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흔히 전해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육군은 일본군에게 마냥 쳐발렸다.'라는 인식을 재고해보기 위해 당시 초반 최대의 격전지였던 경상좌도의 조선군 태세를 알아보는 글이다.
먼저 침공 초기 조선군의 움직임을 보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조선군은 제승방략 체제의 허점으로 인해 제대로 집결하지도 못한 채 삽시간에 무너졌을까?
정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임진왜란의 시작은 일본군 제1번대가 1592년 4월 13일 부산 진포에 대대적으로 상륙하면서 시작된다. 그 이후로 이어진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산진성, 동래성 전투다.
부산진성 전투는 일본군이 상륙을 개시한 바로 다음 날인 4월 14일에 벌어졌고, 동래성 전투 또한 바로 이어서 4월 15일에 벌어졌다. 헌데 이미 당시 동래성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수의 동원령을 받은 경상좌도 각지의 군사들이 집결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경상좌병사 이각,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 등이 이미 동원령을 받자마자 집결을 개시하여 동래성에 진을 친 상태였고 이어서 동원령을 받고 동래성을 향해 달려오는 군세들도 상당수 있었다. 밀양부사 박진, 경주판관 박의장 등이 동래성을 향해 달려가는 등 경상좌도 일대 13개 읍의 군사가 재빠르게 동래성으로 집결을 개시한다.
이를 보면 흔히 알려진 '병사들이 모여도 지휘관이 없어 와해되었다.'라는 인식과는 조선군의 움직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적의 침공 이틀 만에 관찰사의 지휘 하에 각지의 조선군 및 그 지휘관들이 신속하게 기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럼 이런 신속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왜 조선군은 그렇게 쉽게 와해되었을까?
답은 위의 이 이각이라는 놈이다.
경상좌병사로서 집결한 경상좌도 조선군을 총지휘해야 했던 이각은 동래성 전투에서부터 성 밖의 조선군 상당수를 지휘하고 있다 고대로 줄행랑을 쳐버린다. 그렇게 동래성에 빠르게 집결했던 조선군은 박살이 나고 성은 혈전 끝에 함락 당하고 만다.
이각의 추태는 경상좌도 전역 내내 그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데, 동래성에서 박살 난 조선군이 단숨에 와해된 것 또한 아니었다. 약 나흘 후 4월 18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제2번대는 고대로 언양, 양산 방면으로 북진하여 경상좌도 조선군의 본영인 울산에 위치한 경상좌병영을 노린다.
이때 경상좌병영에는 동래성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조선군이 대대적으로 집결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총지휘관인 이각이 먼저 도망을 쳐버린다.(...) 결국 4월 20일 경상좌병영마저 일본군에게 함락. 이번에도 경상좌병영을 지원하기 위해 좌도 각지에서 이동 중이던 조선군 후발부대들은 전투에 참전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임지로 회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니까 경상도의 초기 전황을 보면 조선군은 제승방략 체제의 허점으로 인해 느릿느릿 움직이다 억하고 다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각지의 현장 지휘관들은 상황이 터지자마자 기민함 움직임으로 병력을 결집하여 전장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정작 중앙 지휘부가 고위 지휘관들의 추태로 인해 먼저 무너지면서 병력들이 붕 떠버리는 사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군은 손쉽게 북진을 개시하면서 연달아 상륙한 후속부대들의 힘을 받아 쭉쭉 치고 올라간다.
곧바로 경상도의 중심도시인 경주가 떨어졌고 이어서 영천성, 상주성이 넘어가면서 일본군은 손쉽게 경상도의 방어선을 분쇄한 채 서울을 향해 내달릴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중간이 어찌되었든 우리가 흔히 아는 임진왜란의 그림이 그려진다. 일본군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허약한 조선군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종횡무진 달려나가고 경상도는 순식간에 적의 손에 떨어졌다.
헌데 그게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조선군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거든.
어찌되었든 주요 고위지휘관들의 추태와 함께 중앙지휘부가 날아가면서 경상좌도의 조선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1592년 4월 말부터 5월 약 한 달 동안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일본군 각 대가 순차적으로 상륙하면서 경상좌도 전역을 유린하다시피 했고 거기에 국가의 통제를 잃어버린 난민들 또한 도적떼로 화해 경상도 전체를 휩쓸었다. 이 중에서는 아예 일본군 밑에 붙어서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 주변 일대를 휩쓸던 대규모 반적 집단들까지 있었다고 하니 사실상 판이 다 박살이 나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거의 잔당 토벌전 정도로 마무리될 그림이었는데.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경상좌도의 조선군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각 지역에 배치된 하급 지방관들인 '현령'의 존재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이 작은 마을의 '사또나리'들이 죽음으로 버티고 섰다. 군수급도 되지 않는 작은 고을들에 파견되는 현령, 현감들이 도망치기는 커.녕 경상좌도 북부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장 경주지역만 보아도 경주부윤과 판관을 비롯하여 흥해 군수와 장기 현감, 영일 현감, 청하 현감 등이 각지에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책임 지역을 방어하기 시작한다. 특히 죽장현에 주둔한 경주 판관 박의장은 흩어진 난민과 군사들을 재결집하는 것은 물론, 장인들을 모아 병기고까지 운영하면서 병장기를 자체 제조하여 분배했다.
여기에 힘을 입은 경주지역 여러 현령들은 제각기 병력을 끌어모아 주요 고지와 통로들에 복병을 배치하여 일본군 소부대들을 차단하거나 배후 공격에 나섰고, 밤에는 서로 간의 소통을 위해 봉화를 올리고 낮에는 적의 주요 진지들을 향해서도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는 듯 아주 주야로 발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이들 현령들의 움직임은 시작부터 아주 조직적이었는데, 경상좌도의 조선군이 가장 먼저 들이쳐서 차지한 곳들이 바로 죽장창과 기계창이었다. 당시 경주부 일대에는 조세미를 대량으로 보관하는 조세창이 총 4곳 위치하고 있었는데, 바로 신광창․기계창․죽장창․안강창 이 네 곳이었다. 재집결하기 시작한 조선군은 곧바로 이들 조세창을 먼저 차지한 것이다. 앞으로 군대를 운용할 보급창을 가장 먼저 확보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경주부와 북쪽으로 맞닿은 안동진 쪽에서는 조선군의 움직임이 더욱 과감했다. 이 지역 현령들은 이미 안동진을 뚫고 올라가 강원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한 일본군과 서쪽의 상주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군 남부 주둔군 등으로 둘러싸인 형상이었는데, 이쪽 현령들은 정말로 죽기로 자신의 책임 지역을 지키기 위헤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영해 부사와 청송 부사, 영천 군수, 의성 현령, 봉화 현감, 진보 현감, 군위 현감, 예안 현감, 영덕 현령, 용궁 현감 등 각 지역의 현령들이 모두 일본군에 맞서 깨지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혈전을 벌였고 개중에 용궁 현감이었던 우복룡을 중심으로는 주변 지역의 현령, 현감들이 군세를 합쳐 일본군을 향해 공세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렇게 들이받았던 조선군은 당시만 해도 엄청난 기세였던 일본군 주력부대 앞에 박살이 나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흩어져 도망하기는 커.녕 다시 임지로 후퇴하여 병력을 모아 들이받기를 반복할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을 이어나갔다.
남부의 대구진 지역에서도 전투는 지속되어 대구 부사를 비롯하여 청도 군수와 경산 현령, 인동 현감, 현풍 현감, 영산 현감 등이 모두 군사를 이끌어 적과 대진했고, 현풍 현감, 영산 현감들은 아예 순절하는 등 조선의 하급 수령들은 너나 없이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A 훈련봉사 권응수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는데, 그의 관할 하에 응모한 자들은 모두 한때 무사들로서 영천에 사는 정대임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니, 사로잡거나 참한 자가 자못 많았다.
B 영천군에 가까운 면의 군인 100여명이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모였거늘 같은 군에 거주하는 의병장 정대임이 병사를 모아 거듭하여 서로 통하였습니다.
C 영천 복병장 정대임과 하양 신해와 의흥 복병장 홍천뢰와 경주 임내와 자인현 복병장 등이 있는 곳에 군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D (8월 1일)경상도 영천 진사 정세아, 신녕 봉사 권응수, 하양 봉사 신해, 고성 봉사 최강이 모두 모병하여 적(일본군)을 토벌하였다. 세아의 나이 67세였다. 적이 막 본성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세아가 좌수 유몽서, 생원 조희익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초집하여 적을 사로잡아 참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러한 각 지역 현령들의 피나는 분투와 희생 속에 경상좌도의 군민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패퇴하여 숨어있던 지방의 산졸들과 지역 유력자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의병들이 우후죽순 솟아나기 시작한 것. 이들 의병 전력은 곧바로 각 지역 현령들이 이끌고 있던 관군과 긴밀하게 유대하며 점차 전력을 합쳐나가기 시작했는데, 사태는 이미 일본군이 꿈꿨던 손쉬운 잔적 토벌을 훨씬 넘어서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개전 2개월차인 6월에 이르면 이미 경상도는 아주 사방에서 난전이 펼쳐지는 격전장이 된다. 경상북도 라인의 경주부를 중심으로 좌도의 조선군 움직임이 격렬해짐과 동시에 경상우도의 조선군 또한 5월부터 초유사 김성일을 필두로 전력을 회복하며 진주성의 김시민을 선봉 삼아 경상남도 라인인 창녕, 밀양, 진해, 창원 등지로 공세를 반복해오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군은 사정이 많이 다급해진다. 주요 후방 기지인 경상도가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면 이를 보급선으로 발판 삼아 이미 전방으로 쭉쭉 뻗어 올라간 전방부대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기 때문. 6월부터 경상도 주둔 일본군은 경상북도 라인의 조선군을 철거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하게 되고 경상좌도 조선군에게는 최대의 위기가 펼쳐진다.
아직까지 각 고을 현령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조직화되지 못한 상태로 중앙지휘부가 여전히 텅 비어있는 상태였기 때문.
그런 상황에서 딱 한 명이 흐름을 아주 틀어 놓게 되는데 그게 바로 '경상좌병사 박진'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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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승리인가
그러면 이각 이새끼는 어떻게든 처벌은 받았으려나 - dc App
도원수 김명원한테 잡혀서 문답무용으로 모가지 날아감;; - dc App
김수는 개전당일 진주에 있어서 동원령 선포해도 그전에 동래성 날아감. 아마도 이각은 자기가 제일 잘알고있으니 사이즈보고 안될거 같아서 튄듯
이거보니까 나약하고 무능한 조선 이미지가 바뀌었으면 좋겠음
"의병"이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희생된거라고 생각함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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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칼과 정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
루이스 프로이스 기록에도 일본군은 서울로 진격하는데만 바빠서 경상도 점령도 제대로 못했고 500명 이상 모여서 이동하지 않으면 위험했다고함.
사실 병사 개개인 역량 보다는 부사관, 장교급의 능력 부재가 너무 뼈아팠지. 특히 육군 장성급인 병마절도사 대부분이 임란 초기 도망가는데만 바빴고 그 자리를 실전에서 능력 검증한 초급 장교들이 차지함ㅋㅋㅋ
대중들에게 각인된 조선군 이미지인 백병전만 하면 도망가거나 일방적으로 썰렸으면 충무공이 근거지를 유지하면서 싸울 수도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