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들은 맞아 죽지 않으려 아파트에 숨어들어 민간인의 옷을 찾았지만, 여전히 신변이 위태로웠다. 군중들은 공공건물에 있는 군주제의 상징이나 황실에 납품하는 가게의 상두독수리를 모두 찢어버렸다. 무장한 무리는 반혁명 분자를 찾겠다며 부유한 지역의 건물을 샅샅이 뒤졌다. 대부분 이를 구실로 약탈과 무차별적인 폭려을 일삼았고, 어떤 이들은 집에 혼자 있는 젊은 여자를 강간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충격을 받은 파르의 사촌인 젊은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은 일기에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증오를 품어왔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국민의 격노"라고 에둘러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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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감스럽게도, 군의 기강과 의무감은 크랍코프 박사가 5월 말 기록한 것처럼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러시아군 주둔 지역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강도와 살인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불운한 유대인 가정이 가장 고통받고 있다." 크랍코프는 "병사들은 사기가 매우 높고 의기양양하며 군 내에서 '건강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케렌스키를 "그저 허풍떠는 궤변가"로 여겼다.


 2월 혁명을 열렬히 반겼던 크랍코프는 크게 실망했다. "차리친(볼고그라드), 바르나울, 예니세이스크와 그 외 어머니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좋은 소식이 전혀 들려오지 않고, 스테판 라진의 난과 푸가초프의 난처럼 피비린내 나는 반란이 시작되고 있다! 통제할 수 없이 광란하여 날뛰는 대중은 제멋대로 자유를 찬양한다." 갈리치아 전선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대체로 복귀하기로 한 병사는 부대 전체 병력의 반도 되지 않는다."크랍코프는 썼다. "나머지는 무장한 채 역으로 가 열차에 태워달라고 요구한다. 누구는 키예프로, 누구는 모스크바로 가려 한다. 가끔 악몽 같은 이 무정부 상태의 어두운 수렁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참호에 남은 병사들도 적군인 독일군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적군이 러싱군에게 "러시아, 쏘지 마!"라고 외치면 양쪽 다 참호에서 기어 나와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이를 막으려고 러시아 지휘관들은 포병에게 사격을 지시했지만, 보병들은 오히려 포병을 위협하며 전방 관측장교와 연락하는 야전 전화선을 끊었다. 부활절 기간에 비공식적 휴전을 시작한 병사들은 반대편의 적군과 자주 협상했다. 독일 동부전선사령부는 종전을 원하는 혁명 세력을 가장한 첩보원과 정보장교를 방어선 너머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해 봄에는 전투가 없어서 독일군은 동부 전선의 15개 사단을 서부 전선으로,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6개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옮겼다. 병사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전쟁포로에게도 확대되었다. 야로슬라블, 예카테린부르크, 톰스크 수용소의 전쟁포로들도 5월 1일 러시아 병사들과 함께 수용소 밖에서 전쟁 반대 시위 참여를 허가받았다. 독일 병사들은 "곧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라고 요구했다.


 "병사들은 오랫동안 꾸준히 친목을 다졌다." 갈리치아 전선에 정치위원으로 파견된 빅토르 시클롭스키는 기록했다. "병사들은 방어선 사이에 있는 마을에서 같이 어울렸고 여기에 중립적인 전용 매춘업소를 열었다. 심지어 일부 장교들도 적과 어울렸다."



출처: 혁명 그 이후 1917~1921 러시아 내전, 앤터니 비버 지음, 이혜진 옮김, 눌와, 2024년, 53,  8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