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나라에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당(隋唐)의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기에 신은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은 용병에 뛰어났고, 병졸들은 윗사람을 친애(親愛)했기에 솔선하여 그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구려는 한 귀퉁이에 치우친 소국이었지만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던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시대 학자이자 관료였던 최부(崔溥·1454∼1504)가 남긴 『표해록(漂海錄)』의 1488년(성종 19) 2월 17일 자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최부는 1488년 제주도에 출장 갔다가 부친상 소식을 듣는다. 급거 귀경하는 도중 흑산도 근처에서 타고 있던 배가 풍랑에 휘말려 표류하기 시작했고, 끝내는 명의 절강성 영파(寧波) 부근에 불시착했다. 최부는 이후 영파를 출발하여 강남 지역을 지나 북경을 거쳐 귀국했는데, 위의 기록은 소주(蘇州)에서 명의 안찰어사(按察御史)와 나누었던 필담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주의 안찰어사가 생면부지의 최부를 만나자마자 고구려가 수당의 대군을 물리친 역사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격퇴한 것이 15세기 말까지도 중국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 또 당시 중국인이 조선을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 등을 명확히 보여준다.
1388년(고려 우왕 14) 이성계 일파가 요동(遼東) 공략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면서 내세웠던 명분 가운데 하나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以小逆大不可)”는 것이었다. 이어 1392년 건국 이래 조선은 명에 대해 사대(事大·대국으로 섬기는 것)를 표방했다.
하지만 이성계나 조선 지식인이 명에 맹목적이고 무조건 머리를 숙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명이 조선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내정에 부당하게 간섭하려 할 경우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1395년(태조 4)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이 보낸 표전(表箋·제후가 황제에게 보내는 문서) 내용을 문제 삼아 표전 작성자를 묶어 보내라고 강박하고, 심지어 조선 사신을 죽이기까지 했다. 표전의 작성자는 정도전(鄭道傳)이었다. 명의 협박이 이어지자 조선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요동을 공격하여 명의 폭거를 응징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주원장이 ‘표전 문제’를 트집 잡아 조선을 위협하고 정도전 등이 요동 공격으로 그에 맞서려고 했던 배경에는 모두 고구려에 대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원장은 고구려의 계승자인 조선이 요동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지 않을까 의심했고, 정도전 등은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을 언젠가는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요동을 되찾을 가능성은 미약해졌지만 ‘강국 고구려’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기억과 선망은 면면히 이어진다. ‘수당의 백만 대군을 격퇴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자랑스러운 기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수십만 대군을 보유했던 사실, 성(城)을 쌓고 지키는 데 뛰어났던 사실 등은 조선 지식인에게 자부심의 근거이자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전시(殿試·과거 합격자들의 최종 면접시험)에서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쳐 천하의 강국으로 불릴 수 있었던 원인을 묻는 문제가 출제됐다. 양성지(梁誠之·1415∼1482)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은 물론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영양왕(嬰陽王)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고구려의 후예’ 조선의 신하로서 자존의식이 강했던 그는 15세기 중반 명이 보내온 문서에서 조선을 ‘너(爾汝)’라고 쓴 것에 통분하여 명을 상대로 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명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고구려를 ‘억세고 만만찮은 상대(勁敵)’로 인식했다. 따라서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 또한 가볍게 볼 수 있는 나라는 아니라고 여겼다. 주원장이 ‘표전 문제’ 등을 계기로 조선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배경에는 ‘고구려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고구려의 후예’ 조선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뀐다. 명 조정과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지휘부는 무엇보다 임진왜란 초반 조선이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렸던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고구려의 후예’로서 만만찮은 조선이 불과 17일 만에 일본군에 수도를 넘겨주고 선조가 서북단의 의주까지 피신했던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당시 요동 지역에서는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 요동을 되찾기 위해 고의로 일본군을 끌어들였다는 유언비어가 돌았을 정도였다.
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허약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폭로되자 명의 신료들과 명군 지휘부는 ‘고구려의 후예’가 쇠약해진 원인을 찾기 위해 부심한다. 그 과정에서 대다수 명 측 인사들은 ‘무비(武備)를 방기하고 문약(文弱)에 빠졌던 것’을 조선이 쇠약해진 원인이자 일본의 침략을 초래한 배경으로 지목했다. 명군 지휘부 가운데는 조선을 아예 ‘쇠망의 기미가 누적된 나라(積衰之邦)’로 규정하고 “임금과 신하가 시주(詩酒)에 빠져 태평시대를 즐기다가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명군 지휘부는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는 조선’은 자강(自强)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명의 전쟁 지휘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강요하기도 했다. 1593년 이후 명군 지휘부가 조선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본과의 휴전 협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던 데는 이 같은 인식과 태도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요컨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은 ‘고구려의 후예’이자 ‘만만찮은 나라’에서 ‘보잘것없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중국인이 지녔던 ‘고구려 트라우마’도 소멸하고 말았다.
출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저술, 역사비평사, 1999년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중국인들의 머릿속에는 한반도 국가들은 수-당 통일중국이 70년을 넘게, 그것도 단독의 힘이 아닌 신라와 손 잡아가면서까지 간신히 고구려 멸망시켰는데 또 발해로 부활한 그런 정말 상대하기 어렵고 강력한 존재였음.
그런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런 생각이 사라지고 한반도 국가=만만한 존재로 인식이 바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오늘날 한국에 끼친 최대 악영향 중 하나임. 중국이 한반도 보는 인식이 나쁘게 바꼈다는거.
이것도 템플릿이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