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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시성 병공창
제남 사건(1928) 당시 군벌들이 전부 모인 총사령부 회의에서 포탄 부족으로 포병운용이 쉽지 않다는 얘기가 나옴.

그래서 군수참모 김홍일이 직접 옌시산에게 그쪽 병공창에서 소련제 62.5미리 포탄을 생산할수 있으니까 공급 가능하냐고 물었는데 옌시산은 힘들다고 답함.

일단 제작이 가능은 했는데, 옌시산 말로는 당시 산시병공창에 장약통(문맥상 탄피나 약협 말하는듯) 제작용 구리가 부족해서 이미 쏜 포탄들을 재생하는 형편이었다고 함.

그래서 옌시산은 완전한 포탄 5백발, 탄환 5백발만을 줄 테니 대신 포병 몇 명을 산시병공창에 파견해서 탄 재생법을 배워가라 답했음

그래서 김홍일이 타이위안에 직접 간 적은 없음. 대신 상하이 병공창 주임으로 있었지. 지금 중국해군 장난조선소 거기 말임.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새끼에게 던진 폭탄이나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 다 상해병공창 주임 자격으로 빼돌린 거였음



2. 국민정부 국방건설
대신 김홍일은 링크 걸린 글에서 설명한 국민정부의 후방지대 건설에 실무진으로 참여함

일본이 김홍일을 추적하자 국민당은 김홍일을 보호할 겸 후방으로 빼냈음. 그리고 김홍일은 우선 구이저우 전계군벌 부대들을 102사, 103사로 개편하는 작업을 했음.

당시 중앙에 반란을 꾀하던 광시군벌 리쭝런이 뒷공작을 부린 바람에 전계군벌 부대들은 중앙이 자신들을 해체하려는 게 아닌가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김홍일은 그 사단장과 연대장들이 전부 자기 학교 동기라는 걸 내세워서 오해를 풀고 중앙에 복종시킨 다음 쓰촨으로 이동시킴.

이 공으로 9인의 군수설계위원 중 하나가 됐음. 전쟁에 대비해 병기, 탄약, 양곡을 마련하고 병공창들을 후방이전했음. 새로 도입한 기계들도 후방에 설치했고.

장제스가 루산 서기훈련단이라고 전중국의 주요인재들을 불러모아 총력전을 준비시키자, 김홍일은 군수처 부처장을 겸임하고 전시 군대 경리에 대한 새 제도를 마련하는 데 힘썼음.

그러다 전쟁났고, 그 다음은 우리가 아는 대로임.

출처
대륙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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