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1932년 대구의 천석꾼 양반가 집안에서 출생하심. 천석꾼 집안에, 양조장을 경영하셨다 들었고 기와집에서 사셨다고 함.


할아버지의 증조부 되시는 분이 조선군 병마절제사 관직에 계셨다 얼핏 들은적이 있는거 같음.


그 당시 일본의 만주 및 하와이 침공으로 태평양전쟁이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단 한명도 일본군 징집, 징용자가 없었고 1945년 해방 직전에 엄마 아빠 형 동생 손잡고 다섯 명이 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성, 평양, 신의주 여행을 다녀왔을 정도니 얼마나 부자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감이 안잡힘. 

이때 평양성 대동문 근처 주막에서 메밀국수를 사먹고 원산 명사십리 해변에서 물놀이를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심.


그리고 해방 후 1946년에도 서울, 평양 여행을 다녀왔는데 이때 본 평양은 겨우 1년 지났음에도 뭔가 달랐다고 함.

평양내 큰건물에는 태극기와 소련의 빨간 깃발, 대형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여기저기에 해방자 붉은군대 만세!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현수막 같은게 다 걸려있었다 하심.

그리고 이때 46년 3월 할아버지의 아버님과 함께 정치대회가 열린다는 곳을 우연히 들리게 되었다는데 이때 김일성을 아주 가까이서 보셨다함. 말씀하시기론 키가 생각보다 작았고 김일성 "장군" 칭호에 걸맞지 않게 어린 청년이 나와 본인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그 김일성이라고 연설을 하는데 14살 소년 생각에도 저건 붉은군대가 세운 가짜라는 생각이 단번에 드셨다고 함.

이때 들으신 내용이 소련군대의 영웅적 희생으로 조선이 해방되었다, 소련과의 연합을 통해 민주주의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겠다 그런 내용이였다고 하셨는데 지금 김씨일가의 왕조국가로 전락한 북한괴뢰 상태를 보면 참 아이러니 하지.



1950년 6.25 사변이 터진날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막학년을 다니고 계셨다함.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친구와 공부를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에 동대문 근처 약속장소로 나갔는데 군인들이 전쟁이 터졌다고 트럭을 타고다니면서 괴뢰군이 오고 있다고 알리고 다닌걸 보심.


북한 괴뢰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으시자마자 약속이고 뭐고 바로 하숙집으로 돌아왔고 라디오를 통해 서울은 안전하다라는 뉴스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고 함.

고등학교 친구중에 이북지역 출신 친구들한테 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익히 알고있었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집안은 공산주의자 입장에서는 타도해야할 지주+자본가 집안이였기에 괴뢰군에 잡히면 무조건 집안 전체가 멸망이라는 생각에 모든 짐을 싸고 집 근처에 사는 친구들에게 안부인사를 전한뒤 다음날 아침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에 도착했지만 가지고 나온 돈이 다 떨어져 대전에서 걸어서 대구까지 왔고 인민군이 대전을 함락하고 낙동강 방어선이 설치되기직전 아슬아슬하게 대구 고향집에 도착하심.


이때도 할아버지 집안 중 단 한명도 국방군에 징집되지 않으심.


6.25 전쟁때만큼은 식량이 없어 너무 힘들게 사셨다 함. 전쟁으로 양조장을 돌릴 재료 공수가 다 막히는 바람에 집안 소유 논밭을 직접 경작해 먹고 살았다 하심.


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54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55년 서울로 돌아와 고려대학교 상학부(경제학부)에 입학, 56년 입대 영장이 나와 24살 늦은 나이에 논산훈련소로 입대하심. 이때는 창군기를 거쳐 전쟁으로 인해 군대고 사회고 모든게 개판인 시절이라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한 훈련병이 다수에 대학생 출신은 1만명중 5명이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였다 하심.


포병 특기를 받고 광주에 있는 포병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수료한 직후 포병 주특기지만 고려대학교 대학생이라는 배경 덕에 경남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으로 배치가 되었고 대학본부 인사계원으로 3년 6개월 3끼 장교식사 먹으면서 꿀빨고 전역하셨다 하심.


쓰다보니 재미가 없는데

해방 이전 썰이랑, 김일성 썰은 꽤나 흥미로워서 써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