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aa7f320b5f92a927bb0859f45c40a0d5a8509d40137260454e9646112b30b26f78e924d3ead78a138c8d018d27bb9f8fab28519a5403ff12c16fde0a2f92403e92f4f971d35f7d13cce81f0d9f9ab81a150492703b31d1c3ac537fdee00ad501c58ae5305fd7d


1. 기기국 이야기
최초의 근대적 군수공장이 설립된 건 1880년대임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어 그 예하조직으로 군무사, 선함사, 군물사 3사가 군 관련기관으로 설치됨. 이중 선함사와 군물사가 군사장비 제조를 관장했음

같은 시기, 조선은 청과 일본으로의 근대문물 유학을 준비했음. 기술자들과 학생들을 보내 서구문물을 배워오겠다는 것이었음.

이 중 청나라에는 영선사가 파견되어 각종 공업기술을 도입하고자 했음. 청의 협조로 1883년 기기국이 설치되었고 1887년 삼청동에 기기국 산하 공장인 기기창이 들어섬. 이곳이 한국 최초 근대적 군수공장임.

기기창은 12마력의 증기기관과 소총제조기, 동모(퍼거션 캡) 제조기, 탄환제조기와 그 기술자들을 보유했음. 톈진기기국에서 보내준 중국인 기술자 4명도 같이 있었구

제약소, 즉 화약공장도 같이 설치되었음. 1889년에 일본의 기술지원으로 가평에 제약소가 설치되었고 운영 기술자들은 일본 육군제약소에서 배워옴. 1891년에는 제약기계가 도입되었고.


2. 기기의 한계
1) 근대화자금 부족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음. 우선 조선의 근대화자금이 너무 부족했어. 기기창 설비 구매비용은 고작 1만 냥이었음.

비교하자면 일본은 1884년 공채로 모은 1000만엔을 근대화자금에 투입했고 청나라는 푸저우 조선소에서 함선들 건조하는 데 500만냥 넘게 쓰고 있었음. 엄청난 차이지.

'한국 근대 공업사'에서는 이걸 두고 조선 정부의 인식과 제도의 결여라 설명함. 해관세 대부분이 차관 상환금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돈이 없기도 했지만.


2) 청나라의 농간
청이 농간을 부리기도 했음. 원래 청나라는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서 조선의 체급을 키워주려 했음. 그래서 청은 3만 한양수비군 전체를 무장시킬 수 있는 수준의 군수공장을 지어주기로 했었음

하지만 청나라 내에서 그럼 조선을 키웠다가 러시아나 일본에 붙으면 어떡하냐! 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결국 청나라는 조선의 국방력 강화를 저지해야 한다고 결정함.

결국 청나라는 유학 온 영선사를 회유해 기기창을 무기수리공장 수준으로 작게 짓는 데 합의하게 만들고, 대신 무기는 청에서 직접 제공해주기로 함. 그 결과 병기 제조보다는 수입과 수리에 치중하게 되면서 기기창의 규모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음

근데 다른 갤에서 듣기로는 뭐 당시 톈진 기기국 운영상태도 개판이라 청이 실제로 도움을 주려 했어도 효과적이었을지는 미지수라 함.

재정마련도 청나라의 간섭으로 좌절됨. 조선은 1887년과 1889년에 미국과 프랑스에 접근해 차관을 제공받고 그걸 식산흥업에 투입하려 했지만 다 청이 방해해서 도입에 실패함.

뭐 어쨌든 기기창은 이렇게 근근히 운영되었지만 제대로 굴러갈 리가 있나. 그러다 청일전쟁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신설된 군부 산하 조직인 포공국으로 이관됨.


3. 포공국 이야기
1895년 3월 군부관제가 발표되며 병기 및 병기 생산과 관련된 사항은 모두 군부 포공국 포병과로 이전되었음. 기기창 역시 기계창이라는 이름으로 그 산하에 들어감

아관파천과 칭제를 거치고 나서 조선, 그리고 그 후신 대한제국은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으로 깨강정이 난 군대를 러시아의 도움으로 간신히 복구했음.

이를 위해 조선 사절단이 1896년에 러시아를 방문, 니키 2세를 알현하고 군사적 협조를 구했음. 이때 민영환이 러시아군 탄약제조공장을 둘러본 것을 계기로 우렘노프란 인물이 포공국 기계창 고문으로 임명됨.

그리고 이제는 자국에서 무기를 생산해야 하지 않냐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소총 제작기계를 도입하기로 함. 조신화 정위와 2명의 기술자가 일본에 파견되어 생산장비를 구매해옴.

다만 이때 생산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미상이라 함. 이후로도 한국은 세창양행과 영국 회사, 그리고 프랑스를 통해 무기를 수입하고 있었음.

결론적으로 1900년 4월 17일 육군참장 백성기가 상소를 올렸음. 왜 공장 세워놓고서 만들지도 못하냐고. 특히 마우저 소총 총알은 우리 기술자들도 다 만들 줄 아는데 왜 수입하냐고 개극딜함.

정보를 조합해 보니 1902년까지 이런 답보 상태가 이어진 것 같음. 독일인 기술자 50명이 기계창에서 근무하고 있었다고는 해. 그나마 피복류는 백성기의 건의대로 자체생산해서 수급할 수 있었음.


4. 용산 군기창 이야기
대한제국도 이런 상황이 맘에 안 들었을 거임. 그리고 이때(1903년) 러시아가 자국 군수물자를 제식채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탁지부대신 이용익에게 제안한 모양임.

그러자 일본은 이건 안보문제상 중요한 일이다 판단해서 한국 군부대신 신기선에게 접근해 선수를 침. 일본산 아리사카 30년식 소총 생산 계약을 한국과 맺은 것임.

계약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평식원에서 도량형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던 일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가 주도해서 용산에 터를 잡고 군수공장을 지었음.

용산 군기창은 3년 후인 1905년 3월 20일에 비로소 완공되었음. 1일 생산량은 소총 10정과 탄 3000발이었다고 전해짐.

주요 한국인 관련인은 김정우였음. 독립운동가 김경천의 아버지임. 참고한 논문에서는 기사였다는데 더 찾아보니 훨씬 높은 인물이었음

김정우는 35세의 나이에 일본에 유학해서 게이오의숙과 동경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포병공창에서 탄환제조를 학습했음. 그리고 1905년부터 1908년까지 군기창장을 역임함.


5. 끝
근데 군기창이 완공된 해가 좀 쎄하다 싶을 텐데, 그 느낌이 맞음. 이미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용산 군기창은 제대로 운용될 수 없었음.

1904년 군기창관제에 따르면 군기창에는 총포제작소, 탄환제작소, 화약제조소, 제혁소, 직조소가 있었지만, 군기창이 완공된 1905년 3월에는 바로 총포탄환제조소와 화약제조소로 그 크기가 축소됨.

군대도 해산되고 있었음. 고작 한 달 뒤인 1905년 4월에는 주력부대인 친위대가 강제해산됐고, 1907년에는 나머지 부대들이 해산되었음.

이때 군기창도 일본군에 장악당했음. 본격적인 군대해산 직전인 1907년 7월 19일 시위 1연대 3대대 병사들이 고종의 퇴위에 반대하며 시민들과 합세, 일본경찰 수 명을 사살했음

그러자 일본군은 한국군 해산 준비를 서두르면서 먼저 군기창을 점령했음. 군기창이 주요 화기들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임. 이후 군기창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음.

그렇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죽어버렸던 한국 자체 군수공업은 해방 이후 부산 조병창을 시작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됨.


출처
영선사행 군계학조단의 재평가
한국 근대 공업사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 연구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