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임시정부는 1920년대 여러가지 문제를 연발적으로 터지면서 독립운동 최고 기관에서 수많은 독립운동집단 중에 하나로 몰락했다. 그래서 왜 그들은 이렇게 몰락했는가, 그리고 몰락한 임시정부는 어떠한 방략을 가지고 움직였는가 임시정부 탄생부터 민족유일당운동까지 몇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알아보려 한다.
1. 임시정부의 리더인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의 문제점
1919년 임시정부가 생긴 이후로 임시정부는 3명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이 구성되어 졌다.
첫번째. 이승만은 1919년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된 이후 미국에서 자기가 국무총리가 아닌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대외활동을 해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공분을 샀다. 그러나 이승만은 신경쓰지 않고, 결국 임시정부에 대통령직이 생기면서 이 일은 대충 끝이 나지만 이후도 자기 주장만 고집해 위임통치 청원, 자기가 임시정부 대통령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흡수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활동 하는 등 여러 문제를 계속 만들다 결국 임시정부를 파멸 시키고 임시정부를 둘러싼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게끔 만든다.
그러나 이승만의 또 다른 문제점은 임시정부 대통령인데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해에 가지 않으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안창호의 서북파한테 밀린 서울경기도지방의 기호파 인사들을 비선으로 써먹어 상해의 동향을 몰래 감시하고, 미주지방을 관할하는 구미위원부의 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지 않고 대부분을 빼돌려 자기가 쓰는 등 임시정부 대통령인데 임시정부를 무력화 시키거나, 견제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승만과 이승만이랑 손을 잡은 기호파들은 국민대표회의를 무산시키려고 노력 했으며, 임시정부 현상 유지파로써 있었다.
결국 폭발한 임시정부는 1925년 박은식 내각을 출법시키고, 서북파가 의정원에서 기호파를 축출하고, 이승만을 탄핵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의 고집과 이해 할 수 없는 행위들 때문에 이미 임시정부 상황은 개판이 된 상황 이었다.
두번째. 안창호는 대통령이 생기기 전 국무총리 대리로써 임시정부 행정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안창호도 여러 문제점이 있었는데 대통령제가 도입되고,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 자기는 노동국 총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쥐락펴락 했다는 것이다. 또한 비밀조직 홍사단을 통해 임시정부의 국회라 할 수 있는 임시의정원을 장악해 정국을 쥐락펴락 했고, 서북파의 리더로써 노동국총판인데도 불구하고, 노동국 외 일에도 개입하는 등 월권 행위를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안창호와 서북파의 정국 장악은 임시정부 내 또 다른 파벌 이었던 기호파의 반발을 일으켜, 결국 기호파가 이승만과 손잡고 안창호와 서북파를 견제하는 구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몰락을 최대한 막으려 했고,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을 끝에 파멸로 가는 걸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하는 등 여러 노력 한 것은 맞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로 합류해 창조파와 대립한다.
세번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 집단인 상해파가 임시정부에 합류 하면서, 좌우통합 정부가 탄생 했는데, 이동휘의 참모인 김립의 여러 행위와 이동휘의 독선적인 행위들 때문에 여러 문제점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 혁명정부에 안정근, 여운형, 한형권 3명을 보내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이동휘와 같은 상해파인 한형권만 모스크바로 보낸 것 등등 여러 사건을 터트렸으며, 결국 이승만과 갈등 끝에 차장들을 이용해 이승만 탄핵 청원을 하고, 임시정부를 집단지도체제로 변경하자고 하고, 1921년 연설을 통해 임시정부 국무원 총장들의 불만을 사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해 결국 이동휘와 상해파는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
그래도 국민대표회의 때는 임시정부를 해체하는 창조파가 아닌 개조파로 합류해 서북파와 손을 잡았다.
2. 임시정부에 불만을 가진 단체와 결국 반 임시정부로 돌아선 집단들
임시정부가 생겨난 이후 부터 수많은 집단들이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써 인정하기도 했으나, 반대로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집단들도 있었다.
첫번째. 임시정부 초창기 상해-노령-한성에 있는 임시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드려했는데, 노령의 국민의회는 상해 측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 불만을 표시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지 않았은데 결국 반임정집단으로 국민대표회의 때 창조파로 참가하게 된다.
두번째. 서간도 서로군정서의 이상룡과 신채호, 박용만의 북경군사통일회는 임시정부의 준비론에 반발해 서로군정서, 북경군사통일회 다 임시정부를 인정 하지 않았으나, 국민대표회의 때는 이상룡의 서로군정서는 개조파로 신채호,박용만의 북경군사통일희는 창조파로 합류함으로써 다른 길을 선택한다.
세번째.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은 상해파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소비에트 볼세비키 이론에 충실해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지 않는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상해파와 달리 이르쿠츠크파는 반 임시정부집단으로 국민대표회의 때 창조파로 합류한다.
3. 지연으로 연결된 파벌과 독립운동 방략에 따른 갈등
임시정부 초기 파벌은 서울을 기점으로 한 기호파, 함경도를 기점으로 한 함경도파, 서북지방을 기점으로 한 서북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다 지연으로 묶여있었으며, 초기에 나간 함경도파 빼고 지연으로 구성된 파벌들이 대표인사를 내세워 파벌 다툼을 했으며, 지연으로 된 파벌 말고도, 대소독립전쟁론, 대미외교독립론, 준비론 이 3가지 독립운동 방략을 두고 어느정도 타협점을 두고 활동 했으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으로 인해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어 임시정부 파멸에 일조를 했다.
4.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운동과 임시정부의 노력
결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독립운동 최고기관을 창조하는가, 아니면 임시정부을 개조하는 선에서 멈춘다. 임시정부를 현상 유지 시킨다. 이 3가지 입장을 가지고 국민대표회의가 성사되었으나, 현상유지파는 당연히 국민대표회의에 불응했으며, 개조파와 창조파의 토론 끝에 결론이 안나 국민대표회의는 흐지부지 되었다.
다행히 해체 당하는 꼴은 면한 임시정부는 서북파를 중심으로 이승만을 탄핵 한 뒤 박은식 내각을 세우고 개헌을 하는등 재개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합작을 보고 민족유일당운동을 했으며, 결국 민족유일당 운동이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이 운동의 경험으로 임시정부는 더 이상 지연으로 뭉친 파벌, 단순 독립방략으로 뭉친 파벌이 아닌 자기의 이념과 방략을 토대로 정당을 만들기 시작해 여당 야당 체제로 새롭게 나아서게 된다.
참고
윤대원.1999.大韓民國 臨時政府의 組織·運營과 獨立方略의 분화
딴데서 쓴건데 걍 김립이야기 보다가 가져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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