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회 도서관에서 제공한 이 사진은 1862년, 매릴랜드주 샤프스버그 근처에서 벌어진 앤티텀 전투 중
앨런 핑커톤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전에 그는 그 유명한 핑커턴 탐정사무소를 설립했죠.
1861년 그는 링컨 대통령 암살음모를 저지하였으며 후에 비밀경호국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는
연방 정보국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재앙적인 사건이였습니다.
60만명이 넘는 북부와 남부 사람들이 전쟁중 사망하였으며 이 수치는 미국이 참여한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 숫자보다
많은 숫자였죠. 5만여명이 한번의 전투에서 사망한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인구가 적은 남부주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죠.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전쟁중에 그들의 친구, 친척, 형제, 아들 혹은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전쟁은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몇몇 가족들을 완전히 분단시켜놨죠.
예를 들어 한 미국 상원의원에게는 북군 장군을 지낸 아들과 남군 장군을 지낸 아들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해방자" 아브라함 링컨에게도 남부를 위해 싸운 4명의 형제들이 있었죠.
하지만 전쟁이 비참했던만큼, 전쟁이 끝난후 국가는 이전보다 더욱 단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북부와 남부 모두들 진심으로 힘을 합쳤죠.
그걸 잘 보여주는 예시는 1787년 헌법 초안을 작성한 이후 북부와 남부를 분열시키는 기촉제가 되었던 노예제입니다.
미주리주와 현재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유타 및 애리조나등을 포함한 멕시코 할양지와 텍사스주에서의 탈주노예법이나 이후 벌어진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 그리고 과격한 노예해방론자로 유명한 존 브라운의 피의 캔자스 사건등을 보아 알수 있듯이 분쟁은 이어졌죠.
이러한 분쟁들로 인하여 3/5 조항이나 미주리 타협안, 1850년 타협과 같은 타협안들이 효과가 없어졌음이 드러났고 북부와 남부 두 지역은
점차 멀어져나갔습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 해방선언(1863년)은 이러한 노예제에 대한 논쟁을 영구적으로 종식시켰습니다.
링컨은 노예제도가 폐지되면 이러한 논쟁들이 사라지고 북부와 남부가 다시 재결합할거라 생각했죠.
연방(북부)의 승리는 또한 주의 권리 대 연방주의에 관한 논쟁을 끝냈습니다.
남부 및 민주당원들은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의 버지니아-켄터키 결의 이후 의회가 위헌을 했을때
연방정부의 요구를 기각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연방 대법원이 아닌 주정부가 의회에서 제창한 법률이 합헌인지 위헌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법심사권한을
갖고 있다고 믿었죠.
미국의 7번째 부통령이였던 존 C. 칼훈은 1830년대의 무효화의 위기 기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박람회에서 그 점을 제기했습니다.
연방에서 통과시킨 제조업이 성장하는 대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이익이 줄어드는 관세법을 무효해야 한다고 촉구한거죠.
(이후 칼훈은 1832년 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반면 휘그당과 공화당원들은 일반적으로 연방 대법원만이 법안에 대한 심사 권한을 가지며 법원에 복종해야 하는것이 국가에 대한 의무라고
반박했습니다.
결국 남북전쟁에서의 남부의 패배는 주에 대한 연방정부의 권한을 확인시켜주었으며 논쟁을 종결시켰죠.
남북전쟁은 또한 세계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이였습니다.
왜냐면 북부의 승리로 민주주의가 성공했음을 확인시켜줬기 때문입니다.
1861년 미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수 많은 군주들은 미국이 곧 붕괴할 위기에 처할거라 믿었습니다.
민주주의는 너무 냄비같으면서 지저분하고 또한 취약해서 실용적이지 않다고 주장했죠.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나기전 이 전쟁이 역사상으로도 중요할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남북전쟁은 민주주의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전쟁의 결과는 전 세계에 민주정의 운명을
결정할거라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결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포트 섬터, 1861년 5월 남부연합의 깃발아래 같은 해 4월 12일, 남북전쟁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남부연합군(이하 남군의 포대가 34시간 연속으로 포격을 가했고 4월 13일 요새안의 연방정부군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대피시켰죠.
이후 연방정부군(이하 북군)은 전쟁기간중에 이 요새를 다시 되찾으려 수 많은 시도를 했지만 요새를 되 찾은건 4년이 지난
1865년 2월 22일 남군이 찰스턴에서 철수한 이후였습니다.
1864년 6월, 버지니아주 피터즈버그 인근의 남군 야영지
1862년 요새화된 요크타운, 버지니아(반도전역중)
1863년 3월에 촬영된 북군의 철갑선 USS 에섹스,
1000톤급의 증기기관을 장착한 건보트로 1861년 미시시피강 함대에 인수되었습니다.
이후 1862년미 해군에 배속되어 배턴 루지와 포트 허드슨의 점령을 포함,
미시시피강에서 여러 작전에 참여했죠.
1863년 7~8월경에 촬영된 사우스캐롤라이나 모리스섬의 300파운드 짜리 패럿포. 보시다시피 포신이 깨져서 떨어졌습니다.
북군의 "풍선군"이 운용하던 정찰용 수소가스 풍선. 풍선군은총 7개의 풍선을 운용했습니다.
워싱턴의 컬럼비아 특별구에 위치한 조병창에서 제조된 포탄들.
CSS 스톤월은 1864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남군을 위해 제작된 1390톤 짜리 철갑선이였습니다.
CSS 스톤월이 대서양을 건너남군에 합류하기 위해 쿠바 하바나에 도착한건 1865년 5월이였고 전쟁은 이미 끝난후였죠.
스페인 당국은 곧 이 배를 미국 정부에 인도해줬습니다.
1864년 8월 17일 촬영된 남군의 앤더스빌 감옥.
앤더스빌은 악명높았던 남군의 포로수용소였습니다.
약 4만 5천명의 북군 수감자중 13,000명 정도가 굶주림과 질병, 학대로 목숨을 잃었죠.
1865년 11월 10일 워싱턴 DC에서 집행된 조지아주 앤더스빌 감옥의 사령관이였던 헨리 워츠의 사형 집행.
그는 전후 음모 및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에 처해졌습니다.
버지니아주 포트 코코란에서 촬영한 69 뉴욕보병연대의 장교들과 마이클 코코란 대령의 모습
북군의 벤슨 포대는 세븐파인 전투에서 페어옥스의 토마스 "스톤월" 장군의 남군을 물리쳤습니다.
페어옥스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는 1862년 5월 31일 ~ 6월 1일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1864년 조지아주 애틀랜타 화이트홀 거리에 있는 노예경매장앞을 경계중인 흑인 북군 병사.
표지판에는 "흑인 경매 및 판매"라고 적혀있습니다.
1862년 7월 9일, 버지니아주 제임스강에서 촬영된 북군의 철갑선 USS 모니터.
USS 모니터는 미 해군에 배치된 최초의 철갑선으로 유명한 남군의 철갑선인 USS 버지니아와 전투를 벌인적이 있습니다.
버지니아주 제리코밀스 근처 북쪽 안나강에서 도로를 건설중인
50 뉴욕 공병대, 1864년 5월 24일
남부연합 국회 의사당에서 바라본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롬비아시.
1865년 북군의 점령 직후에 촬영되었습니다.
1865년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있던 조병창. 대포와 포탄이
흩어져있습니다.
1865년 4월 버지니아주 콜드하버 근처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있는 흑인들의 모습
원문 : https://rarehistoricalphotos.com/american-civil-war-in-pictures-par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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