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설화를 비롯한 고대 삼국의 문헌 자료에서는 ‘중매’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남녀 당사자들에 의한 자유로운 교제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또한 중국 사서인 『삼국지』 「고구려조」를 보면 “장유와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라든지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밤이 되면 읍락(邑落)마다 남녀가 무리지어 서로 노래하며 논다.”고 하여 고구려에서는 남녀 사이가 비교적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시집 장가가는데 남녀가 서로 좋으면 바로 혼례를 치른다.”고 한 『수서(隋書)』나 『북사(北史)』의 설명에서도 남녀 결합이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남녀의 개방적인 결합은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나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유신의 부모인 서현(舒玄)과 만명(萬明)이 길에서 만났는데 “서로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문희 역시 김춘추와 정식으로 혼인 관계가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기는 했지만 정식 혼인이 아닌데도 두 사람은 아무 거리낌 없이 결합하였다. 


태종무열왕 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강수(强首)도 20세가 되어 부모가 혼인시키려 하자, 이전에 사귀어온 야장의 딸을 아내로 내세웠다. 원성왕 때의 김현(金現) 역시 신라 풍속에 따라 흥륜사 전탑을 도는 탑돌이를 하다가 한 처녀와 눈이 맞아 탑돌이를 마친 뒤 바로 정을 통하였다.


또한 「서동요」의 배경 설화에서 선화공주는 귀양 가는 길에 서동이 나타나 동행하겠다고 하자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기뻐하며 따라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 그가 서동임을 알고 나서야 동요가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에 서동을 따라 백제로 갔다.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01_0030_0020_0010



남녀 결합의 낭만이 있기 때문인 거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