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cb1c423f7dc39b267a9d38a1ed837299faa7b91a6409d1b4c2636703cbccb9f9d0e2505f0cbc0e922c33cd405d597fb666ff5d8a9d5


(대역갤에 올렸던 거 경제떡 좀 자르고 올림)

1. 국민정부의 국방건설
1930년대 통일을 완수한 우리의 장씨였지만, 제남 사건 이후 일본의 위협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던 상황에 처함. 군벌들도 깃발만 바꿔든 상태였음.

장씨는 답이 장기전이라고 생각하고 군사전략을 구상함. 독일 군사고문단의 팔켄하우젠도 지구전을 극비리에 조언함.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음

'차례차례 저항하고 싸우면서 퇴각하여, 공간의 양보를 통해 시간을 버는 것'

이를 위해 1936년 '민국 25년 국방계획 초안'이 작성됐음. 국방위원회의 직권이 확대되어 국방, 외교정책, 작전방침, 국방비편성 등등등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됨.

육군은 1934년부터 1937년 개전 당시까지 30개 사가 통일적으로 현대화 개편되었고 그와 별개로 200사가 독일 모델로 개편됨. 개별 사는 보병 2여 4단 총 12개 대대, 포병 1단 총 3개대대, 공병과 치중병 각 1개 대대씩으로 꽤나 충실하게 갖춤.

해군은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질적으론 고만고만했음. 반면 공군은 1930년부터 별도로 독립, 1936년부터 각 성의 항공기관을 전부 중앙에 귀속시켜 집중적인 운용을 할 수 있게 함. 황푸군관학교 특별반에서는 독일 고문단이 초중급 장교들을 쏟아내듯 양성함

군사위원회 내에는 자원위원회를 두었고, 동남연해의 군수공장들의 가동을 중지시킨 뒤 내륙 지역으로 재배치하려 했음. 쓰촨, 구이저우가 재배치 장소였음. 동시에 천수, 타이위안, 쓰촨 등에 있던 군수공장들을 정리하고 시안, 난창 등에 군수공장과 화약공장들을 신설하려 했음.

이 중 쓰촨은 최고의 전략후방기지였음. 1936년에 중공업 5개년 건설계획을 세워 독일의 지원을 받아 철강, 전기, 기계공장들을 대거 사천에 세우려 했음. 기술적으로는 자체 장갑차, 자체 대포 설계생산 단계에 돌입했고.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1937년, 일본이 쳐들어오며 미완의 결실을 맺은 채 끝남. 하지만 그동안 장총통이 건설한 시스템은 8년간 항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됨




2. 산시성의 10년계획
한편 중원대전 이후 개털 될 뻔한 옌시산도 산시에 돌아와서 국방경제건설을 추진함. 일본이 북방에서, 대장정 한 공산당이 서쪽에서 위협했거든.

산시 개발에 미쳐 있던 우리의 염씨는 포부랑 시작부터 남달랐음. 중공업건설을 위해 기초적인 상공업 현황, 자원 및 광산 분포, 철도 주변 상권 현황 등에 대한 정보들을 싸그리 수집함. 근데 막상 추진하려니 돈이 없었음.

염씨는 자신의 영지인 산시성과 수원성(오늘 내몽고 일부임)에 재무행정조직을 통일하고, 소득세 도입 등으로 세수를 늘림. 그리고 공영사업 형식으로 산서를 가로지르는 동.포철도를 건설했음.

물론 여기에는 공채를 발행하고 성의 교역과 상업을 통제하는 강압적 경제정책이 수반됨. 관세장벽을 올려 수출입화물을 엄격히 규제했고 이건 타이위안경제건설위원회의 엘리트들이 세밀하게 통제함. 산시성인민공영사업동사회의 기업들은 공영사업의 명분으로 무이자로 자금을 차입했고.

그리고 토산물이용운동을 통해 각지의 초보적 산업을 육성함. 담배는 물론이고 아편도 전매했음. 그냥 관제아편 정책을 추진했다고 보면 됨.

이에 힘입어 서북실업공사는 계열사들을 통해 철강, 기계, 전력, 내화재 등을 생산했고, 탄광들의 합동조직과 함께 산물을 적극적으로 성 외부에 수출함. 특히 타이위안의 철과 기계, 무기는 주변에 평판이 좋아 잘 팔렸음.

산시성의 병공창에서는 일본제 75mm 산포까지 생산해냈고 이건 당시 중국이 수급 가능한 최대 규모의 야포들이었음.







자세한 내용은 이쪽 방면으로 유명한 기세찬 교수님이랑 권성욱씨 책들 보면 알 수 있을거임. 본문에서도 기세찬 교수님 논문 하나 썼음

출처는 다음과 같음.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