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 강문보(姜文寶)가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진무(鎭撫) 왕황(王璜)을 보고 물으오니, 대답하기를, ‘광녕(廣寧)요동(遼東) 사이의 참로(站路)가 모두 달달(達達)에게 노략당하여,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사로잡아 가기를 수 만(數萬)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 달달이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지휘(指揮) 오양吳良)달달의 지면(地面)에 들어갔다가 잡혀서 억류되었는데, 비밀히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초가을에 달달중국을 침범할 것입니다.」 하므로, 7월 17일에 황제가 군병 8만을 거느리고 친히 정벌하러 거용관(居庸關)을 출발하여 행차가 장안령(長安嶺)에 이를 적에, 도독(都督) 양홍(楊弘)의 삼부자(三父子)가 산속에 복병(伏兵) 했다가 적을 습격하여 4만여 급(級)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하오나, 그러나, 이 사실은 전해 들었을 뿐, 문서로 전달되어 상고할 만한 것은 없사오며, 요동(遼東) 등 지방은 조용하여 아무 일도 없습니다."



- 세종실록125권, 세종 31년 8월 18일 을축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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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보의 변에서 당시 명나라군이 불렀던 황제 친정군 호왈은 50만인데 조선이 외부에서 관측하기엔 그냥 8만 밖에는 안되는거 같다는 소리가 나옴.


명나라는 영락 이후에 태조인 주원장이 세운 군사제도인 위소제가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쪽에서의 기록에서도 장부상 기록보다 실제 병력이 훨씬 못 미친다고 한탄하는 기록들이 매우 자주 나옴. 때문에 조선이 조사해서 규모를 어림짐작한 것이긴 하지만 정말로 토목보 당시 명나라 황제 정통제의 친정 병력이 이랬을 가능성도 높음.


때문에 '황제 친정인데 어째서 10만 정도?' 라는 의문은 타당하지 않을수도 있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