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국민당은 1945년 가을부터 만주 전역에 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국민당군대는 11월 16일에 산해관(山海關)을 장악했고, 11월 26일에는 만주의 대문인 금주(錦州)를 점령했다.
북한정치세력은 만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경 평안북도 보안부는 북·중 접경지역의 상황을 보안국에 보고하였다. 당시 평안북도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하고 있고, 서해를 두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국민당 당원의 입국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동북지방이 장개석의 영토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판단하였다.
김일성은 11월 27일에 평북도당 책임비서에게 “국경경비대(國境警備隊)”를 책임지고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국경경비대를 창설하라고 지시한 시점은 국민당군대가 금주를 장악한 다음 날이었다. 국경경비대는 무엇보다 국민당군대의 국경침범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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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충돌사건은 국민당군대가 북·중 접경지역인 남만주를 침공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민당군대는 압록강 대안까지 밀고 나와 중국 안동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중 접경지역에서 수시로 월경해 북한의 국경경비대원과 보안대원들을 살해하고 주민들을 약탈했다. 몇 가지 국경 침범사건을 살펴보자. 1946년 12월 25일 강계군 만포의 압록강 대안에서 국민당군 6명이 월경해 민가의 쌀가마니와 닭을 약탈했다. 1947년 1월 13일에는 의주군 영진면 압록강 대안에서 국민당 중앙군 약 300명이 기관총 10대를 가지고 월경해 북한 보안대와 교전했다. 교전 결과 보안대원 2명이 중상을 입고, 자위대원 1명과 주민 1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1947년 2월 21일에는 중앙군 12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만포군 관내 보안분주소의 보초막을 방화하고 퇴각했다.
1947년 3월 4일에는 의주군 청송동 다리 위에서 경비하는 소련군에게 강 건너에 있던 중앙군이 총을 발사해 소련군 병사가 즉사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국민당군의 국경침범사건은 압록강변의 접경지역에서 매달 5~6회꼴로 발생했다.
국민당군의 국경침범은 압록강에 접해 있는 평안북도의 모든 군에서 발생하고 있다.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북·중 접경에서 발생한 국경침범사건은 불법월경 9회, 불법발포 26회, 불법월경 후 교전 7회, 비밀정찰 2회였다. 북한 측은 보안대원·자위대원·주민들이 부상당했고 보안대원·자위대원·주민들이 부상당했고, 일부 주민이 납치되기도했다. 또한 농가와 보안분주소 보초망이 방화로 소실되었고, 쌀과 가축 등 각종 물품을 약탈당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부대의 자동차가 피격되거나 경비임무를 수행하던 소련군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국경충돌은 국경침범이나 총격에서 그치지 않고 국민당군과 북한 국경수비대·보안대 간의 직접 적인 교전으로 격화되었다. 5개월 동안 양측 간에는 총 7회의 교전이 발생했다. 교전은 모두 의주군과 용천군에서 발생했다. 무력충돌이 주로 이 지역에서 발생한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북·중 접경지역에서 가장 큰 충돌이 발생한 지역은 평북 용천군 황초평(현재 황금평)이다. 황초평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충적섬으로 면적은 10,400,000제곱미터, 경지면적은 9,200,000제곱미터이며, 주민이 거주하는 섬이다. 해방 이후 행정구역 명칭은 평북 신도군 황초동이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평북 용천군이 있고, 북쪽에는 중국 안동시 아민촌이 있다. 황초평은 중국과 거리가 20m도 되지 않을 만큼 위치상 거의 중국 땅에 붙어 있었다.
황초평은 일제시기부터 소유권을 다투던 계쟁지(係爭地)였다. 원래 황초평은 조선시대 말까지 신도진(薪島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고, 1909년 간도협약 이후에는 일진회(日進會)가 이권을 획득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황초평을 중국인에게 대여하고 대부료를 징수했다. 그러다가 대여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자, 1928년에 경관을 파견해 총독부 직영으로 전환하였다. 황초평에 대한 소유권 문제는 해방 이후 중국국민당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다. 중국국민당은 황초평 등 압록강의 섬들을 일제가 강제로 점령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근거해 국민당은 황초평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각종 문헌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서 소유권을 주장했다.
국민당군대의 황초평 월경사건은 1947년에 발생한 국경충돌사건 중에서 가장 대규모로 오랫동안 진행된 사건이었다.89 황초평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해 있는데, 주민의 80%가 화교(華僑)였고, 조선인은 20%에 불과했다. 국민당군과 만주의 ‘토비(土匪)’들은 1946년 말부터 황초평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해 월경하기 시작했다. 1946년 12월 20일 황초평 대안의 국민당군 약 40명이 “중앙기빨과 성정부(省政府)기빨을 들고 황초평으로 월경”해서 주민의 물품을 약탈하고 황초평을 “중국영토”라고 주장했다. 1947년 1월 3일에는 “중앙군 약 100명이 지방불량배 270명과 함께 불법내습”해서 보안대와 1시간 동안 교전했다. 2월 1일에는 국민당군 약 30명이 월경해서 교전해 국민당군 1명이 즉사했으며, 2월 6일에는 국민당군과 “지방불량배” 60명이 월경해서 교전해 “적 불량배 1명”이 즉사하였다.
결국 국민당군대와 ‘토비’들은 1947년 초에 황초평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당시 황초평은 국경경비대 1개 소대가 경비하고 있었는데 국민당군대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그후 국경경비대는 황초평에 1개 대대를 파견해 다시 탈환하였다. 그리고 국경경비대는 황초평 점령에 대한 응전으로 국경경비대의 정예대원 30여 명을 선발해 안동에 주둔한 국민당군대의 사단사령부를 습격했다. 이 습격작전은 김책이 지시했고, 내무국 경비처 간부 전윤필이 계획하고 실행했다. 경비대원들은 안동으로 잠입해서 사단사령부에 수류탄을 투척해 사령부 건물을 폭파하고 귀환했다.
출처: 김선호 (2021). 북한의 경계·국경 인식과 북·중 접경지역 경비(1945~1947) -국경경비대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71), 353-388.
요약
국공내전 당시 만주에서 국민당이 유리하던 시절, 일부 국민당 군대가 압록강 건너 북한을 기습공격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북한 국경경비대랑 국민당 정부군 사이의 충돌이 종종 있었다는 이야기.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가 이겼으면 중화민국이랑 대한민국이 어떻게든 북한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북한은 이럴수록 소련에게 안보를 더욱 의존했을지도?
국민당이 지금과는 달리 아주 정상적이었던 시절의 일이었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