West Texas Military Academy) 졸업 당시 100점 만점에 97.33점을 받아 졸업생 대표가 됨.

웨스트포인트 입학 당시 입학시험에서도 100점 만점에 93.3점을 받고 합격함.

졸업 시 2700점 만점에 2424.12점을 받아 상위 98.14%로 졸업함. 이 점수는 동 기수 중 1등이며 역대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3등에 해당했음.

2. 청년기

임관 초기 고득점자는 공병대에 보낸 미 육군 전통대로 더그는 필리핀 주군군의 공병대 장교로 보내졌고 일로일로, 타클로반, 세부, 바탄 등에서 측량 업무 및 항만 건설 감독 등을 맡았고 필리핀 근무 도중 필리핀 봉기에 참여한 필리핀인들의 습격을 받았고 이들을 사살하는 전과도 올림. 이후 아버지 아서가 있는 일본으로 파견을 갔고 이후 아버지의 부관이 됨.


이후 1914년 멕시코 베라크루즈 원정군에 참여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이때 명예훈장 서훈자로 추천받았지만 최종 반려됐음.


3. 1차 세계대전

1차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더그는 유럽으로 보내질 제42사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중령에서 대령으로 전시 임관되었음. 파병 전까지 사실상 42사단의 조직 및 훈련 전반을 담당했음.

프랑스군과 함께 서부전선에서 종군하며 여러 작전에 참여해서 레지옹 도뇌르, 은성장을 비롯한 미국과 프랑스의 각종 훈장을 받았고 준장으로 승진했음.


4. 전간기

전간기에 더그는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웨스트포인트의 커리큘럼을 실전적, 실용적, 실리적인 방향으로 개혁했음. 비록 그의 개혁은 그의 영전 이후 되돌아갔지만 결국은 그가 지향한 방향으로 개선됨.

욱군참모총장으로 재임하면서 경제 공황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숫적 질적 유지를 위해 전력했고 (비록 친구인 빌리 미첼을 담궜지만) 육군항공대를 지원하며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B-17 플라잉 포트리스의 개발 및 제식화를 지지했음. M1 개런드 소총의 개발 및 제식화도 추진하여 미 육군의 소부대 전술부터 미 공군의 전략 폭격에 이르기까지 향후 일어날 전쟁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그리고 무리수였지만 결국은 반드시 필요했던 결정을 다수 내렸음.

더글러스 맥아더는 명암이 너무나 명확했지만 그의 진정한 리즈 시절은 전간기였음. 최연소 소장이었고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이었으며 이 시기에 그가 내렸던 결정들은 좀 더 과장하면 지금의 미군을 만드는 단초가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