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장악에 실패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온토노프-오브세옌코는 새로 조직된 남부전선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남부전선군 사령부는 라다를 대신하기 위해 급조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하리코프에 자리했다. 안토노프는 칼레딘 장군과의 전투 준비에 집중하면서 발트 함대 수병과 제국군에 징병되었던 보병을 구성된 적위대를 키예프로 진격시켰다. 이들을 지휘하는 것은 좌파 사회혁명당원이자 직업 장교인 미하일 무라비요프 중령이었다. 무라비요프는 먼저 폴타바를 점령해 붙잡힌 장교와 사관생도를 모두 처형했다. 그리고 키예프로 진격하는 길에 크루티에서 500명이 조금 넘는 소규모 우크라이나군에 승리를 거뒀다.


 키예프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잘 싸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실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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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다가 보낸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면서 볼셰비키의 입장은 더욱 불리해졌다. 당시 무라비요프의 키예프 공세가 임박해 있었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온 볼셰비키의 지배보다도 독일 점령 아래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1월 11일 '우크라이나와 동맹국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우크라이나는 독일의 보호국이 되었다. 볼셰비키에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독일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필수 자원도 확보해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즉시 100만 톤의 식량이 독일의 손에 들어왔다. 덕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국내에서 입지를 굳혔고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1월 5일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제헌의회를 해산하기 직전, 호프만 소장은 독일 최고사령부가 요구하는 국경이 그려진 지도를 보여주었다. 이 지도는 발트해 연안 지역과, 폴란드, 핀란드, 우크라이나의 포기를 뜻해 러시아에는 엄청난 수모였다. 전쟁 후 독일이 베르사유에서 받아들여야 했던, 독일을 끝없는 수렁으로 몰아넣은 베르사유 조약보다도 훨씬 가혹했다. 트로츠키는 신생국들은 국민의 의사를 표혀하려면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그날 저녁 타브리체스키궁에서 계획된 민주주의의 파괴를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트로츠키는 도일이 제안한 국경이 그려진 지도를 가지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 중앙위원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레닌은 오로지 볼셰비키 권력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아무리 수치스럽더라도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출처: 혁명 그 이후 1917~1921 러시아 내전, 앤터니 비버 지음, 이혜진 옮김, 눌와, 2024년, 184~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