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원수부를 설치하고 민란진압에 적극 나선 이유는 일본 대리공사 히오키와의 대화에서 드러남. 당시 독립협회는 정부관원 집에 폭탄 테러까지 불사하면서 재집권을 노림.
히오키는 독립협회의 소요사태를 정부가 진압할 힘이 없다면 타국이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며 고종에게 넌지시 경고했고, 고종은 이걸 계기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군부를 동원해 소요를 진압함.
근데 막상 당시 한국군은 부대별로 영향받은 국가가 달랐고, 이건 파벌싸움이나 해외와의 결탁으로 이어졌음. 이건 당연히 대한제국과 고종 입장에선 존나 안 좋은 일이었고.
국내소요 진압을 위한 경찰력도 매우 약했음. 이 때문에 고종은 군사-경찰력을 강화하고 내부 정변에 대응하며 국외 위협에도 잘 대응할 필요를 느끼고 원수부를 세움. 육군무관학교를 세운 것도, 군대에 대한 해외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함이었음
주지하다시피 전쟁 발발시에는 각 영역의 유기적 협조가 요구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정부조직에 대한 원수부 통제력을 대폭 확대한 것은 차후 발발할 위기에 관한 대처를 원수부가 총괄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유사시 군무담당 기구가 정무담당 기구에 대해 ‘ 指揮命令權 ’ 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원수부의 권한을 극대 화시키는 가운데 대원수의 통제권을 재차 강조하며 황제에 귀속된 계통적 질서 또한 동시에 강화하였다. 이처럼 대외적 위기로 인해 군무정사는 격상되었고, 국방의 최고사령부인 원수부는 기존 정부조직을 상회하는 권한을 제도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1899년부터 러일의 전쟁이 가시화되고 의화단 전쟁으로 청나라 비적들의 국경충돌이 벌어지면서 고종은 군사력을 개편할 필요를 절감함. 원수부는 이 과정에서 군사업무의 유기적인 협조를 위해 설립됨.
원수부의 우선 업무는 청비 진압이었음. 의주, 강계, 북청 등 국경 지역 진위대 간부를 새로 임명해 내려보내고 친위대 600명을 비롯한 증원군을 파견함. 동시에 지방군들을 진위대로 일괄개칭한 후 3개대대가 모여 1개 연대를 구성하는 식으로 개편함. 공병과 치중병 부대도 보병에 예속시켰고.
이건 러시아와 일본의 개입을 차단하는 좋은 방책이었음. 러시아는 의화단 진압을 명분으로 한국에도 진출해 '느 안전보장 우리가 해줄까' 하려고 했는데, 한국군이 청비들을 알아서 다 격퇴해버리고 국경에 조밀하게 방어선을 구축하니 밀고내려올 틈이 없었음. 이 덕에 일본 역시 개입할 틈을 못 잡았고. 우리 국군에서는 이때 대응을 아주 성공적이라고 평가함.
추가로 러일의 충돌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 지역은 평양 일대였고 따라서 평양진위대가 진짜 연대급으로 증강되었음. 평양진위대와 친위대 합쳐서 6500 명은 정변과 국내소요에 대비해 한성에 주둔함.
원수부는 자주적 성격도 강했고 국내소요 진압에도 나섬. 곳곳에서 벌어지던 소요는 동학 때 그랬듯이 외국 군대의 개입을 부를 수 있었고 따라서 미리 한국군이 알아서 처리해서 우리 자주적 안정화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음.
실제로 성진에서 소요가 발생해 일본이 거류민 보호를 요청하자 원수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달랑 25명만 보내 문제를 해결함. 제주민요 당시에는 일본이 개입했다고 판단하자 병력 300명을 증파해 소요를 진압했고.
물론 이 모든건 러일전 터진 직후에 일본이 수만의 병력으로 한성 옆구리를 걷어차버리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지만
출처
대한제국기 군사 중심의 정국운영과 원수부 창설의 의미
러일전쟁 이전 대한제국 원수부의 군무정책 강화와 군사운영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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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수자나...
원수란 단어엔 많은 뜻이 있긴 하지 ㅋㅋㅋㅋ - dc App
독립협회는 친일에 테러 협박에... 잘 포장돼서 이미지 좋은게 신기 - dc App
명암이 확실하지 이쪽도 - dc App
초기에는 몰라도 중후반에 일본 어용단체 된 후로는 좋게 볼수가 없는듯. - dc App
ㄹㅇ - dc App
파면 팔수록 독립협회 이새끼들도 씹트롤임 ㅋㅋ
러시아가 전제군주제 서구열강이란 이유로 조국을 노리는 일본과 그 뒷배인 영국에 우호적이었던 건 도저히 이해가 안 가 - dc App
걔들 행적보면 국익때문이라기보단 지들 페티시즘에 기반했다고밖에 안보여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