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글쓰기에 앞서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이전 연재글에도 말했지만 난 한국의 역사는 그다지 쓰지 않는다. 일뽕꼬이는거 일일히 반박해주는것도 귀찮은 것도 있긴하다.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갤럼들이 알고있는 내용보다는 처음듣는 이야기 해주는게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느그들 10분만 투자하면 머한 역사 다 알 수 있자너. 따라서 이번에도 머한의 러일전쟁 인식은 쓰지 않을 것이다. 꼬우면 집에 남은 교과서 봐라. 버렸으면 네 잘못인거고



러시아의 역사인식을 운운하기 전에 우선 러일전쟁이 1905년에 종전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또한 소비에트는 1991년 까지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소련의 역사인식을 먼저 봐야할 것이다. 러일전쟁은 당시 러시아 인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는 스탈린의 1945년 9월 3일에 실린 대국민담화문에도 잘 나와있다. 

그는 러일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인민이 아니라 무능한 차르 체제이며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 일본 파시스트들을 절멸시킴으로써오점을 씻어낼 수 있었다 라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후에 집필된 역사교과서에서도볼 수 있는데 지도자의 역할을 선전하면서도 차르 체제의 무능을 강조하는 역사서술로 표출되었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마르크스 이념하에 탄생한 정부로, 역사서술 역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0월 혁명을 기점으로 이전 시기를 제국주의시기로, 그 이후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이행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는 곧 혁명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역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러일전쟁의 패배는 혁명의 분위기를 성숙시키는 계기로 보았다.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와 만주군 쿠로파트킨 장군의 무능 부각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그들은 황실 측근일뿐 군 지휘관으로서는 무능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반면 여순항의 함락은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었다고 강조를 했으며 짜리즘의 몰락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체결은 짜르정부가 러시아혁명 진압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평가한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역사학계는 기존의 획일적인 역사해석 틀에서 벗어나 역사해석의 다양성을 표출하였다. 이러한 역사해석의 다양성에서 역사교육의 준거틀 마련이라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러시아에서는 애국주의적 실증사관이라는 타협책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러일전쟁의 전개과정을 쓰기 전에 우선적으로 당시 국제관계에 대해 먼저 서술한다. 유럽에서의 국제관계와 침략적인 성향의 삼국동맹, 이를 막고자 러불동맹으로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고 지적하고 니콜라이 2세가 평화조정자라는 칭호를 얻은 선친의 대외정책 기조를 이어갈려는 여망이 있다고 했으며, 국가의 산업화라는 과제를 해결하고자 외자유치를 진행하는 등 러시아 전제정이 평화애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유라시아국가인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은 유럽의 평화에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인식을 준다.

또한 소비에트 교과서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일본의 침략성을 부각시키고 청일전쟁이 청과 한국에 대한 침략행동이며, 당시 일본은 부르주아적 개혁을 단행하고 태평양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고 기술하였다. 

이후 러일전쟁의 경과에서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하였으나 사할린에서 유형수들이 의병대를 조직하여 2개월간 전투를 지속하였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육해군 사령관들의 후퇴와 항복과는 대조적으로 유형수들로 이루어진 의병대의 애국적인 활동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포츠머스강화회의도 전쟁에서는 패배했으나 협상에서는 승리한 전쟁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었다. 강화협상은 일본의 세력확대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시작되었으며, 러시아는 단지 사할린 남부만을 양도하고 배상금은 전혀 물지 않았을 만큼 성공적인 강화였다고 기술되었다. 특히 일본이 배상금 지불과 사할린 전역 양도, 태평양 함대의 선박수량 제한을 거부하고 사할린 남부만을 양보한 비테는 이후 작위를 하사받았다고 서술하였다. 


중국, 일본, 미국의 러일전쟁 인식은 다음번에 쓸게 새벽 4시 넘으니까 너무 힘들다


참고문헌


최덕규, 「러일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역사인식」, 『슬라브연구』 제19권 2호,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